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ro (바로가기 클릭)
▶ 1편 위서론 논란, 종지부를 찍다! (바로가기 클릭)
▶ 2편 규원사화 진서론이 확산되다! (바로가기 클릭)
▶ 3편 식민사학 극복 움직임으로 확산 (바로가기 클릭)
▶ 4편 최광렬, 이상시 vs 송찬식, 조인성…위서논쟁 격화
▶ 5편 “규원사화 첫 박사학위…학문적으로 인정”(바로가기 클릭)
▶ 6편 규원사화 철학연구로 확대…한국인의 자연관 ‘규명’(바로가기 클릭)

 

이병도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 위서론 제기
민족주의 사학자의 반론이 계속되다!


▲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이상시(李相時)는 1987년 2월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대한 문헌고증文獻考證〉1) 을 발표하여 기존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면서 규원사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북애의 역사·문화의식을 조명하였다. 
 
그는 문헌고증에 집중하여 규원사화에 국내 사서 9종(선사 사서 6종, 유가·불가사서 3종)·중국 사서 34등 모두 43종이 인용되었음을 밝혔다. 이는 규원사화가 선사류만을 의지하여 기술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존재한 거의 모든 역사서를 망라하여 저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책에서 규원사화의 문헌고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였다.
    
이상시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조인성은 위와 같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1987년 3월 다시 한 편의 짧은 글을 발표하였다.2) 이 글에서 그는 1920년대 말 시흥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 등사하여 규원사화를 판매하였다고 이유립이 정영훈에게 들려주었다는 회고담3)과, 이선근의 소장본에 ‘A.D. 1932. May’라고 기록된 점을 주된 근거로 단군교에서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허황된 내용의 규원사화가 갑자기 윤덕영의 집에서 나왔으므로 윤덕영의 위작”이라는 이병도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가 단군교(윤덕영)의 위서라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인성이 이병도의 주장을 규원사화 위서설의 핵심 근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의 존재를 부정한 일제가 규원사화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제의 상고사 날조와 왜곡에 일조한4) 이병도의 사견을 규원사화 위서설의 근거로 삼는 것은 학자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그것도 실증으로 확인된 것이 아닌, 이병도의 근거 없는 ‘낭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기술한 점은 조인성이 이병도의 구순기념 책자에 실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5)
 
이어서 조인성은 이병도의 애제자 이기백이 주도한 1988년 2월 《한국사시민강좌》에 〈《규원사화揆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투고하여 기존의 규원사화 ‘위서설’을 재차 강조하였다.6) 1988년 1월 5일자 《한국경제신문》 〈논설〉에 조인성의 주장이 실리는 등 규원사화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식민지근대화론에 매몰된 일부 학자들의 본격적인 반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친일사학자라고 평가 받는 이병도의 영향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7) 모 대학 출신과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연구자들이 규원사화 위서설을 앞장서 퍼트렸던 것이다. 
 
현대 민족주의사학자들의 대응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최광렬의 비판에 이어서8), 이상시(李相時)는 1988년 3월 《민족지성》에 송찬식·조인성의 규원사화 위서설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였다.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원사화 원본 사진
 
(1) 숙종대(1677년)의 을지문덕 사우(祠宇) 건립기사가 숙종실록에 있고 이에 대해 북애가 언급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쓰인 것이다. 
 
(2) 친일파 윤덕영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규원사화 간행을 지원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더구나 이는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3) 이유립의 주장은 규원사화의 단군 존속연대와 자신이 신봉하는《환단고기》의 그것과 맞지 않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4) 민기(民氣)는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천주(天主)는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오는 말로 근대어가 아니다. 특히 문화라는 용어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약자이지, 컬쳐(Cultur)의 번역어가 아니다. 그리고 금약이언서병용(今若以諺書幷用)은 한글을 사용하면 어리석은 백성도 단군이 ‘박달임금’이라는 뜻을 알 수 있다는 점과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9)
 
(5) 만주가 우리의 역사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발해 멸망 해인 926년이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6) 국내사서 9종과 중국사서 33종 총 43종의 역사서를 활용하였다. 특히 세조실록에《진역유기》를 제외한 대부분 사서가 언급되어 있다. 
 
(7) 선가사서가 간행될 수 없는 조선의 구조적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진서의 《해동역사》에 규원사화가 인용되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규원사화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것은 선가를 이단시한 유가의 경향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리고 규원사화는 명대 이전의 문헌만을 인용하였고, 해동역사는 청대의 문헌까지 이용하고 있다.10) 이점에서 규원사화가 해동역사보다 간행시기가 앞선 것은 분명하다. 
  
(8) 김광의 《대동사강》·이창환의 《조선역사》·정진홍의 《단군교부흥경략》·서계수(徐繼洙)의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1938) 등은 오히려 규원사화가 근대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9)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진역유기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규원사화에 인용되지 않은 중국사서 《죽서기년(竹書紀年)》·《후한서(後漢書)》의 동이(東夷) 관계 기사는 규원사화의 그것과 중요골자·연대가 서로 부합하고 있다. 이점은 규원사화가 진역유기를 저본으로 하였다는 증거이다.11)
 
이후 1988년 이상시는 《대한변호사협회지》와 《정우》에 이와 같은 내용을 실어 조인성의 위서설에 대한 반박을 이어갔다.12)
 
이상에서 보았듯이, 1970년대는 주로 번역서를 중심으로 규원사화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1972년 국립중앙도서관이 김수일 소장본이 진본임을 판명한 것은 규원사화 연구의 한 핵을 긋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70년대 중반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영우는 본격적인 규원사화 연구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이에 힘입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 한 민족사학은 대중 속으로 확산되었다. 
 
1977년 송찬식이 규원사화 위서설을 제기하였으나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오히려 1981년 정영훈의 석사학위논문이 나오는 등 80년대 전반기의 규원사화 연구는 역사학을 넘어 종교학·국문학으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였다. 물론 이는 규원사화 위서설이 규원사화 연구와 인식의 공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 중반 이후 이에 위기를 느낀 조인성을 필두로 ‘식민사학자들’이 위서설을 제기하면서 이상시 등이 이에 반격을 가하는 연구양상을 보였다.(계속)  
 
■ 주석
 
1) 李相時, 위의 논문 참조.
 
2) 趙仁成,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3, 경남대학교사학회, 1987.
 
3) 이유립, 위의 논문. 그런데 이유립은 규원사화가 단군교 측에 의해 가필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지만 규원사화 그 자체를 위서로 보지는 않았다.  
 
4) 이에 대해서는 임찬경, <이병도 한사군 인식의 형성과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 《국학연구》 18, 2014 참조.
 
5) 이병도의 2세대 제자로 알려진(《경향신문》 1987년 10월 21일자,  <<두계학문 60년사」한눈에〉) 조인성은 이병도를 ‘민족주의자’로 둔갑시킨 예찬론을 다음의 논문에서 전개하였다. 조인성, <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와 식민주의사학의 문제 : <韓國古代史硏究>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44, 한국사연구회, 2009; <李丙燾의 韓國古代史硏究 : 漢四郡·三韓의 歷史地理 硏究를 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55, 한국고대사학회, 2009; 조인성, <이병도와 천관우의 고조선사 연구〉, 《韓國史市民講座》 49, 일조각, 2011.
 
이처럼 조인성은 이병도의 상고사연구에 많은 비판이 있음을 직시하고서도 이병도를 ‘민족주의사학자’로 호도하여 찬양하였다. 이는 역사사실 왜곡을 넘어 신채호 등 민족사학자들을 ‘모욕’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점에서도 조인성의 위서설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민현구·김두진 등도 공유하고 있다. 
 
6) 趙仁成,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 2, 일조각, 1988. 이 논문에서 그는 《진역유기》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북애의 조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일본에서도 번역되었다. 趙仁成(奥谷勝訳), <《揆園史話》と『桓檀古記』の史料価値について」, 『東アジアの古代文化』 62, 古代学研究所編, 1990. 그런데 조인성의 이 논문이 일본에서 번역된 이유를 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필시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한·일 식민사학자들의 부정적인 인식 공유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7) 이에 대해서는 이희진, 《식민사학이 지배하는 한국고대사》, 책미래 참고. 
 
8) 최광렬, 《한민족사와 사상의 원류》, 사사연, 1987, 256-259쪽.
 
9) 북애는 다음과 같이 한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지금 만약 한글을 함께 사용하였다면 이러한 폐단도 없고 시골에 묻혀 사는 어리석은 사람도 이것을 쉽게 깨달아서 문화의 개발속도가 더 빨랐을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장황하게 기술하지 않겠다”(북애 지음/고동영 옮김,《규원사화》, 한뿌리 1986, 33쪽)라고 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 하였다. 
 
10) 이러한 이상시의 지적은 북한 학자 최인철의 견해(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99-100쪽)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진서론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대목 중 하나이다. 규원사화가 조인성·박광용의 주장대로 1920년대 대종교계통에서 쓴 책이라면 한진서의 《해동역사》에서 보듯이 (17세기) 이후의 사서도 규원사화에 인용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용된 사서는 규원사화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
 
11) 李相時, <<揆園史話」의 僞書論에 대하여 ; 한국경제신문 1988.1.5.게재논설을 읽고〉, 《民族知性》25, 1988.
 
12) 李相時, <<揆園史話」의 僞書論에 대한 綜合的 評價〉, 《大韓辯護士協會誌》 141, 대한변호사협회, 1988; <<揆園史話」의 僞書論에 대하여〉, 《정우》 72, 국회의원 동우회,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