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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위서론 논란, 종지부를 찍다! 
▶ 2편 규원사화 진서론이 확산되다! (바로가기 클릭)
▶ 3편 식민사학 극복 움직임으로 확산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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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일 소장본, 조선 중기 제작된 것으로 판명
신학균 번역서로 대중화…그 배경엔 '식민사학 극복'

 
▲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규원사화》는 북애가 숙종 1년 1675년에 완성한 이후 비장되어 오다가 대일항쟁기인 1925년 김용기의 《단전요의(檀典要義)》·1928년 김광(金洸)의 《대동사강(大東史綱)》·1934년 이창환(李昌煥)의 《조선역사(朝鮮歷史)》·1937년 정진홍(鄭鎭洪)의 《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1) ·1939년 서계수(徐繼洙)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등에서 인용 활용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민족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2)
 
그런데 《단전요의》나 《단군교부흥경략》은 근대 단군계열의 집필이라는 점에서 규원사화의 맥을 잇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김광(金洸)의 《대동사강》·이창환의 《조선역사》·서계수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는 선가의 사관보다 유가의 춘추사관에 따라 강목체의 대의명분·정통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한치윤의 《해동역사》나 이종휘의 《동사(東史)》 등의 사서와 같은 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서는 규원사화와 달리 춘추사관을 완전히 극복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김광 등이 규원사화를 인용한 것은 이들이 규원사화를 대체로 진서(眞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규원사화가 근대 역사학에 끼친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제라는 시대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한민족 상고사와 사상사의 본격적인 연구는 불가능하였다. 다만 이 책의 중요성을 인식한 양주동의 소장본을 손진태가 필사하여 해방 후 고려대학교도서관·서울대학교도서관·국립중앙도서관에 1부씩 기증했다.3) 이외에 권상로 소장본이 동국대에, 방종현 소장본이 서울대에, 이선근 소장본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고, 특히 북한인민대학습당에도 소장되어 있다4). 
 
무엇보다 규원사화의 판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金壽一)에게서 1946년 5월 25일 이전 어느 시점에 현금 100원에 구입하여 5월 25일 등록(도서열람번호: 貴 629(古2105-1))한 ‘김수일 소장본(金壽一 所藏本)’5)이다. 이를 다시 1972년 당대 최고의 권위자 이가원·손보기·임창순 등으로 이루어진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결과 숙종 1년(乙卯, 1675년)에 만들어진 ‘진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김수일 소장본은 김성구의 지적6)대로 제질 등을 보면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다.7)
 
여기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고서의 진위여부는 무엇보다 지질(紙質) 등의 서지학적 측면에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김수일 소장본이 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8) 판명된 이상 위서론은 전혀 의미가 없다. 이 점에서 위서설 주장자들은 학문의 기본소양에서 벗어난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이것도 아니면 어떤 ‘불순한’ 목적에서 규원사화 등 단군 관련 사서를 폄하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9)
 
규원사화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이는 신학균(申學均)이다. 그는 1968년에 대동문화사(大東文化社)에서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이 번역서의 의미는 무엇보다 규원사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 신학균(申學均)는 1968년에 대동문화사(大東文化社)에서 《규원사화》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신학균은 규원사화의 가치에 대해 〈揆園史話」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김수일 소장본을 북애의 친필본으로 주장하면서, 북애의 위대성을 “이 일사를 위하여 한 평생을 바쳤으니 위대한 애국자라 아니 할 수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특히 그는 규원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규원사화에 인용된 사서로 《삼성밀어(三聖密語)》·《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조대기(朝代記)》·《사문록(四聞錄)》·《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5종을 비롯하여 총 39종을 들고 있다.10) 이처럼 그는 처음으로 규원사화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시도하였다.11)
 
그런데 여기에서 1960년대의 규원사화 인식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신학균이 규원사화의 번역을 결정한 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몇몇 선배들과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본서 번역에 대한 말이 나와 상고사 연구와 재정리라는 의의를 생각하여 이를 착수하기로 하였던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12)
 
여기에서 보듯이, 본격적인 ‘상고사 연구와 재정리’라는 당시 역사학의 당면과제인 식민사학 극복을 위한 기반 조성이라는 의미에서 번역에 착수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이병도 등을 중심으로 한 식민사학에 바탕을 준 민족상고사 인식의 체계에 대한 본질적인 해체를 고민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신학균의 규원사화 번역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단순히 개인적인 관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규원사화 번역에 정명악(鄭命岳)·최동(崔東)·윤치도(尹致道) 등 일련의 단군연구자들의 조언과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3) 아울러 윤치도도 “그동안 동학 신학균(申學均)씨에 의한 규원사화의 번역출판을 보았고, 정두옥(鄭斗玉)·문정창(文丁昌) 등 제씨의 상고사연구에 관한 출저(出著) 등 우리 상고사연구에 많은 노력의 경주가 있었을 뿐더러 우리나라 사학계의 괄목할만한 각성이 엿보임은 참으로 이 민족의 장래를 촉망할만한 일이며”라고 기술하였다.14)
 
여기에서 보듯이, 규원사화 번역은 이러한 1960년대 상고사 연구 경향 속에서 기왕의 상고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검토하겠다는 식민사학 극복방안을 모색하던 일련의 학자들의 결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1970년대로 이어졌다.15) 이처럼 신학균을 비롯한 민족사학자들이 활동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위에서 보았듯이, 규원사화는 1925년 《단전요의》 등에 인용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항일전쟁기에 양주동 등이 비장하던 규원사화는 국권회복 이후 본격적으로 세인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특히 김수일 소장본과 신학균의 번역본은 이후 규원사화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1968년 신학균의 번역본이 나온 배경에는 식민사학 극복이라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있었던 것이다. (계속)
 

■ 주석

1) 정진홍, 《檀君敎復興經略》, 계신당, 1937, 25쪽.
 
2) 임채우, 〈선도사서 《규원사화》 해제: 위작설에 대한 쟁점을 중심으로〉, 《선도문화》 6,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09, 126쪽; 조인성, 〈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한국사시민강좌》 2, 일조각, 1988; 조인성, 〈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3, 경남대학교사학회, 1987, 173-174. 
 
물론 조인성은 근대의 사서에서 규원사화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곡해하여 규원사화가 근대의 위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근대 이전에 규원사화가 필사되어 퍼졌을 개연성을 높여주는 대목으로 해석된다. 특히 1925년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이미 규원사화가 인용되었다면 1932년에 정훈모의 단군교 측에서 등사하여 판매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미 규원사화는 단군교와 상관없이 1925년 이전에 유포되어 있었다는 점이 사실에 가깝다.
 
3) 서희건,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고려원 1986, 75쪽.
 
4)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한민족연구》 2, 한국민족학회, 2006, 101쪽.
 
5) 글쓴이가 ‘김수일 소장본’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판본의 경우 대체로 원소장자의 이름을 따랐기 때문이다. 임채우는 ‘고필사본’이라고 명명하였다(임채우, 위의 논문, 124쪽).
 
6) 김성구, 〈《규원사화》 교감기〉(임채우, 위의 논문, 126쪽).
 
7) 반면, 임채우는 이것이 북애의 친필본이 아닌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임채우, 위의 논문, 124-125쪽).
 
8) 신학균은 “가필추가된 글자가 본문과 동일하다.”라는 이유로 김수일 소장본을 북애의 후손이 갖고 있던 진본으로 보고 있다(신학균, 〈《揆園史話》에 대하여〉, 《도서관》1 30, 1968, 26쪽). 또한 고서심의위원회도 진본으로 보았다(고평석, 《한배달》 6, 1989). 반면 임채우는 필사본으로 보고 있다(임채우, 위의 논문, 123쪽). 진본이든 필사본이든 중요한 점은 김수일 소장본이 조선 중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9) 이는 한국사의 서술에서 고려의 김부식 등의 유학자들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철저하게 단군의 역사를 배제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성리학적 질서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단군조선보다 기자조선이 강조되고 한사군의 위치도 한반도 내와 북부로 비정하는 경향성이 있었다. 위서설은 이러한 성리학자들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서설을 주장하는 일련의 세력이 그들의 종교성과 관련이 있다는 김성환의 주장(김성환, 〈한국도교의 자연관: 仙敎적 자연관의 원형과 재현〉, 《한국사상사학》 23, 한국사상사학회, 2004, 77쪽)은 대단히 타당하다.
 
10) 이상시, 〈《규원사화》에 대한 문헌고증〉, 《단군실사에 관한 문헌고증》, 가나출판사, 1987, 164쪽.
 
11) 신학균, 위의 논문, 26-27쪽.  
 
12) 북애 저/ 신학균 역, 〈역자서문〉, 《규원사화》, 대동문화사, 1968, 11쪽.
 
13) 이에 대해 신학균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근자에 와서 단군에 대한 연구를 하신 선생님들이 계시니 정명악 선생님(韓國全史) 최 동 선생님(朝鮮民族上古史(조선상고민족사의 잘못: 글쓴이)) 윤치도 선생님(民族正史) 등 諸位이시다. 이분들은 한결같이 장구한 세월을 두고 각고의 노력 끝에 상기한 巨著들을 세상에 내놓았다”(위와 같음).
 
14) 윤치도, 《중정판 민족정사》, 대성문화사, 1971, 1-2쪽.
 
15) 경향신문, 1975년 11월 3일자, 〈사대·식민주의사관 뿌리뽑자 원로들 국사찾기협의회 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