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전문지 ‘더 디플러맷’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미국 외교전문지 ‘더 디플러맷’에 실린 군함도의 진실
  • 강나리 기자
  • heonjukk@naver.com
  • 승인 2020.06.30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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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전문가 호사카 유지 교수, 군함도 칼럼 게재

한일관계 전문가 호사카 유지 교수는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외교 전문지 ‘더 디플러맷(Ther Diplomat)’에 ‘군함도 전시관(정식명칭-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가 미국 외교전문지'더 디플러맨(외교관)'에 일본정부가 세운 '군함도 전시관'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사진='코리아넷' 갈무리]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가 미국 외교전문지'더 디플러맨(외교관)'에 일본정부가 세운 '군함도 전시관'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다. [사진='코리아넷' 갈무리]

‘일제 강점기 하시마 섬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일본의 만행을 기억한다(Remembering Japan's Colonial Abuses Against Koreans on Hashima Island)’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은 하시마섬(군함도)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는 수많은 조선인들의 증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칼럼에는 군함도 전시관에서 한국인 노동자 2세의 증언이라 게재한 영상에 담긴 일본정부의 속임수, 다수 피해자의 증언 외면을 비롯해 일본 탄광노동의 역사, 그동안 밝혀진 중국인, 대만인, 조선인 강제징용의 참상 등을 낱낱이 밝혔다.

해당칼럼은 정부 대표 해외홍보 매체인 코리아넷에도 게재되었으며, 해외문화홍보원 누리집에서 한글로 된 칼럼을 볼 수 있다.

[전문]

"일제 강점기 하시마 섬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해진 일본의 만행을 기억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 세종대 [사진='코리아넷' 갈무리]
호사카 유지 교수/ 세종대 [사진='코리아넷' 갈무리]

일본이 지난 15일 일반에 공개한 ‘산업유산정보센터’는 2015년 7월 한일 간 합의를 어긴 부당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일본은 2015년 7월 나가사키(長崎) 군함도 등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군데’를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23군데 중 7군데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연행 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린 시설이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이 시설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는데 반대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징용의 사실을 적절하게 전시하겠다고 약속해 한국 측은 일본 측 시설들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에 동의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2년 이내에 조선인 강제징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시하겠다는 약속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거의 5년이 지난 2020년 6월 15일 도쿄 신주쿠(新宿)구에 자리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일반에 공개했다. 이 센터는 일본 정부가 지원하는 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가 운영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나가사키시 소재 하시마 섬(端島=군함도) 탄광에서 한반도 출신자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전 주민들의 증언 등이 전시・소개된 사실이다. 이 전시물의 의도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징용했지만 그것은 합법이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전쟁 시 같은 비상사태에서는 국민들을 강제동원하는 것은 국제법에서도 인정된다는 논리를 일본 측이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인도 일본국적자였으니 일본법에 따르는 것은 당연했다고 강변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을 가졌을 뿐, 일본인과 같은 법적 대우를 받지 못했다. 당시 조선과 중국, 대만 그리고 일본은 서로 다른 법역(법적 구역)이었다. 법역의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가지 차별이 조선과 중국, 대만 등 일본의 식민지에서는 따라다녔다. 그 한 사례는 조선인 등 외지인(外地人)들에게는 보통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45년 4월 외지인에도 일본 내지의 국정선거 참정권이 주어진다고 결정됐지만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인이나 중국인, 대만인들에는 일본국민으로서의 의무만을 요구했고 권리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 일제 차별정책의 핵심이었다.

일제는 탄광노동이라는 가장 힘든 일에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전쟁포로들을 동원했다. 미국인 포로로 일본의 탄광노동에 투입된 사람들은 탄광 갱도로 들어가서 일을 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계속 자해를 해 갱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는 생생한 증언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힘든 탄광노동을 하려는 일본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탄광노동은 죄수노동으로 시작된 역사가 있다. 규슈의 미이케(三池) 탄광 등 큰 탄광에서는 초기에 무기징역 이상의 판결이 확정된 죄수들을 탄광 노동에 투입했다.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해 죄수들이 수차례 탄광에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관리자들이 죄수들을 폭행, 살해하는 등 상당한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그러자 탄광 죄수노동이 대부분 중지되었다. 이후 탄광회사들은 일본의 극빈층을 모집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자 조선인 등 식민지 사람들과 전쟁포로들을 탄광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처음부터 일본인을 대신해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전쟁포로들 등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전쟁시 강제 징용의 실태인 것이다.

힘든 노동 때문에 탄광으로 연행된 조선인들의 약 70%는 도주했다는 통계가 있다. 조선인들이 도주할 경우 이들의 강제저축은 모두 회사가 가로챘다. 일본인들은 저축통장과 도장을 본인이 갖고 있었으나 조선인 노동자들의 통장과 도장은 감독관이 갖고 있어 도주나 중도퇴직 시에는 모두 회사의 돈으로 회수되었다.

하시마 섬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하시마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18km 이상 헤엄쳐야 했다. 이 때문에 도주하다가 익사한 사람들이 많았다. 도주하지 못한 사람들은 심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군함도에서 감독관을 지낸 고사코 마사유키(小迫正行)씨는 1973년 10월 25일 아사히신문 나가사키(長崎)판 인터뷰를 통해 군함도에서 조선인들을 차별했다고 증언했다. “나도 조선에 모집하러 갔고 강제적으로 조선인들을 연행했다. (중간 생략) 우리는 중국인, 대만인이나 조선인들을 평소 차별했다. (중간 생략) 전쟁 시 탄광에서는 군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힘든 노동을 시켰다. 도주하다 바다에서 익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해서 패전했을 때 먼저 비밀리에 중국인, 대만인과 조선인을 감독한 사람들을 섬에서 피신시켰다.”

이번에 일반에 공개된 정보센터에는 조선인 차별이 없었다는 증언만이 전시됐다. 아버지가 하시마 섬 탄광에서 일했다고 하는 재일 조선인 2세는 “괴롭힘을 당했다든가 손가락질로 ‘저건 조선인이야’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의 아버지는 감독관이었다고 한다. 감독관 지위가 주어지는 조선인은 당시 일본으로 본적을 옮긴 사람이었고 본적이 일본이면 일본인 대우를 받았다. 법역으로 대우를 결정한 것이 당시 일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라도 조선에 본적이 있다면 그는 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가졌다. 그러므로 조선인이라고 해도 일본인 대우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후손 증언만을 전시하는 것 자체가 역사왜곡행위다. 일본은 하시마 섬에서 심하게 차별을 받았다는 수 많은 조선인들의 증언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 정부가 도쿄에 정보센터를 연 이유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는 2020년 7월 개최될 예정이었던 도쿄올림픽 때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서 도쿄에 문을 연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현재 한일 간 대립되고 있는 강제징용 판결 문제를 일본 측에 유리하게 만들 목적으로 이번 정보센터를 개관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아무리 왜곡해도 역사적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일본은 역사 왜곡으로 국가적 위상을 계속 떨어뜨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Remembering Japan’s colonial abuses against Koreans on Hashima Island"

Jun 27, 2020

The following op-ed was written by Yuji Hosaka, a professor at Sejong University in Seoul, and published by The Diplomat on June 25, 2020. Korea.net has received the author's permission to publish his article.

Despite the claims of a former resident of the island, Japanese abuses against Koreans were widespread.

By Yuji Hosaka  Professor at Sejong University

Japan's Industrial Heritage Information Centre, which was opened to the public on June 15, contains inappropriate content that breaches an agreement reached in July 2015 by both Korea and Japan. In the same month, Japan had 23 sites of the Meiji Industrial Revolution, including Hashima Island in Nagasaki, added to the UNESCO World Heritage list despite initial opposition from the Korean government. Korea's resistance was because seven of the 23 sites were venues where Koreans were forced to work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of the Korean Peninsula. Japan then pledged to Korea and UNESCO to appropriately exhibit the historical truth behind Japan's mobilization of Koreans for forced labor. This earned Tokyo approval from Seoul for the registration of the sites on the UNESCO list.

Less than two years later,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 broke its promise to present the historical fact of Japan's mobilization of Koreans for forced labor. And nearly five years later on June 15, 2020, the Industrial Heritage Information Centre was opened in Tokyo's Shinjuku district. The center is run by the government-funded foundation National Congress of Industrial Heritage.

The problem lies in the center's exhibition for quoting a former resident of Hashima (Battleship) Island as saying in testimony that no discrimination occurred against Korean coal mine workers on the island. The purpose of this exhibition thus seeks to convey the hidden rationale that though Koreans were mobilized for forced labor, Japan could legally do so as Korea was a Japanese colony at the time. In other words, Japan is trying to apply the logic that international law allows the mobilization of forced laborers in times of an emergency like war. The same logic is being used to argue that Koreans found it natural to follow Japanese law as the latter considered them Japanese nationals at the time.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Koreans did hold Japanese nationality but were denied equal legal treatment as Japanese nationals. At the time, Korea, Taiwan and Japan were all separate legal territories, and many cases of discrimination rooted in such differences were prevalent in Japanese colonies. For example, Koreans or non-Japanese nationals from these areas were denied suffrage for general elections. In April 1945, the Japanese government decided to grant non-Japanese in Japanese colonies the right to vote in a colony's national elections, but this measure was never implemented. The crux of Japan's discrimination policy lies in demanding that non-Japanese residents of its colonial territories like Korea and Taiwan fulfill their duty as Japanese without granting them the same rights as nationals.

Japan forced Koreans, Chinese, Taiwanese and other prisoners of war to work in coal mines, the toughest kind of labor in Japan. Even American prisoners of war (POW) forced to work in such mines recalled that they even resorted to self-harm to avoid working inside the mines for fear of dying. Their vivid testimonies drew heavy media spotlight.

In Japan, coal miners were replaced with prison laborers because of tough working conditions. In large mines such as the Miike coal mine in Kyushu, the country initially sent inmates serving a life sentence or worse to work. These workers rioted many times because of inhumane treatment, and this led to major human rights violations as they were ended up assaulted or even murdered by prison guards. Japan eventually stopped sending prison labor to work in most coal mines. Mining companies then recruited those in extreme poverty, but because of a lack of workers, they decided to send people from Japanese colonies and POWs. Thus this began the reality of the sacrifice of Koreans, Chinese, Taiwanese and other POWs to replace Japanese workers at coal mines during Japan's period of wartime forced labor.

Statistics say approximately 70 percent of Koreans forced to work at the mines ran away because of the tough labor. When they ran away, companies took all of their forced savings. Unlike Japanese workers who could keep their bank account ledgers and personal stamps with them, Korean laborers had to entrust them to their supervisors. When Korean workers quit or escaped, all of their savings were taken by their companies.

Things on Hashima Island got even more miserable. Because swimming more than 18 km was needed to escape the island, many who tried to flee drowned. Those caught trying to escape were forced to perform labor under extreme conditions. Masayuki Kosako, a former supervisor on the island, told the Nagasaki edition of The Asahi Shimbun in an interview on Oct. 25, 1973, that he discriminated against Korean workers on the island. "I went to Korea to hunt down workers by force. We ordinarily discriminated against either Chinese or Korean workers. In wartime, we made workers perform labor much tougher than in the military; some of them drowned while trying to run away. When Japan was defeated in (World War II), we let supervisors of Chinese, Taiwanese and Korean workers secretly escape from the island first because of the fear of revenge from Korean workers," he said.

The information center only shows the testimony of a former island resident, a second-generation Korean Japanese, who claimed no discrimination occurred against Koreans. He said his father worked at the coal mine on the island and denied any bullying or fingerpointing toward Koreans. He said his father was a supervisor. Koreans who had a Japanese family registry were granted the status of supervisor. For Koreans, if their family registry was registered as Japanese, they received the same treatment as Japanese. This is because of the Japanese policy designating a person's treatment according to legal territory. The same policy applied to Japanese. If a Japanese's family registry was Korean, he or she had the same legal status as a Korean. Thus the display of such testimony itself is an act of history distortion, as the center only shows testimony from a descendant of a Korean Japanese who might have received the same legal treatment as a Japanese. Japan cannot disregard testimonies from the numerous Korean workers who suffered harsh discrimination on Hashima Island.

A political intention could be behind why the Japanese government opened the information center in Tokyo. The suspicion is that Japan opened the center to target international tourists entering the country for the Tokyo Summer Olympics, which was initially scheduled to open in July 2020. Japan might also have opened the center to secure stronger ground for prevailing on the issue of forced labor victims, which is a major source of conflict between Korea and Japan. Despite such attempts at history distortion, the truth of history will come out. Japan must realize that its history distortion attempts merely continue to undermine its national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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