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단군의 홍익과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를 실현하고자 하는 근본 목적은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고통에서 참되게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태어나서 젊고 건강했던 몸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고통과 근래 지구촌을 감염병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코로나19와 같은 질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또한 과다한 탄소를 배출하여 일으킨 기후변화로 인하여 빈번히 발생하는 태풍과 폭우, 폭설, 혹한, 혹서 등의 자연재해(自然災害)와 우리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교통사고 등과 같은 수많은 재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목마름, 가난, 죄와 벌 등등 불행으로 일컫는 티끌 수와 같은 모든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이와 같이 싫어하는 고통의 불행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우리가 좋아하는 행복의 즐거움이 되는 먹는 욕망, 잠자는 욕망, 사랑하는 욕망, 재물 욕망 명예 욕망을 뛰어넘어 티끌만큼도 부족함이 없는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런 모든 고통에서 참되게 벗어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루려는 우리 곧 「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나를 알려면 나를 있을 수 있도록 주도한 우주 세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주란 무엇인가? 우주에는 물질로 이루어진 수많은 별이 있는데 우리는 이 모든 별을 우주 세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주에는 물질로 이루어진 수많은 별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에는 이것은 지구다, 저것은 화성이다 태양이다 사람이다 동물이다, 하는 이름이 있고, 별과 지구에는 별과 지구를 구성하고 내포하는 산과 바다 사람과 동물과 식물 등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별과 지구의 모양새와 별과 지구가 자신을 외부로 표현하는 수많은 표식이 되는 뜻이 있고, 이름과 의미와 뜻에 대해서 싫어하고 좋아하며 탐하고 화를 내는 등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같이 우주와 지구를 나타내는 이름과 의미와 뜻과 느낌은 물질이 아니고 비물질(非物質)로서 활동하고 작용하는 이 마음 또는 성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주 세계는 곧 물질(物質)과 비물질(非物質)이다, 하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주는 물질과 비물질이 둘로 나뉘어 따로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중생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하고 생사 고통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일체를 둘로 나누어 차별하고 분별하는 어리석음의 뿌리를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음으로 첨단을 자랑하는 과학이 아직까지도 하나의 티끌조차 그 근본을 모르고 분분한 의견만 있을 뿐입니다.

우주는 물질과 비물질이다, 하여 따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과 물질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물질의 의미, 뜻, 느낌, 역할, 작용이 되는 생각과 마음의 비물질이 물질과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스스로 자신이 물질일 수 없습니다. 물질은 비물질(마음)에 의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비물질(마음)이 없으면 물질 또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은 스스로 있지 못하고 비물질(마음)로 의하여 있으므로 우리는 물질이 있다고 하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물질은 없는 것인가? 물질로 인하여 비물질(마음)이 있으므로 물질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물질은 스스로 없지 못하고 비물질로 인하여 없으므로 우리는 물질이 때로는 없다고 하지만 물질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비물질도 이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티끌 수와 같은 우주의 일체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서로 융합 융통합니다. 물질과 비물질이 융합 융통한다는 것은 물질이 곧 마음이고, 마음이 곧 물질로서 서로 다르지 않으며 활동하고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주 세계는 곧 이 마음이고, 우리들의 육신도 곧 이 마음이며, 「나」라는 것도 이 마음입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티끌 수와 같은 모든 고통의 불행과 티끌만큼도 부족함이 없는 즐거움의 행복도 곧 이 마음입니다.

우리는 싫어하는 고통의 불행은 버리고, 좋아하는 즐거움의 행복은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싫어하는 고통은 버리지 못하고 좋아하는 행복은 얻지를 못합니다. 설령 고통을 버렸다 해도 계속 다시 생기기 때문이고, 설령 즐거움을 얻었다 해도 그 즐거움이 계속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통은 스스로 있지 못하고 즐거움으로 인하여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통을 버리려 하면 이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즐거움을 버리게 되어서 고통이 다시 생기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고통을 버리지 않으면 즐거움을 버리지 않게 되어 고통은 다시 생기지 않습니다.

즐거움 또한 스스로 있지 못하고 고통으로 인하여 있어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즐거움의 행복을 얻으려 하면 즐거움의 근거가 되는 고통을 얻게 되어서 즐거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즐거움을 얻으려 하지 않으면 고통을 얻지 않게 되어 즐거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싫어하는 고통의 불행과 좋아하는 즐거움의 행복은 바로 이 마음의 활동이고 작용이므로 따로 버릴 수도 없고, 따로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듯 바르게 알아서 고통을 버리지 않으면 고통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고, 즐거움 또한 얻으려 하지 않으면 즐거움은 없어지지 않아서 영원히 충족할 것입니다. 이같이 올바르게 아는 고통과 즐거움이 참된 단군의 홍익정신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이며 세계를 밝게 비추는 동방의 등불입니다.

 

진원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