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일으키는 의문과 질문이 있다면 아마도 나와 너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우리들의 운명은 정해진 것인가? 운명은 개척하여 바꿀 수 있으며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은 어디서 온 것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것도 모릅니다.

과학은 150억 년 전 하나의 티끌이 빅뱅하여 오늘의 우주 세계가 성립되었으며 지구가 속해있는 은하계에는 약 3,000개의 별이 있고, 우주에는 우리 은하계와 같은 은하계가 10년 전에는 약 2,000억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더욱 확장되어 약 2조(兆)개가 관측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학은 하나의 티끌이 빅뱅하기 전에 무엇이 있었으며 빅뱅한 하나의 티끌이 무엇인지 지금도 모릅니다. 그래서 너와 나 우리는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운명은 정해진 것인지, 개척하여 바꿀 수 있는지, 우리의 소원은 이룰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하나의 티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티끌 하나를 분해하여 들어가 봅니다. 그래서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세포, 원소, 원자, 쿼크 다음에는 최소입자 힉스를 발견했으나 힉스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힉스는 아마 신(神)의 입자일 것이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과학도 물질의 우리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리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소원은 이룰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라고 하며 실험으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 근거로 박사는 40억 년 전 지구의 바다에 처음 출현한 단세포가 진화와 유전을 거쳐 6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진화와 유전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원인과 결과이며 시작과 끝이 있기때문에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호킹 박사의 주장이 옳고 그름의 여부에 관계없이 운명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정해지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이고 우리 육신의 본질이 되는 물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운명은 곧 운명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미세먼지 수와 같은 우리의 모든 앎과 지식은 곧 앎과 지식이 아니며 뿌리와 근본이 없는 앎이고 허공에 쌓아놓은 탑과 같은 허망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알고 있는 일체의 모든 지식을 버리고 150억 년 전 하나의 티끌이 빅뱅하기 전으로 돌아가서 뿌리와 근본을 아는 참된 지식 곧 참된 나를 알아야 합니다. 이를 ‘부모에 나기 전에 참 나는 무엇인가?’ 또는 150억 년 전 빅뱅하기 전에 나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에 나기 전과 150억 년 전에 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구와 달 태양 수많은 별이 허공에 떠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허공과 물질의 지구와 태양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이는 몇 수십 미터도 못 보는 빈약한 우리의 눈이 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그러나 허공과 지구와 태양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이 없으면 따로 지구와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지구와 태양이 없으면 허공도 따로 있을 수 없기때문에 허공과 지구와 태양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융합하여 있습니다.

과학의 에너지보존의 법칙에서 성냥개비 하나를 태웠을 때, 성냥개비는 재와 열에너지로 모양이 바뀝니다. 열에너지는 어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그대로 머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냥개비가 재와 열에너지로 겉모양만 바꾼 것입니다. 결국 허공과 성냥개비도 에너지이고 재와 불의 열도 에너지이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 원소 원자 쿼크 힉스도 에너지이며 눈에 보이는 지구와 달과 태양 수많은 별도 허공과 같은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지구와 허공이 따로 있지 않고 서로 다르지 않으며 서로 융합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허공과 마음은 그 수명(壽命)을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허공과 지구와 태양이 융합하는 것을 성품 또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성품이란 하나의 티끌이 쌓이고 모인 것이 우주이고 우주는 하나의 티끌이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이 바로 우주이며 우주가 바로 하나의 티끌인 것을 성품이라고 합니다. 또한 우리들의 몸뚱이는 눈, 코, 입, 머리, 뼈, 혈액 등 여러 장기가 모인 것이므로 몸뚱이가 바로 눈이고, 눈이 바로 몸뚱인 것을 성품 또는 마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주 세계는 마음과 성품의 작용이고, 마음과 성품의 작용이 우주 세계입니다.

우주 세계가 곧 이 마음인 까닭에 나와 너는 어디서 온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운명은 정해진 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도 아니고 운명은 개척할 수도 개척 안할 수도 없습니다. 소원 또한 이루고 안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고 오고 정해진 것과 정해지지 않은 것 개척하는 것과 개척하지 않는 것 소원을 이루는 것과 이루지 않는 것이 모두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음을 깨달아 알지 못하므로 우주 세계가 무엇인지 모르고, 운명과 소원 역시 이 마음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주 세계가 곧 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곧 우주 세계입니다. 우주 세계가 있다 없다, 크다 작다, 더럽다 깨끗하다, 싫다 좋다 하는 티끌 수와 같은 분별 망상이 곧 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 마음은 못 보고 티끌 수와 같은 분별 망상만을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 마음을 못 보는 것은 분별 망상 때문이고, 분별 망상에 막혀 이 마음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이 마음의 우주 세계를 분별에 막혀 못 본다 하여도 우주 세계는 그대로 이 마음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또는 막힌 것을 뚫어내서 본다고 하여도 이 우주 세상은 바로 이 마음으로 티끌만큼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우주 세계는 우리가 보지 못하고 알고 알지 못하는 것과 아무런 관련 없이 그대로 이 마음,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은 “성심(聖心)을 설령 깨달았다 해도 정작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그토록 싫어해서 버리려 하는 생로병사와 코로나19를 비롯한 자연재해와 일반재해, 배고픔과 목마름, 죄와 벌 등 고통의 불행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또한 그토록 좋아해서 취하려는 다섯 가지 욕망 등의 즐거운 행복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불행과 좋아하는 행복이 바로 이 마음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불행은 싫어하고 행복은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마음을 깨달아 안다면 불행도 행복도 싫어하고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불행을 싫어하지 않으면 불행은 있을 수가 없으므로 영원히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좋아하지 않으면 따로 행복을 취할 필요가 없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행복이 영원한 행복입니다. 이와같이 참된 불행과 행복이 참된 홍익정신이고, 예수의 사랑이며, 부처의 자비입니다.

 

진원 스님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