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고전물리학이 주장한 것처럼 시간과 공간, 입자와 파동 등이 고정되거나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상대의 조건에 따라 존재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왜 이와 같은 상대성이론을 말한 것입니까? 우리가 과학, 문학, 예술 등의 모든 학문 활동을 하는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직 우리가 지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서 즐겁고 편안한 행복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과 입자와 파동이 고정되고 확정되어 있다면, 있다는 것은 결국 무너지고 사라지는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대성이론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우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 나름대로 티끌 수와 같은 행위를 합니다. 먹고 자고 애정을 나누고 재물을 모으고 명예를 키우며 그리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하고 촉감을 느끼고 움직이면서 있다 없다, 크다 작다, 예쁘다 밉다, 취하고 버리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등등의 수많은 행동을 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행위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願)하는 것을 구(求)하고 얻으려는 근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원하고 구하고 얻으려 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하고 얻으려는 것입니다. 우주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간 동안 진화하고 유전하여 쌓아온 원초적이고 태생적인 생사의 고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의 티끌 수와 같은 행위는 이 같은 원초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 뿐입니다.

어떤 시인이 말했습니다. “시(詩)는 고통 위에 핀 꽃이다.” 지금 고통이 있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시를 씁니다. 만약 고통스럽지 않다면 시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와 고통은 서로 상대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또한 화가 피카소도 말하기를, “모든 것은 상대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다른 뜻이 아니라 다만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간절하고 치열하게 집중하다 보니 내가 지닌 고통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상대로 인하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깊이 매진하다 보면 그 일이 마음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고통이 바로 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바로 고통이므로 고통과 마음, 물질과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진실을 지금 제4차 산업시대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제4차 산업시대를 세분하면 출발시대와 초입, 중입, 상입시대로 나눌 수 있으며, 지금 4차 산업의 출발시대에서는 물질은 곧 물질이 아니고 데이터와 정보이므로 물질의 현실 세계를 가상현실 세계 즉, 가짜 현실 세계로 보고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가짜 세계로 인식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 입자와 파동이 고정되거나 확정되어 있지 않다는 상대성이론보다 한발 앞선 이론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입자와 파동이 바로 시간과 공간, 입자와 파동이 아니고 데이터와 정보이기 때문에 모두 가상 가짜의 시간과 공간, 입자와 파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데이터와 정보에 관한 불교의 입장을 살펴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만법(萬法)은 하나의 법으로 돌아가는데 하나의 법을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 선사가 말했습니다. “내가 청주에 있었을 때, 장삼 한 벌을 지었는데 베가 일곱 근이었다네.”

만 가지 법은 하나의 법이 모인 것이므로 만 가지 법은 하나의 법으로 돌아가고, 하나의 법이 모여서 만 가지 법이 되었으므로 하나의 법은 만 가지 법으로 돌아갑니다. 우주 세계의 모든 미세먼지는 하나의 미세먼지로 돌아가고, 하나의 미세먼지는 우주 세계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하나의 법이 모여서 만법이 되었고, 하나의 미세먼지가 모여서 우주 세계가 되었으므로 하나의 법이 곧 만법이고, 하나의 미세먼지가 곧 우주 세계입니다.

그래서 조주 선사가 베옷 한 벌이 일곱 근이라고 말한 것은, 일곱 근은 한 근으로 인하고, 한 근은 일곱 근으로 인한 것이므로 한 벌 베옷이 바로 일곱 근이고, 일곱 근이 바로 한 벌 베옷입니다. 베옷은 물질이고 한 벌과 일곱 근이라는 숫자가 이 마음인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법과 하나의 법, 장삼 한 벌과 베 일곱 근이라는 숫자가 바로 데이터와 정보로서 이름이고, 의미이며, 뜻이고, 느낌이며, 역할과 작용으로 모두가 이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 세계의 일체 존재가 바로 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바로 우주 세계의 일체 존재라는 것을 4차 산업의 인공지능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자동차의 모든 기기를 조작하고 또한 도로에 있는 신호등과 장애물에 대처하는 모든 동작을 할 때, 자동차와 사람 신호등과 장애물은 베 일곱 근과 같이 숫자이고, 이름 의미 뜻 느낌 역할 작용으로 모두 이 마음이며 데이터와 정보입니다.

이 지능(데이터, 마음)이 바로 01100100 등의 숫자이고, 이 숫자가 자율주행 로봇입니다. 지능(데이터) 곧 마음을 숫자로 변환하여 기계에 적용했다 하여 01100100 등의 숫자를 기계 몸속 어디에 넣은 것이 아닙니다. 기계 자체가 01100100 등의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자동차가 곧 데이터(01100100)라는 것은 자동차가 곧 이 마음이라는 것이고, 데이터(01100100)가 곧 자동차라는 것은 이 마음이 곧 자동차라는 것입니다.

또한 베옷 한 벌이 일곱 근이었듯이 기계의 무게가 70kg이라면, 기계 자체가 70kg이라는 숫자이므로 기계와 숫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의 부피를 방정식으로 풀어내면 기계 자체 그대로가 방정식의 숫자이므로 우리들의 몸뚱이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계가 있다는 것은 그 기계와 모든 부속품에 해당하는 숫자가 있고, 기계와 모든 부속품의 이름과 기계를 구성하는 의미와 기계를 표현하는 뜻과 기계의 느낌과 기계의 역할과 작용의 이 마음이 있으므로 물질의 기계가 바로 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바로 물질의 기계로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 융합합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이 몸뚱이가 곧 이 마음이고, 이 마음이 곧 고통의 이 몸뚱이라는 진실을 깨달아 모든 고통은 참되게 영원히 벗어나고, 행복은 참되게 영원히 얻을 수 있는 길이 어둠의 고통 세계를 밝게 비추는 동방의 등불 대한민국이며, 단군의 홍익, 예수의 사랑, 부처의 자비인 것입니다.

진원 스님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