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재해 안동대 교수
고조선 역사는 세 가지 잘못된 선입견에 따라 민족사에서 배제되고 있다. 선입견 하나는 고조선 기록이 역사가 아니라 ‘단군신화’라는 것이고, 둘은 민족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라는 것이며, 셋은 근거가 되는 사료가 없다는 것이다. 모두 고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전제에서 비롯된 편견인데, 제각기 다른 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고조선 사료가 곧 신화일 뿐이라는 하나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 사료를 단군신화로 간주하여 고조선 역사를 부정하는 데에는 다섯 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단군신화’라는 명명의 오류이다. 어떤 문헌에서도 <삼국유사> ‘고조선’ 기록의 내용을 ‘단군신화’라 일컫지 않았다.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 또는 ‘왕검조선’이라 했고 <제왕운기>에서는 ‘전조선기’라 명명했다. 단군신화라는 말은 일제강점기 이후에 비로소 등장한 말로서 식민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고조선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 ‘단군신화’이다. 단군을 내세우면 고조선이 잠적되고, 신화라고 하면 역사를 부정하게 되는 까닭에 나는 단군신화를 ‘고조선본풀이’라 일컫는다.

둘은 단군신화를 앞세워 <위서(魏書)>의 기록까지 부정하는 오류이다. ‘고조선’조에는 <위서>를 인용한 내용이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다. <위서>의 내용은 조작했다고 할 수도 없고 조작한 증거도 없다. 왜냐하면 <위서> 집필시기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이라 하니 중국의 요(高)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역사적 사실을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서술해 놓았기에 이 기록만으로도 고조선 역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화적 기록을 근거로 고조선을 부정하는 것은, 버젓하게 기록되어 있는 <위서>의 사료마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셈이다. 이런 행위는 귀중한 사료를 묵살하고 민족사를 임의로 삭제하는 횡포일 따름이다.

셋은 객관적 인용과 사실의 윤색을 분별하지 못하는 오류이다. <위서>의 인용은 물론 고조선본풀이도 <고기>의 인용이라는 점이다. 객관적 인용에는 자의적 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 일연은 자기 생각과 다른 점을 인용문 사이에 협주로 밝혀 두었다. 만일 일연이 승려이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윤색했다면, 자기 생각을 용의주도하게 이야기로 구성하고 불교의 세계관을 일관되게 서술하지 굳이 서로 다른 양식의 <위서>와 <고기>의 기록을 나란히 인용할 까닭이 없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기록이 사료가 아니라 만들어진 신화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은 인용문헌의 부재를 마치 역사 부재로 착각하는 오류이다. 고조선 역사를 서술한 <위서>와 <고기>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문헌이므로 그 내용도 사료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가 사료로서 중요한 것은 인용한 기록이나 전적들이 오히려 지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 문헌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인용된 사서가 지금 없다고 해서 사료가 아니라면, 어떤 사서의 기록도 사료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용된 사서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지금은 없는 사서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사료는 아예 전거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섯은 고조선 관련 여러 유형의 사료들을 묵살한 오류이다. <제왕운기>에도 <단군본기>를 인용해서 ‘전조선기’를 서술했는데, <고기>를 인용한 ‘고조선’조와 내용이 일치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역사는 <삼국유사> 이전에 <위서>와 <고기>, <단군본기> 등 여러 사료들에 두루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문헌사료는 물론 홍산문화와 같은 문화유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물질사료도 풍부하다. 고조선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을 비롯하여 비파형동검도 고조선동검으로서 고조선의 역사를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조선 역사는 여러 사료가 다양하게 입증하는 가장 오래된 민족사의 실체일 뿐 아니라, ‘고조선’조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고 탁월한 사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사료 해석의 능력이다. 역사적 해석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어떤 사료도 무의미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