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건국 110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에서 다원적 국제질서의 중심에 섰던 고려의 역사적 의미와 문화를 조명하는 학술회의가 곳곳에서 열렸다. 최근 남북관계의 진전 속에서, 자력으로 통일을 달성하여 건국 초부터 다양한 종족을 사회구성원으로 품은 고려를 재조명하려는 것이다.

한국중세사학회는 동북아역사재단과 공동으로 지난 25일 13시부터 고려대학교 문과대 서관 강의실에서 ‘동아시아 속의 고려왕조, 국가인식의 토대 천하관’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했다.

한국중세사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주최한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지난 2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 서관 강의실에서 열렸다. 종합토론 장면. [사진=한국중세사학회]
한국중세사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주최한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지난 2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 서관 강의실에서 열렸다. 종합토론 장면. [사진=한국중세사학회]

한국중세사학회 김기섭 회장은 “남‧북간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는 시점에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룬 고려건국 1100주년을 기념할 수 있게 되어 의의가 크다.”며 “이번 학술회의는 향후 전개될 남북 평화의 시대 출발점에서 역사적 동질성을 찾아가는 계기 만드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취지를 밝혔다.

이날 1부 주제발표는 국민대 홍영의 교수가 사회를 맡아 ‘동아시아 속 고려의 자존의식’을 소주제로 진행되었다. 첫 주제발표를 맡은 건국대 신안식 교수는 ‘고구려 계승, 고려의 경계인식’을 주제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고려의 영토 인식과 천하관으로 정립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신 교수는 거란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였던 서희 등의 사례를 들어 “고려의 영토인식은 통일신라와 구고구려의 영역까지를 포괄했고, 북방의 압록강은 고려의 대외적 ‘경계’ 인식의 중심이었다.”며 “1033년 ‘고려장성’이 축조되고 이를 중심으로 ‘화내‧화외’의 고려 천화관이 정립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경상대 윤경진 교수는 ‘고려의 일통삼한一統三韓, 해동천하海東天下의 형성’을 주제로 신라 말 고려 초 금석문에 나타난 자료를 바탕으로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로 이어진 과정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발표했다. 윤 교수는 “고려는 주변국과의 관계에 대해 조공을 바치며 고려에 사대하는 외부의 존재를 통해 ‘해동천하’를 표상하고, 한편으로 이 천하가 ’중화천화‘와 병존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지난 25일 열린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회의는 '동아시아 속의 고려왕조, 국가인식의 토대-천하관'을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사진=한국중세사학회]
지난 25일 열린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회의는 '동아시아 속의 고려왕조, 국가인식의 토대-천하관'을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다. [사진=한국중세사학회]

서울대 추명엽 교수는 ‘고려의 다원적 종족 구성과 아국我國‧아동방我東方 의식’을 주제로, 건국 초부터 다양한 종족과 국가의 주민을 별다른 거부 없이 받아들여 ‘다민족(종족) 영역국가’체계를 갖춘 고려의 개방적인 사회구성 원리를 분석했다. 추 교수는 “고려 건국 당시 인구가 210만~300만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발해와 여진, 거란 등 투화인이 17만 명”이었다며 “이들은 투항하거나 사신으로 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한시적 거주 내지 영구 거주하면서 고려 해동천하를 이루었다.”고 밝혔다.

추 교수는 “고려의 지배층은 고려인을 중심으로 한 국가단위인 아국我國이라는 집단적 정체성과 그보다 더 포괄적인 단위인 아동방我東方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을 인식했다. 이는 조선이라는 정체성으로 발전해 나가는 연속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장욱 교류홍보실장은 ‘10·11세기 송나라의 대 고려, 거란 외교정책과 인식에 대한 검토’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 실장은 “고려 초기인 10~11세기 동아시아는 중국대륙을 비롯해 새로운 주변 이민족 정권들이 일어남으로 인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재편하게 되었다.”며 고려와 송, 거란이 새로운 대외관계를 모색하던 시기를 조명했다.

이날 2부 주제발표는 목포대 한정훈 교수가 사회를 맡아 ‘고려의 예제禮制 운영과 국가의식’을 소주제로 진행되었다. 서울시립대 김윤정 박사는 ‘고려의 문화의식과 화풍(華風)과 토풍(土風)의 갈등’을 주제로 고려시기 대외관계와 문화수용의 변화과정 속에서 고려인 자신의 문화정체성을 어떻게 구축하고 있었는지 검토하였다. 토풍은 외래문화와 구분되는 고려의 고유문화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김 박사는 “태조 왕건은 훈요10조를 통해서 화풍에 대한 지향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와 중국이 풍토가 다름을 지적하며 차별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문화에 대한 분별의식과 화풍에 대한 제한적 수용론은 건국 초부터 유지하고 있었다.”며 “토풍과 화풍의 갈등, 토풍 강화 의식이 표출된 것은 성종때 외래문화의 강력한 유입과 거란과의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 속에서 대두되었다. 고려의 문화정체성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갔다.”고 강조했다.

건국대 한정수 박사는 ‘고려시대 국가의례의 설행과 통합의식’을 주제로 고려시대 국가의례의 정비과정, 의례의 분류 및 특징을 분석하고, 국가의례에 반영된 통합기제와 그 통합의식의 지향점을 조명했다. 한 교수는 “고려는 그들이 지향한 해동천자가 다스리는 태평천을 위해 국가의례를 구조화해나갔다. 기본적으로 왕실혈통 신성화와 관련된 ‘용손龍孫의식’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공업과 왕조계승, 불교·유교·도교 3교가 보호하는 천하, 군신이 여민과 함께 즐거워하는 태평천 건설 등의 내용이 반영되었다.”며 “고려의 국가의례를 면밀하게 보기 위한 시도로 ‘해동천하례’에 대한 본격적 정리가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주제발표자들. [사진=한국중세사학회]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주제발표자들. [사진=한국중세사학회]

전남대 서금석 박사는 ‘고려의 국가절일(節日)과 자존의식’을 주제로, 고려가 어떠한 사회를 지향했는지 조명했다. 서 박사는 국가적 명절 중 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풍속인 속절俗節(설날, 한식, 단오, 추석 등) 중 조선과 비교해 고려에서만 운용되었던 상원上元(대보름)‧상사上巳(삼짇날)‧重九(중양절)를 살펴보며 “고려의 속절 제정과 운영이 고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요긴한 대안 중 하나였다.”고 했다.

한남대 허인욱 교수는 ‘군주의 호칭으로 본 고려 전기의 대외인식’을 주제로 발표했다. 허 교수는 “고려의 군주는 중원의 ‘황제’, 유목세계의 ‘가한’과 더불어 요동 동쪽세계에 군림하는 ‘대왕’으로 불렀으며, 별도의 천하관을 갖고 있었다. 전근대시기 동북아시아의 대외관계에 관한 기본이론인 ‘조공-책봉관계’의 틀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고려의 ‘대왕’을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한편 한국중세사학회는 학술회의와 함께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21세기에 다시 보는 고려시대의 역사’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