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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영 규원사화 위서설 학계의 지지를 받지 못해
심백섭, 정영훈 규원사화 석박학위논문

▲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1990년대에 들어와 규원사화 연구는 조인성의 위서설에도 흔들림 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연구자는 정영훈(鄭榮薰)이다. 
 
그는 1990년 규원사화의 연구수준을 한 단계 높인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나타난 민족의식民族意識〉1)에서 조인성의 주장을 “우리 정신사를 유가들의 사고수준만 염두에 두고 논하는 ‘단견의 소치’.”라고 비판하였다.2)
 
정영훈은 이 논문에서 북애와 규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 규원사화는 선가 사상의 영향 아래 양난이후 성립된, ‘아족(我族)’3)으로써의 국사를 명백히 자각하면서 저술된 책이다. 
 
(2) 북애는 양난 이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유한 조선 역사와 문화정통을 회복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아래 실성(失性)의 현실과 정면 대결하였다. 
 
(3) 규원사화의 민족의식은 민족국가의 재거(再擧) 열망, 고유문화전통에 대한 집착·계승·보전을 추구한 것으로 요약된다. 
 
(4) 규원사화는 단군민족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대중화되었고, 근대 저항민족주의의 활력소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정영훈의 연구는 규원사화의 역사적 위치와 그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대표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괄목할만한 정영훈의 연구 성과가 발표된 2달 후 1990년 9월 박광용은 전반적으로 조인성의 위서설 위에서 위서 주장을 되풀이하는데 열을 올렸다.4)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사학에 대한 ‘거부감’을 바탕으로 〈대종교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 《역사비평》에 발표하였다. 
 
그 제목에서 학문의 객관성을 저해하는 ‘선동가’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민족종교임을 주장하는 이른바 유사종교단체들”이라고 하여 대종교를 ‘유사종교’라고 폄하하였다.5) 이는 대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매도하여 탄압하던 일제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또한 박광용은 1901년 5월 3일자 《황성신문》 〈논설〉의 필자 북애자(北涯子)6)를 거명하면서 규원사화의 저자를 1910년대 조선사편찬위원회나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 관련자로 추정하였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의 ‘연일청론(連日淸論)’을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 또는 자치론적 민족개량주의 논리와 결부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동양삼국동맹론이 친일 개화론자들의 논리라는 전제 하에 규원사화의 논리를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와 일방적으로 등치(等値)시켰다. 
 
이 가설 위에 규원사화의 논리는 바로 대동아공영권의 그것과 같은 것이므로 규원사화는 윤덕영 등의 개화친일세력의 위작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은 박광용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를 내놓지 못하였다는 데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친일세력만이 삼국동맹론 또는 일선동조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격한’ 그의 주장은 한국근대사의 연구 성과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반역사학’적 태도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삼국동맹론을 주장한7) 최익현·안중근 등도 친일파이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이 근대 대종교세력 등 민족주의자 또는 근대 평화세력은 모두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라 ‘정치선전구호’에 지나지 않다. 그러므로 이병도의 주장 위에 성립된 위서설은 “친일파가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원사화 원본 사진
 
 
임승국8)과 강수원(姜壽元)9)이 이러한 박광용의 주장을 적절하게 비판하였다. 임승국은 박광용이 “웅비(雄飛)라는 용어를 일제가 말들어냈다며 대한민국 군대를 비난한 것”에 대해 웅비(雄飛)의 출처가 《후한서》의 〈조온열전(趙溫列傳)〉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규원사화의 삼신(삼일)사상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모방했다는 주장에 대해 삼일(三一)이라는 용어가 《사기》 〈봉선서(封禪書)〉와 《한서(韓書)》 율력지(律歷志)에 나오고 있고, 신향(神鄕)이라는 말도 《한서漢書》에 나온 것임을 밝혀 박광용의 비학문적 태도를 질타하였다. 
 
박광용은 이러한 지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응답하고 있지 않다. 이는 자신의 논리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10) 
 
이후에도 규원사화에 대한 연구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진행되었다. 1992년 박성수11), 1993년 심백섭12)의 석사학위에 이어 특히 정영훈은 규원사화를 주요 소재로 한 박사학위 논문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13)을 발표하였다. 이는 그의 규원사화론이 학문적으로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4)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예술분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연구가는 1994년 〈우리나라 무용과 음악의 발달〉15)을 쓴 서정자이다. 
 
이러한 규원사화 연구 경향은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켜 김성구가 번역서를 간행한 배경이 되었다.16) 규원사화 등 선사에 대한 일반의 뜨거운 반응과 관심은 1997년 12월 단군학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17)
 
이처럼 199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는 초기부터 박광용의 주장으로 연구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박광용의 규원사화 위서설은 학계로부터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의 가설은 “학문을 빙자한 민족진영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비난만 초래하였다. 
 
임승국·정영훈 등은 박광용의 주장에 적절하게 응수하는 등 규원사화 연구 수준은 더욱 깊어졌다. 무엇보다 정영훈과 심백섭이 박사학위와 석사학위 논문을 생산하는 등 규원사화 연구는 더욱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무렵 정영훈의 연구 성과는 큰 주목을 끌었다. 연구 분야도 예술론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보였다.(계속)
 
■ 주석
 
1) 정영훈, 위의 논문. 같은 의미에서 박성수는 “삼국사기를 금과옥조로 믿어온 탓으로 어느 덧 그것이 正統이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규원사화류의 다른 민족 사서들은 이단으로 몰아 부치고 있다”라고 단군관련 사서의 위서설을 비판하였다(박성수, 〈단재의 고대사관〉,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집현전, 1985, 163쪽).
 
2) 정영훈, 〈규원사화에 나타난 민족의식〉, 《정신문화연구》 39, 1990. 143쪽.
 
3) 정영훈은 “아족의 의미를 조선을 지칭할 때 동국 동방 등 지리적 정치적 용어들만을 유가사서에 넘쳐나는 데 비해 규원사화의 아족이라는 개념은 종전보다 훨씬 선명한 민족의식을 정립한 것으로 민족의식 수준이 상당히 발전된 양태를 보이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정영훈, 위의 논문, 147쪽).
 
4) 박광용, 〈역사논단 대종교문헌 위작 많다-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성격에 대한 재검토〉, 《역사비평》 10, 역사비평사, 1990.
 
5) 박광용, 위의 논문, 206쪽. 
 
6) 박광용이 언급한 황성신문 〈논설〉 필자 북애자(北涯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북애자는 《황성신문皇城新聞》 1901년 5월 3일자, 〈논설 제국신문정간변論說 帝國新聞停刊辨〉에서 제국신문정간에 대한 일종의 반발과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만 가지고 황성신문의 북애자가 규원사화의 북애와 같은 인물로 단정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1901년 단계는 민족주의 문제가 표면화되지 못하였다. 민족주의는 러일전쟁 전후로 폭발적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황성신문 논설의 필자가 필명을 북애로 쓴 것이 규원사화 저자 북애와 관련이 있다면 이는 오히려 규원사화가 1901년 단계에 이미 세상에 알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7) 신운용,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평화론’〉, 《안중근과 한국근대사》, 2009,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안중근연구소, 2009, 참조.
 
8) 임승국, 〈《환단고기·규원사화에 위작많다》에 반박한다〉, 《자유自由》 207, 자유사, 1990.
 
9) 《종교신문》 1990년 9월 10일자, 〈박광용朴光用교수 논문의 허구성 통박痛駁〉.
 
10) 서영대도 규원사화 위서설을 주장하였지만(서영대, 〈단군관계문헌자료 연구〉, 《단군 그 이해와 자료》,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74-75쪽), 그다지 학계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특히 서영대는 《단군 그 이해와 자료》(서울대학교출판부, 1994년)에 일제가 생산한 단군관계 자료는 실으면서도 규원사화 등 선사류는 넣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1) 박성수, 〈단군에 대한 인식변천〉, 《청계사학》 1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92.
 
12)  심백섭, 〈揆園史話」의 本文構造와 世界觀 形態에 對한 硏究〉, 서울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석사논문, 1993.
 
13) 정영훈, 《檀君民族主義'와 그 政治思想的 性格에 관한 硏究 : 韓末-政府樹立期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 1993.
 
14) 정영훈은 논문(정영훈, 〈한국정신사 속에서의 국수주의〉, 《自由》 303, 자유사, 1998)에서도 자신의 규원사화론을 주장하였다.
 
15) 서정자, 〈우리나라 무용과 음악의 발달〉, 《창론》 13, 중앙대학교 예술연구소, 1994.
 
16)  김성구, 《역사로 기록된 고조선 이야기 : 규원사화 역주》, 백산자료원, 1999.
 
17)  《경향신문》 1997년 12월 20일자, 〈단군학회 창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