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고려대학교 운초우선교육관 대강당

한국고대사학회가 '신발견 지안 고구려비 종합 검토' 라는 주제로 개최한 제131회 정기발표회는 대성황이었다.

200여 석 규모의 좌석은 학회 회원뿐만이 아니라 교수, 대학원생, 시민 등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주요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도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학회 한 회원은 "평소 발표회는 20~30명이 참석한다. 오늘은 언론보도가 많아서 그런지 10배 이상 참석한 것 같다"라고 전했다.

청중의 관심은 지난해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발견한 지안 고구려비 연구에 참여한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와 쑨런제(孫仁杰) 지안 박물관 연구원이었다.

왜냐하면 국내 학자 그 누구도 지안 고구려비를 직접 보고 연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 측이 제공한 탁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고 표현했고,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비석도, 탁본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 학자들이 연구 성과를 낸 것 자체가 놀랍다"며 “공정한 게임이 되겠느냐”라고 토로했다.

지안 고구려비는 지난 12일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됐다. 현재 지안시 신개발지구에 있는 신축 지안박물관 1층 로비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 지난 13일 고려대학교에서 '신발견 지안 고구려비 종합 검토' 라는 주제로 열린 제131회 정기발표회에서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왼쪽)가 발표하고 있다.

중국학자들이 방한한 이유는?

4월초 한국고대사학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기발표회는 중국 발표자가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 11일 중국 학자 2명이 참가하면서 합동 발표회가 된 것. 흥미로운 것은 국내 학계의 요청에 응하지 않던 중국 학자들이 전격 방한한 이유다.

이에 대해 겅테화 교수의 발표논문 "중국 집안 출토 고구려비의 진위眞僞문제"라는 제목을 보면 그 의도를 알 수가 있다. 겅 교수는 발표문을 통해 "새로 발견한 고구려비는 가짜일 가능성이 크다"고 게재한 중앙일보 기사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고구려비가 위작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는 "지안 고구려비 실물을 확인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 비석 출토 현장을 방문하지도 않았으며, 비문과 탁본에 대한 깊은 연구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추측에만 의존해, 근거 없는 의심만 제기하는 것은 학술적이지 못 할뿐더러 중국학자들의 연구를 무시하는 태도이다. 지안 고구려비의 진실성과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에 논평자로 나온 김영하 성균관대 교수는 "위작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본인이 본 발표자에 대한 토론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실제 중앙일보를 통해 위작 가능성을 제기한 문성재 박사는 청중석에 있었다.(문 박사와의 인터뷰는 아래에 나온다)

김 교수는 "위작 가능성의 현실적 배경으로 '제2의 동북공정'이 거론된다"라며 "중국 학계가 고구려를 고대 중국의 지방 민족 정권으로 규정하고 진행한 일련의 학술 활동 때문에 빚어진 한국 학계와의 갈등이 역사의 진실 탐구에 미친 부정적 영향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제2의 동북공정은 무엇일까?

동북아역사재단은 12일 중국의 공식 보고서 '지안고구려비'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고구려인의 기원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고구려가 중국 고대 종족의 하나인 고이족이라는 단편적 기록을 그대로 제시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고구려의 건국에 대해 현토군의 관할 아래 정권을 세웠다고 설명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설명은 고구려를 중국 고대의 지방정권으로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현토군은 중국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원전 107년에 세운 한사군(漢四郡) 중 하나다.

보고서를 작성한 중국 연구팀에는 겅톄화(耿鐵華) 퉁화(通化)사범학원 교수, 쑨런제(孫仁杰) 지안박물관 연구원, 장푸유(張福有) 지린성 사회과학원 부원장 등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역사 왜곡 논란을 불러온 고구려사 전문가가 대거 참여했다.

지안 고구려비의 위작 가능성을 반론한 겅테화 교수에게 학술대회 관계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종합토론에서 겅 교수는 “한국학자들이 고구려비를 위작으로 보지 않아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표정을 지었다.

▲ 지난 13일 고려대학교에서 '신발견 지안 고구려비 종합 검토' 라는 주제로 열린 제131회 정기발표회. 사진은 종합토론하는 모습.

고구려비 건립시기, 중국학자들도 엇갈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지안 고구려비 건립 시기를 장수왕(394~491)대로 볼 것인지 아니면 광개토대왕(374~413)대로 볼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여호규 한국외대 교수, 윤용구 박사 등 한국 측 발표자 6명은 모두 광개토대왕(374∼413) 조성설을 제기한다. 중국 연구팀 공식보고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연구팀의 쑨 연구원은 장수왕 조성설을 제기해 눈길을 끌었다.

그 근거는 ‘정묘(丁卯)’라는 글자가 보이는 탁본의 존재다. 장푸유(張福有) 지린성 사회과학원 부원장은 비석에서 새롭게 판독한 '정묘세간석(丁卯歲刊石)'이라는 다섯 글자를 근거로 제시하며 이 비가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427년(정묘년·丁卯年)에 건립됐다고 주장했다

겅톄화(耿鐵華) 교수는 "여러 탁본을 보았지만 정묘라는 글자가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쑨런제 연구원은 자신의 장수왕 조성설 근거로 ‘정묘’라는 연도를 제시하지 않은 채 “(장푸유 부원장) 그 분은 탁본 판독의 권위자”라고 모호하게 답했다.

왜 이렇게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겅 교수는 학자들마다 다를 수 있다고 밝혔다. 동북아역사재단도 "보고서는 중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고 이를 뒷받침했다.

앞으로 ‘정묘’의 판독 여부는 지안 고구려비가 최고(最古)로 등극하느냐를 판가름하게 될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연구해야

국내 학자들은 탁본이 아닌 실물로 연구할 수 있기를 고대했다.

주보돈 교수는 중국 학자들이 한국에 왔으니 우리도 중국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될지 물었다. 돌아온 중국 측의 답변은 국가문물국(문화재청에 해당)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위작설을 제기한 문성재 박사 또한 “한중 공동연구만이 고구려비 위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문 박사는 "어제 비석을 공개했는데, 비석이 가운데 있으면 1미터 멀리서 보게 했다. 이것은 공개가 아니다. 진품인지 아닌지 직접 볼 수 있어야 하는데 1미터 뒤에서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학계가 직접 확인도 하지 않고 기정 사실화해서 고구려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반대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놨다.

문 박사는 “중국학자들이 아무리 같이 연구하자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서 공동으로 유물을 연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학문이 어떤 (정치적) 도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고대사를 전공한 이희진 박사는 위작의 논란에 대해 “팩트(fact, 사실)는 누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다.”라며 “팩트를 검증하고 공인을 받아야 그 다음에 비로소 안심하고 연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도 "우리 학자가 비석 실물을 확인해야만 최종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