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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위서론 논란, 종지부를 찍다! (바로가기 클릭)
▶ 2편 규원사화 진서론이 확산되다! 
▶ 3편 식민사학 극복 움직임으로 확산 (바로가기 클릭)
▶ 4편 최광렬, 이상시 vs 송찬식, 조인성…위서논쟁 격화(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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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천관우…규원사화를 역사서로 인정 
규원사화 주제로 최초의 석사학위논문 나와

 
▲ 신운용 박사(사학,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1970년대에 들어와서도 규원사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번역단계에 머물고 있었다. 신학균은 1973년 명지대학교 문고본으로 규원사화를 간행하였다.1) 특히 명지대학교 설립자 유상근은 이 책의 간행이유를 “서구문화의 범람 속에서 한국문화의 독자성을 확인하는데 두었다.”2)고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은 규원사화가 한국의 지식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3)
  
특히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75년 10월 28일에 “한국사의 시폭(時幅)과 강역을 바로잡고 한국사의 사대사관과 식민사관을 뿌리 뽑겠다.”는 취지 아래 이루어진 ‘국사찾기협의회’의 결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 이는 식민사학에 대한 전면전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이 시기까지만 해도 단군을 부정하는 식민사학 이외에 대체적으로 규원사화를 진서로 받아들이고 있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1970년 중반 민족사학의 본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규원사화 연구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여 한영우는 1975년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에서 규원사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5) 규원사화가 진서라고 확신한 그는 여기에서 그 대체적인 내용을 소개하며 북애의 문화·역사의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특히 그는 북애가 광범위한 민속자료를 이용하였고, 언어적 해석과 문헌고증학적 방법을 채용하였다는 점에서 규원사화를 역사서로 인정하였다. 아울러 그는 강목체와 정통론에 치우친 유가사학이 조선을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도 시대가 내려갈수록 동이문화의 재인식과 자부로 전환되는 동기를 규원사화에서 찾으면서 규원사화의 출현과 근대 민족주의사관을 근본적으로 도가사학의 영향이라고 강조하였다. 
  
무엇보다도 한영우는 신채호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중간서(重刊序)》를 썼다는 점, 박은식·최남선의 동이(東夷) 중심 서술 등을 들어 도가사학이 근대민족주의사학에 미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이처럼 그는 규원사화를 도가사학의 대표적인 사서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학계의 연구성과는 아세아문화사가 규원사화를 비롯한 선가 사서류를 발행한 배경이 되었다.6)
  
그리고 이러한 규원사화 평가는 정진홍(鄭鎭弘)에게도 이어져 종교학으로 그 연구 범위가 확장되었다.7) 아울러 한영우의 연구성과는 1977년 7월 16일 한국고전연구회에서 안호상이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다’를, 윤치도가 ‘규원사화’를 강의하는8) 등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 서울대 사학과 한영우 교수는 규원사화를 역사서로 인정했다. 규원사화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나 조선 후기사를 연구한 송찬식은 1977년 규원사화를 진서로 인정하는 학계의 연구경향 속에서도 ‘위서설’을 제기하였다.9) 물론 이는 학계의 연구성과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점을 들었다. (1) 《문헌비고》 등의 고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과 《단기고사》10) 보다 후대에 나왔다는 점에서 1920년대의 위서에 불과하다. (2) 민기(民氣)·선민(先民) 천주(天主)는 효종 숙종대의 용어가 아니다. (3) 말갈·여진을 우리민족의 분파로 보고 만주의 고토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근대 대종교 내지 민족주의사학의 주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어떠한 학문적 연구성과를 기술한 논문이 아니라 단순히 대중지(大衆紙)에 의문을 제기한 수준이었다. 
  
그의 주장은 찻잔 속의 태풍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1987년까지 송찬식의 주장이 통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히려 1980년 11월 17일 천관우(千寬宇)는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에서11) 규원사화의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면서 한영우의 주장을 근거로 규원사화의 위서설을 부정하였다. 
  
더욱이 1980년 9월 29일 단군정신선양회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기독교 목사 김산(金山)도 규원사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2) 이는 기독교계에서도 일정부분 규원사화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영훈은 1981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규원사화를 주제로 한 최초의 정치학 석사학위논문을 받는 등13) 규원사화 진서론은 더욱 강화되고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정영훈은 규원사화가 선행 선가들의 사상적 축적을 바탕으로 성립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후대의 민족의식 내지 민족노선이 바로 이 선가계열에서 흘러나왔다는 점에서 규원사화를 근대민족주의의 원류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처럼 근대민족주의 출현배경을 규원사화에서 찾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선가-대종교-국학이라는 한민족 선가의 흐름을 국학-신도-국수주의라는 일본 사상의 궤적과 대비시키면서 민족의식의 성장이 일본에 비해 늦은 이유를 선가사상의 ‘매몰’에서 찾았다.(계속)
 
■ 주석
 
1) 北崖 著 ; 申學均 譯, 《揆園史話 : 檀君實史》, 明知大學出版部, 1973. 신학균은 1974년에 대동문화사에서, 1986년에 명지대학에서 규원사화를 각각 번역 출간하였다.
 
2) 유상근, 〈명지대학교 문고를 발행함에 있어서〉, 《揆園史話 : 檀君實史》(北崖 著 ; 申學均 譯) 참조.
 
3) 정진홍, 〈규원사화의 신화〉, 《문학과 지성》 23, 문학과지성사, 1976, 136쪽. 
 
4) 경향신문, 1975년 11월 3일자, 〈사대·식민주의사관 뿌리 뽑자 원로들 국사찾기협의회 결성」. 이 날짜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 국사찾기협의회에는 안호상(安浩相, 배달문화연구원)·유봉영(劉鳳榮, 백산학회)·문정창(文定昌, 한국고대사학회)·임승국(林承國, 한국고전문우회)·이유욱(李裕昱, 진단학회)·이대위(李大偉, 기독동우회)·박시인(朴時仁, 알타이 인문학회), 박창암(朴蒼岩, 월간 자유사)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임승국은 “국사는 무한의 가능성이다.”라는 주제로 한국사의 주체는 이미 증발했고, 중독(中毒) 왜독(倭毒)된 객체 위에 서양의 기성복 사관으로 목하 망명중이라고 하면서 아카데미사학을 공격했다.” 이어서 경향신문은 임승국이 대학가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 교수(이병도: 글쓴이)의 개론책(《한국고대사연구》: 글쓴이)은 일제 하 일본인들의 반도사관을 청산하지 못한 책이라고 꼬집고 “한국의 눈으로 한국을 보는 사안(史眼)을 갖춰야 한다.” 동시에 경향신문은 아카데미사학도 국사찾기협의회의 움직임에 대해 “상투적이며 전근대적인 고대사 논쟁은 한국사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역기능을 한다.”라고 전하였다. 여기에서 1950년대 수면으로 잠복해 있던 이병도를 중심으로 대학을 장악한 식민사학이 60년대를 거치면서 70년대에 공개적으로 민족사학을 부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를 중심으로 학술활동을 하면서 이병도의 식민사학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처럼 식민사학은 국권회복이 된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5) 한영우, 〈17세기 반존화적 도가사학의 성장-북애의 규원사화에 대하여-〉, 『한국학보』 1, 1975. 
 
6) 아세아문화사, 『규원사화 ; 청학집』, 1976.
 
7) 정진홍, 위의 논문. 
 
8)《경향신문》 1977년 7월 14일자, 〈고전연 강좌열어〉.
 
9)〈위서변〉, 《월간중앙》 1977년 9월호. 송찬식은 규원사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나는 일전에 누워서 규원사화를 들고 午睡를 청하다가 불각(不覺) 중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위서가 아닌가 의심이 들기 때문이었다. 대저 그 내용이 고금의 유사지설(類似之說)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한말 일제시대 대종교계의 주장과 너무도 흡사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쇄본이 없는데다가 북애 노인이라는 不知所從來의 사람이 지었다 하며 효종 숙종대의 저작임을 표방하였다.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인용서목이 모두 지금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문헌비고》 등 한말 이전의 고문헌에 전혀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소위 기서(奇書)와 비기(秘記)들이다. 그 근거가 황당하여 의심을 품지 않으(을)래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해제에 의하면 대야발의 《단기고사》도 규원사화를 윤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다. 그러나 대야발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동생임을 표방하고 이어 표면상 규원사화가 단기고사보다 훨씬 후대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단기고사가 위서임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고 보면 설사 그 근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규원사화가 별 수 없이 위서로 귀착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10) 송찬식은 《단기고사》를 위서로 보고 있다.
 
11)《경향신문》 1980년 11월 17일자, 〈인물한국사- 고대편 단군 ⑤ 규원사화〉.
 
12)《경향신문》 1980년 9월 29일자, 〈천부경으로 본 단군사상 모든 종교철학원리 담겨-단군사상 학술발표회〉.
 
13) 정영훈,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