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을 연구한 책이 나왔다. 박철상 씨가 펴낸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너머북스 간)은 조선시대 출판과 장서 문화, 간찰, 금석문, 연행 등의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세한도』(2010) 『서재에 살다』(2014)를 출간하며 고수의 내공을 선보인 저자 박철상이 그의 20년 추사 김정희 공부의 독보적인 성과를 담은 책이다. 김정희가 쓴 대련 중에 “호고유시수단갈好古有時搜斷碣, 연경누일파음시硏經婁日罷吟詩”가 있다. “옛것을 좋아하여 때로는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고, 경전을 연구하느라 여러 날 시 읊기도 그만뒀다”는 뜻이다.  책 제목은 여기서 따왔다.

▲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 책 표지. <사진=너머북스>

 김정희를 빼놓고 19세기 학문과 예술 세계를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박철상은 "김정희 학문의 본령이 고증학이고, 금석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금석학이야말로 추사체가 탄생한 까닭이자, 추사가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라 하며 금석학을 통해 김정희를 보아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박철상의 김정희 연구에서 2002년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 기폭제는 유홍준의 『완당평전』 출간과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 『해동비고』의 발굴이었다. 200군데가 넘은 오류를 지적한 박철상의 「완당평전,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문은 당시에 큰 화제였다. “후지쓰카 지카시라는 일본 학자의 연구 성과는 유홍준의 연구 성과로 바뀌어 있었고, 고증 없는 서술로 일관되어 있었다.”라 평한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김정희란 인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촉구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앞의 논문을 발표한 다음날, 절묘한 인연으로 인사동 고서점가에서 김정희의『해동비고』를 찾은 것이다. 『해동비고』는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고 이 글에서도 후술하겠지만 김정희 사후 150년 동안 이제까지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새로운 내용이었다. 저자는 『완당평전』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동비고』의 발굴에 이르기까지 누군가 김정희의 학문과 연구 세계로 잡아끄는 듯 했다고 소회한다.

 저자는 조선시대 금석학 자료들을 정리하며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 금석문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시기에 따른 흐름을 살펴본다조선시대에 처음부터 금석학이 학문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서법 수련의 전범으로서, 그리고 감상의 대상으로 점차 발전하였다.  금석학이 학문으로  맹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북학파 지식인들이 금석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김정희 금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친 금석학자로 영재 유득공에 주목한다. 유득공이 조선 금석학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한객건연집' '이십일도회고시' '발해고'등 유득공의 저작에는 언제나 고대사에 관한 깊은 이해가 깔려 있는데 그가 사료로 연구한 것은 금석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석문(釋文)을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내용을 분석한 첫 번째 학자가 된 것이다.

 저자는 19세기를 '연행을 통한 북학의 시대’라는 배경을 펼쳐놓고 추사 김정희가 금석학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김정희가 젊은 시절 연행을 갔다가 옹방강(翁方綱) 옹수곤(翁樹崐) 부자와 완원(阮元) 등 대가와 교유하는 장면은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백미이다. 옹방강은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완원은 추사체 탄생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의 교유는 김정희 금석학 탄생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옹수곤은 조선 학자들을 통해 조선 금석문을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 중심에 김정희가 있었다. 김정희는 자신과 친분 있는 인물들이 연행 갈 때면 옹방강 부자에게 편지를 써서 소개해주었고, 옹방강 부자는 김정희를 통해 신분을 확인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문사들과 교유하게 된다. 김정희가 금석학을 학문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옹수곤과 편지로 교유하면서부터였다. 옹수곤은 금석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의문점을 김정희에게 물었고, 김정희는 그 과정에서 금석문의 연구 방법론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1815년 옹수곤이 요절하자, 옹방강은 옹수곤의 금석학 연구 자료를 김정희에게 전달한다. 이것이 김정희의 금석학 성립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 아이가 대아(大雅, 김정희)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가르침과 사랑을 자주 받았으니 더욱 고마울 뿐입니다. 이 아이는 일찍부터 친구가 적었고, 오직 존형과의 우정을 일찍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이니, 존형이 이 소식을 들으면 너무도 슬퍼할 것입니다.[...] 몇 년 동안 오형이 멀리서 보낸 고비(古碑)의 탁본들을 받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변석하면서 얻은 것이 꽤 있습니다. 그 아이는 또 모방(摹仿), 향탑(響搨), 구록, 전랍 등의 방법을 세밀한 데까지 파고들어 이 아이가 지은 금석문을 연구한 여러 건은 대아에게 한두 가지 자료가 될 만한 게 있을 것입니다."-(123~124쪽, 옹방강이 추사에게 옹수곤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 중에서)

이후 김정희는 본격적으로 조선 금석문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1816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다.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일은 탁본과 함께 중국에도 알려졌다. 김정희는 일약 조선 금석문 연구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이후 김정희는 금석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817년 고적 답사를 위해 경주로 떠난다. 주요 목적은 금석문을 찾는 것이었다.

 김정희는 답사를 통해 우리 금석문 연구사에 획을 그을 만한 성과를 거둔다. 대표적으로 진흥왕릉과 다른 세 왕릉의 위치를 고증한 '진흥왕릉고' 와 '화정국사비' '문무왕비' '무장사비'등의 비석을 발굴하고 고증한 일이었다. 답사의 요체는 탁본과 책을 통해서만 보고 연구했던 내용을 실사로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15일 여행은 그의 연구 업적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이후 한양에 돌아온 김정희는 금석학 연구에 더욱 매진하게 된다. 김경연의 기록은 당시 김정희가 금석학 연구에 얼마나 몰두했었는지 알려준다. 이렇게 김정희는 명실상부한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진흥왕릉' '화정국사비''문무왕비''무장사비'등 조선 역사상 최고의 비문들을 김정희가 발견하고 그 탁본들이 청나라로 전해지자, 청나라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인연을 맺기 위해 모든 인맥을 동원했다. 하지만 김정희는 그들 중 누구와도 쉽게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연경의 친구들이 철저히 검증한 문사들과 선별적으로 교유할 뿐이었다. 조선 금석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나라 문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조선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저자 박철상은, 추사 김정희를 최근의 ‘연예 한류’에 비견할 만한 ‘학예의 조류(朝流)’를 만들어낸 한류 스타에 비견한다. 김정희의 한마디 한마디에 청조 문사들은 귀 기울였고, 김정희와 인연을 맺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예당금석과안록』의 서명에 문제를 제기한다. 『예당금석과안록』은 김정희의 대표 저서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왔다. 북한산과 황초령에 있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2종을 연구한 추사의 논문으로 일찍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고, 조선 금석학의 개창자로서 추사 김정희의 위치를 확인시켜준 명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철상은 『예당금석과안록』에  문제를 제기한다. 김정희 문집 『완당선생전집』에는 『예당금석과안록』이 실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진흥이비고'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확인해 보니 동일한 내용이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예당금석과안록'은 "김정희가 본 금석문을 기록한 책"는 뜻인데, 저자는 자신의 연구를 통해 『예당금석과안록』이라는 서명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낸다. 그 이유는 첫째, 진흥왕순수비 2기의 비석에 관한 논문을 싣고 과연 추사가 거창한 제목을 달았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 석문만 있고 금문(金文)이 없으며, 셋째, 김정희는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기록을 남기면서 ‘금석과안록’이란 명칭 대신 ‘비고(碑攷)’(비석과 비문에 대한 고찰)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치밀한 고증을 거친 저자의 주장은 『예당금석과안록』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일본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예당금석과안록』에 수록된 글은 분명 추사의 저작이지만, 서명은 추사가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  박철상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예당금석과안록』에는 과연 어떤 이름이 붙어야 했을까? 김정희의 금석학 저작이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것뿐이었을까? 그렇다면 조선 금석학의 비조라는 명성과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추사는 과연 진흥왕순수비 이외에는 연구한 금석문이 없었을까? 이런 의문에 해답을 준 김정희 금석학 연구 저작이 앞서 언급한『해동비고』의 출현이었다.

『해동비고』에는 「평백제비」「당유인원비」「경주문무왕비」「진주진감선사비」「문경지증대사비」「진경대사비」「경주무장사비」등 모두 7종의 비문에 관한 김정희의 연구 논문이 실려 있다.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최고의 금석학 연구서다. 이는 『예당금석과안록』(『진흥이비고』)에 수록된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논문 역시 『해동비고』에 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진흥이비고』가 『해동비고』에 실리지 못한 것은 1816년부터 시작된 「진흥왕순수비」에 관한 연구 초고가 1834년에 이르러서야 완결되기 때문이다. 반면 『해동비고』에 실린 7편의 논문은 그 이전에 완성되었다. 

저자는 박철상은 『나는 옛것이 좋아 때론 깨진 빗돌을 찾아다녔다-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의 8장에서 ‘해동비고’의 주요 내용을 톺아보며 추사 금석학의 핵심을 간결히 드러낸다. 특히 '평백제비' '당유인원비'의 경우처럼 중국과 조선의 선행 연구 성과를 기초로 한 것도 있지만 '문무왕비' '무장사비'처럼 김정희가 직접 발굴하여 고증한 내용도 실려 있다. 여기에는 현재까지의 연구 내용을 재검토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항들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김정희는 '문무왕비'의 건립 연대를 687년으로 고증했다. 이는 유희해의 681년, 이마니시 류의 682년 등 기존 학설과 다른 결과이다. 또한 현재 학계의 통설인 682년 건립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 책의 저자 박철상은 김정희의 고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해동비고』는 한국 금석문 연구사의 이정표이자, 추사 금석학의 정수를 밝혀주는 저작이다.

한편 이 책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추사체의 정체란 그가 젊은 시절 그토록 몰두했던 금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금석학이 역사와 경전의 고증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서법(書法)의 고증에서도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김정희가 비록 서법 고증에 관한 별도의 글을 남기지 않았지만 ‘추사체’ 자체가 살아 있는 논문이자 그의 서법 고증 금석학 연구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김정희 말년 제자인 조면호(趙冕鎬)의 글을 통해 윤곽을 잡아 추사체가 김정희 서법 고증의 정수임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에 부처 “내년이면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지 200년이 된다. 조선에 금석학이 태동한지 2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 책이 김정희의 학예를 기리는 데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