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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위서론 논란, 종지부를 찍다!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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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 규원사화 철학연구로 확대…한국인의 자연관 ‘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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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2000년대에 들어와서도 조인성은 새로운 내용이 없는 위서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어느 일본 학술잡지에 위서설과 관련한 글을 투고하였다고 한다.1) 
 
이에 대해 여운건은 “한국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기본관점이라고 하여 고조선의 국가형성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경이며 읍제국가 형태였다.”라는 조인성 주장의 핵심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사실이라면 일제의 한민족 상고사인식을 상당수의 한국상고대사 연구자들이 답습하고 있음을 스스로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질타하였다. 
  
아울러 여운건은 조인성이 규원사화에 대해서도 위서라는 가설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가설을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조인성의 주장을 단군의 역사를 말살한 일제 식민사관의 연장선에 있다고 한 여운건의 평가는 대단히 타당한 지적이다.2) 이처럼 조인성의 가설은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3) 학계에서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하여 진서론 위에 이루어진 규원사화 연구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김명하(2002년) 4) · 박병섭(2003년) 5) · 김한식(2004년) 6)은 규원사화를 상고사 연구에 적극 활용하여 그 지평을 넓혔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 시민단체들이 규원사화 등 단군 관련 고기류의 보급과 그 인식의 확산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단체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이다. 이 단체의 주최로 2002년 열린 학술회의에서 박성수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발표하여 규원사화의 가치를 되짚어보았다.7)  
  
김한식은 2003년·2004년에 걸쳐 상고사 관련 문헌비판을 주도했다. 그는 2003년 논문8)에서 규원사화의 영향을 받은 사서로 김교헌의 《신단실기》(1914)를 들어 규원사화의 역사성을 한층 강조하였다. 2004년 논문9)에서 그는 조인성 등의 위서주장을 비판하면서 대체로 규원사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2002년 시민사회의 활동은 2004년에도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30일 ‘국사찾기협의회’ 주체로 ‘중국동북공정 대비 단군조선사광복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고 국사찾기협의회장 고준환이 〈환단고기 규원사화와 단군조선사〉를 발표하였다.10) 
 
물론 이는 기존의 규원사화론을 정리하는 데 그쳤으나, 규원사화 논리가 중국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의 방어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주목된다. 아울러 이는 규원사화가 중국과의 역사전쟁의 기본사서로 활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2000년대의 규원사화 연구의 특징으로 남북공동연구를 들 수 있다. 북한 원로학자 손영종의 글11)은 남북이 함께 한 연구라는 점에서 규원사화 연구사에서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물론 손영종이 새로운 사실과 해석을 내놓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2005년-2006년 상고사 남북공동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는 면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이는 남북의 공동역사연구 출발이 한민족 상고사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대목이다. 아울러 남북이 중국의 한민족 상고사 왜곡에 공동으로 대응했다는 점도 평가되어야 한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원사화 원본 사진
  
한편, 김한식12)·김성환13)은 규원사화 연구를 철학 분야로 확대시켰다. 이들은 주로 규원사화에서 엿볼 수 있는 한국인의 자연관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김성환은 위서설을 펼치고 있는 조인성 등에 대해 “학자들이 대체로 근대적 역사학의 선입관에 사로잡혀 전통적인 도교역사서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박광용의 경우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다소 편향된 분석을 하고 있다.”14)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규원사화의 〈조판기〉에 한국도교(선교·신교)의 한국적 창조신화의 전형이 담겨 있다고 평가하였다.  
  
신운용은 2004년 조선의 건국배경 중의 하나를 여말선초에 등장한 단군세력이라고 설명한 주장15)의 연장선에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단군론자 북애에 착목하면서 규원사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물론 그는 북애의 논리를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민족주의의 전사(前史)라고 평가하였다.16) 
  
이후 이재원도 2005년 규원사화 관련 글을 발표하였다.17) 
 
그는 북한학자 김봉환·손영종 등의 논문들이 단군설화를 규원사화와 적극적으로 관련 지었다고 평가하면서 《단군설화집》 43편 중 2편이 규원사화를 인용하였음을 밝혔다. 
 
이는 북한의 상고사연구에서 규원사화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과 북한의 규원사화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 주석
 
1) 조인성,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단기고사》· 《규원사화》〉, 《단군학연구》 2, 단군학회, 2000. 
2) 조인성, 〈〈한국에 있어서 고대사 논쟁과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여운건, 위의 논문, 33쪽).
3) 여운건, 위의 논문; 여운건, 〈사서(史書) 소개〉, 《자유》 360, 성우회, 2003. 
4) 조인성, 〈단군에 관한 여러 성격의 기록〉, 《한국사 시민강좌》 27, 일조각, 2000. 조인성은 여기에서 검증된 근거도 없이 규원사화를 완전히 ‘거짓 기록’이라고 단정하였다.
5) 김명하, 〈한국 상고대 정치사상에서의 천인관계〉, 《한국·동양정치사상사》,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2002. 
6) 박병섭, 〈단군과 기자 관련 사료를 통해 본 《한단고기》의 역사성 검토〉 , 《한국종교사연구》 11, 한국종교사학회, 2003. 
7) 김한식, 〈홍익인간과 정치사상 :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상고사 서술과 관련하여〉, 《단군학연구》 2, 단군학회, 2000.
8) 박성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제19회 대시민 강좌-치우천황 중심으로 본 한국사》,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2002.
9) 김한식, 〈우리 상고사와 관련된 중국문헌에 관한 소고〉, 《교수논총》 34, 국방대학교, 2003.
10) 김한식, 〈상고사 연구에 관련되는 문헌비판〉, 《교수논총》 36, 국방대학교, 2004. 
11) 고준환, 〈환단고기·규원사화와 단군조선사〉, 《중국 동북공정 대비 단군조선사광복 국민대토론회 자료집》, 국사찾기협의회, 단기 2337(2004).
12)  손영종, 〈단군 및 고조선관계 비사들에 대한 리해 :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단군학연구》 8, 단군학회, 2003. 손영종의 이 글은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단군조선 남북 공동학술 토론회>에서 발표된 논문이다(고준환, 위의 논문 5쪽).
13) 김한식,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나타난 자연관〉, 《교수논총》 37, 국방대학교, 2004. 
14) 김성환, 〈한국도교의 자연관: 선교적 자연관의 원형과 재현〉, 《한국사상사학》 23, 한국사상사학회, 2004. 
15) 김성환, 위의 논문, 77쪽.
16) 신운용, 〈조선건국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시론〉 참조.
17) 이재원, 〈북한의 단군신화 인식에 대한 연구: 문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단군학연구》 13, 단군학회, 200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