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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 “북애사관은 민족사관의 모델”
조인성, 규원사화 위서설 제기  

 
▲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1980년대에는 1982년 윤이흠(尹以欽)의 연구에서 보듯, 규원사화의 의미는 정치·역사학을 넘어 종교학에서 더욱 강조되는 경향성을 보였다. 아울러 국문학에서는 이상택(李相擇)의 연구가 주목된다.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송호수·박성수 등이 꾸준히 규원사화의 연구를 이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는 규원사화가 사회적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되고 상고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이는 한학자 김재환이 1981년 9월 간행한 《단국총사(檀國總史)》에서 규원사화 등 선사류 뿐만 아니라, 수백 권의 관련 사서를 조사하여 기자·위만조선의 허상을 드러내려는 시도하였다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1984년 박성수는 동아일보에 〈북애의 반 사대 민족사관〉이라는 제목으로 투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북애의 사관이야말로 민족사관의 모델이라고 주창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동영은 1986년 5월 새로이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한영우는 1986년 11월 《민족지성》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하였다. 특히 서희건은 규원사화의 사실성을 밝힌 《주간조선》 연재물 〈단군조선 이렇게 말살되었다〉를 1986년 9월 책으로 출간하여 규원사화의 존재성과 그 사실성은 일반에 더욱 깊이 확산시켰다.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이러한 움직임에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추종하는 일부 연구자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낀 것 같다. 그 결과, 1986년 12월 조인성은 이병도의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에 이병도의 뜻이 반영된(?)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를 실었다. 조인성은 이 논문에서 본격적인 규원사화 위서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대체로 규원사화가 진서라고 인정한 학계와 사회의 합의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위서설을 주장하였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원사화 원본 사진
 
(1) 규원사화의 백두산에 대한 어휘고증은 한진서(韓鎭書)가 1823년에 간행한 《해동역사(海東歷史)》 〈지리고(地理考)〉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규원사화는 1823년 이후에 나온 것이다. 특히 백두산을 설명하는 부분은 규원사화와 해동역사에 고려 성종 10년을 광종 10년이라고 하여 모두 잘못 인용되어 있다. 이는 고려사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서를 저본으로 한 것임을 의미한다. 규원사화는 근대에 알려졌으므로 북애가 해동역사를 참고한 것이다.
 
(2)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나온 문화지개발(文化之開發)의 ‘문화’는 20세기 초 정치·경제 ·예술 등의 일본 번역어로 Kultur 또는 Culture의 뜻이다. 이점에서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뜻이 아니다.  
 
(3) 규원사화에 인용된 각종 문헌자료의 대부분은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속사(海東續史)》(1800-1814)에 의거하였다.
 
(4) 〈단군기〉의 금약언서병용(今若諺書幷用) 이하의 구절은 1900년 전후 어느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5) ‘한 조각의 진역’, ‘한 줄기의 유민’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우리민족의 처지를 가르키는 말이다.
 
(6) 규원사화가 김광의 《동사사강》에 최초로 인용된 것을 보면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씌어진 위서이다.
 
이처럼 규원사화가 사학계 일각에서 부정되는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소설·자료집 등 단군관계 출판물이 쏟아져 베스트셀러 상위 10을 석권하였다고 언론에 보도되는 등 일반 대중들은 위서설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계속)
 
 
■ 주석
 
1) 윤이흠, 〈한국문화 연구를 위한 종교학의 역할과 기대〉, 《人文論叢》 9, 서울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82. 
 
2) 이상택, 〈〈명주보월빙〉연구〉, 《한국고전소설의 探究》, 중앙출판사, 1981. 138-140쪽.
 
3) 송호수, 〈民族起源錄의 올바른 解釋」, 《백사학보》 27, 백산학회, 1983; 〈국사정론(사상적 측면에서)〉, 《한국철학연구》 14, 해동철학회, 1984; 『한민족의 뿌리 사상』, 기린원, 1984; 박성수, 〈단재의 고대사관〉, 《민족사의 맥을 찾아서》, 집현전, 1985.
 
4) 김재환, 《檀國總史》, 삼일당, 1981.
 
5) 《동아일보》, 1984년 3월 31일자, 〈북애의 반사대 민족사관」. 규원사화와 관련한 박성수의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경향신문》, 1986년 10월 2일자, 〈단군은 신화가 아니다〉; 1987년 1월 15일자· 3월 19일자·6월 11일자, 〈박성수교수의 단군기행 3·11·22〉). 
 
6)  북애 저 / 고동영 역, 위의 책. 이후 고동영은 1992년과 2005년에도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7) 한영우, 〈재야사서 해제 규원사화〉, 《민족지성》 9, 민족지성사, 1986. 
 
8)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1, 고려원, 1986. 
 
9) 이병도 사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 된다. 한영우, 〈이병도〉,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하, 창작과 비평사, 1987; 김수일, 〈이병도와 김석형 : 실증사학과 주체사학의 분립〉, 《역사비평》 82, 역사비평사, 2008; 김용섭, 〈우리나라 근대역사학의 발달 2-1930,40년대의 실증주의사학학〉, 《문학과 지성》 가을호, 1972; 최재석,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과연 조작된 것인가-소위 <문헌고증학>에 의한 삼국사기비판판의 정체. 《한국학보》 38, 1985; 이종욱, 〈실증사학의 벽을 넘어 새로운 역사일기 한국고대사연구 100년: 현재-쟁점〉, 《역사학보》 170, 2001. 한영우·김용섭(제1세대 제자)와 이종욱(2세대 제자)은 이병도의 제자였지만 그들의 학문은 이병도와 달랐다. 이외에 이유림·문정창·김정희 등이 이병도의 친일사학을 비판하였다.
 
10) 이는 조인성이 이병도의 위서 주장을 자신의 위서설의 핵심근거로 들고 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11) 조인성,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이병도 박사의 구순기념 한국사논총》, 지식산업사, 1987. 이 논문은 1987년 1월에 기고하여 1988년 9월에 지식사업사에서 발간된 《이병도 박사의 구순기념 한국사논총》에 수록되었다. 이후 조인성은 위서설의 확장에 진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이 논문에서 한 발도 더 나가지 못하였다.
 
12)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한진서가 규원사화 등의 선거사서를 참고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3) 이 부분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상시와 최인철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14) 조인성의 이러한 위서설은 여운건이 〈〈한국에 있어서 고대사 논쟁과 〈揆園史話〉 〈檀奇古史〉 〈桓檀古記〉〉(呂運虔, 〈古代史書의 僞書 論爭〉, 《自由》 350, 성우회, 2002, 33쪽)에서 밝혔듯이 1974년부터 시작된 상고사 논쟁에서 상고사의 영역을 확대한 1986년 한국정부의 국정교과서 개편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였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조인성의 위서설은 일제의 한국 상고사 인식의 연장선에 있는 한국고대사학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규원사화 등 고기류를 위서로 몰아간 것으로 해석 된다. 이는 학문의 영역이라기보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한국사 멸살 행로밖에 볼 수 없다.     
15) 《경향신문》 1986년 12월 27일자, 〈연말 출판계 〈단군조선〉 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