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이미지 극단 고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이미지 극단 고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작/연출 이해성)는 굴뚝 위에서 굴뚝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면? 맞다, <고도를 기다며>, 20세기를 대표하는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을 오마주했다.

 <굴뚝을 기다리며> 작/연출 이해성은 오랫동안 노동자들과 지속적인 연대활동을 쌓아왔다. 그 경험과 질문을 토대로 원작에 대한 각색을 넘어, ‘고도를 기다린다’는 모티브만을 차용해 굴뚝에 올라 굴뚝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다시 쓰기 하였다.

작가 이해성이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는 2016년 블랙리스트 사태 당시 광화문 광장 캠핑촌에서 함께 했던 유성, 쌍차, 콜트콜텍, 파인텍 등 고공농성을 해본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부터였다.

이후 2018년 겨울, 파인텍 해고노동자인 홍기탁, 박준호의 고공농성에 연대해 15일간 동조 단식을 하면서 그는 단식자 텐트에서 구체적으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아래서 까마득히 높은 굴뚝을 올려다보며 투쟁승리나 노동해방 사회정의 같은 거창한 구호를 떠올리기보다는, 작가는 실존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음의 경계에 있는 극단적 고통 속에서 자발적인 감금을 선택한 이해할 수 없는 초인적인 모습. 이 폭력적인 세상에 던져진 인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선택은 그들 자신과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는가.

그리고 408일이라는 최장기 고공농성자였던 차광호와 함께 지내며 그 경험들을 인터뷰하고 차광호가 고공농성 기간 중 작성한 일기를 빌려와 읽으면서 굴뚝이라는 시공간을 체감하고 작품에 반영하게 되었다.

작가 이해성은 오지 않는 고도를 통해 ‘실존’을 물었던 베케트를 차용해, 가장 저항적인 행위로서 ‘기다림’을 선택한 노동자들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출연진. 이미지 극단 고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출연진. 이미지 극단 고래

<굴뚝을 기다리며>는 작품 내내 지속되는 언어유희와 놀이를 통해 실소와 폭소, 비극성과 희극성을 넘나듦으로써, 기술로 대체되는 인간노동의 문제와 동시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노동현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증언한다.

극단 고래가 2021년 초연 이후 2년 만에 하는 재공연인데, 빠르게 변화하는 동시대 사회상을 고려할 때 작가는 텍스트를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동 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노동(권)에 대한 인식은 더더욱 빠르게 퇴보하고 있다. 게다가 인간 노동의 종말을 실현해낼 것 같은 ‘챗GPT’의 등장, 가상세계에서 새로운 노동과 놀이 문화를 보여주는 ‘메타버스’ 등 새롭게 등장한 노동 환경에 대한 성찰을 반영했다.

극단 고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포스터. 이미지 극단 고래
극단 고래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포스터. 이미지 극단 고래

그러나 <굴뚝을 기다리며>는 결코 노동 현실에 대한 고발만이 아니다. K-방역, K-팝, 오스카상 수상 등 한국 사회를 치장하는 화려한 문구 뒤에 숨겨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줄타기하는 많은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위트 있는 대사들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주인공들의 재담을 들으며 한바탕 웃고 일어서는 그 자리에서 관객이 스스로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묻는다면 이 연극은 성공한 것이다. 

2023년 재공연되는 <굴뚝을 기다리며>는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물론이고 한 인간으로서의 노동과 실존에 묵직한 질문을 던질 것이다. 출연  홍철희, 오찬혁, 사현명, 김재환, 김예람.

<굴뚝을 기다리며>은 5월 25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울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공연한다. 공연시간은 평일 저녁 8시 주말과 현충일에는 오후 4시. 월요일에는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