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
배달국말이 되면 염제 신농국과 백제 소호국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유망楡罔(신농국의 8세)이 백성들을 단속하고 다그쳐 민심이 돌아서고 제후들이 배반하여 중원지역이 극히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신농국이 패권주의적 지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인데, 이러한 혼란을 틈타 신농국의 유력가였던 공손公孫 헌원軒轅(후의 황제黃帝, 기원전 2550년~기원전 2140년 또는 기원전 2698년~기원전 2208년)이 화하지역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헌원은 소전의 아들이자 신농의 형제인 공손의 후예로서 가문으로 보면 역시 배달국 거발한 환웅의 우가였던 고시씨의 후예이자 신농씨의 족친이었다.

신농의 형제인 공손이 자신에게 주어진 가축 사육의 임무를 게을리 하여 헌구軒丘 땅에 유배되었는데, 여기에서 태어난 헌원은 이 일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나가 유망대에 이르면 신농국의 또 다른 실세이자 토착민들의 영수로 성장해 있었다. 헌원은 화하지역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였지만 용병用兵으로 일어선 패자였을 뿐 ‘선조인 신농씨의 지덕至德을 승계하지는 못하여 덕이 없었다’고 평가된다.

신농국의 패권정치로 인한 혼란은 주변으로 파급되었는데, 인접한 소호국의 경우 배달국과 밀착되어 천손문화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태에 대한 위기의식이 한층 강하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위기의식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어 결국 신농국의 공격을 당하게 되었던 듯하다.

‘신농씨가 강수姜水에서 열산列山으로 옮겼다가 다시 복희의 진을 접수하였고 동쪽으로 산동성 곡부 일대까지 경계를 넓혔다’는 기록은 신농씨 이후 8대 유망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영토 확장의 과정일 것인데, 마지막왕인 8대 유망의 수도가 ‘공상(진류, 현 하남성 회양)’이었는데도 소호국의 영토였던 산동성 곡부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고 하였다.

▲ 배달국 홍산문화의 천부인 : ‘기․ 화 ․수․ 토 ․천부’ 표상 : ‘와형渦形 옥패玉佩’ 3종 중앙의 소용돌이는 우주의 중심이자 근원적 생명에너지가 펼쳐 나오는 ‘천부’ 자리를 상징하며, 외곽의 4갈래는 이러한 생명에너지가 펼쳐져 기․화․수․토 4대 원소가 되면서 만들어내는 물질세계를 상징한다.

유망은 소호국을 범하여 산동성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치우천왕이 거병하는 직접적인 동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농국의 패권주의는 천손문화의 정서 하에서는 심각한 변고였고, 이에 배달국 환웅이 직접 개입하여 사태를 해결하는 미증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염제국 신농국의 패권주의로 중원 일대가 혼란에 빠져들 즈음 배달국 환웅은 제14대 치우천왕(기원전 2706년~기원전 2598년)이었다. 초대 거발한 환웅대에 국방 분야를 맡았던 치우씨의 후예로 짐작되나 자세한 가문 내력은 알 수 없다. 

배달국 천손문화의 핵이 ‘천·지·인 삼원(천부)’의 전승자인 ‘역대 환웅’의 존재였던 만큼 그가 환웅의 위位에 올랐던 점을 통하여 당대 최고의 수행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치우천왕의 수행력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은 적지 않다. 먼저 ‘만물의 원리를 스스로 점검·고찰하여 덕德·혜慧·력力을 갖추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덕·혜·력’은『삼일신고』중 천·지·인 삼원의 다른 이름인 ‘대덕(인)·대혜(천)·대력(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치우천왕이 수행을 통해 내면의 본질인 천·지·인 삼원을 회복하였음을 말한다.(깨달음, ‘성통性通’) 

더하여 ‘개천開天·개지開地·개인開人함으로써 사람들의 삶生을 살렸다’는 기록은 수행을 통한 ‘천·지·인 본질’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본질을 현실화하였음을 말한다.(깨달음의 실천, ‘공완功完’) 

치우천왕은 한국선도 ‘성통·공완론’의 전형으로서 당대의 ‘천부 전승자’이자 일세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 이후 중국인들은 치우천왕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경우가 많았지만 ‘천부天符의 신’, ‘고천자古天子’, 또는 ‘황제에게 천도天道를 알려줌’, ‘봉선封禪(제천祭天)을 행하였음’을 정확하게 기록하기도 하였다.

배달국말 시세의 변화를 감지한 치우천왕은 경장을 통한 천손문화 전수 방식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당시 화하일대 신농국의 난정과 산동성 일대 소호국(구려국)의 쇠퇴로 중원지역이 일대 혼란에 빠져있었는데, 이는 치우천왕이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로 부상하였고 결국 치우천왕은 중원 경략을 결행하게 된다. 신농국을 징벌하고 소호국(구려국)을 지원함으로써 천손문화권의 안정을 꾀한 것이다. 

한국 선도사서『환단고기』에서는 ‘치우천왕의 중원 경략’이라는 관점이 일관되고 있으나, 『사기』를 위시한 중국 측 자료들에서는 황제가 역신 치우를 징벌하여 죽였다는 입장이 우세한 가운데 치우천왕과 황제를 위시한 당대 인물들에 대한 앞뒤가 맞지 않는 평가나 치우천왕군의 패배와 황제군의 승리에 대한 이중적이고 부정합적인 서술이 혼재되어 있다. 

중국 측 자료의 이러한 문제는 주대 이후 배달국-단군조선으로 이어진 천자·제후국의 질서, 곧 천손문화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천자·제후국의 질서를 만들어갔던 중원인들의 착종된 의식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이에 필자는『환단고기』를 근간으로 중국 측 자료를 종합하는 기술 방식을 취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