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전문가 박선미 박사 인터뷰

“우리 내부적으로 100% 기반을 다져놓아야 한다.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고 우리 내부에서 ‘맞아’ ‘맞아’ 라고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최종적인 목표는 도태되지 않고 공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문명이 사라졌다. 소통할 수 있는 학문, 소통하는 고조선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12일 서울시립대학교 인문학관에서 만난 박선미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 역사가 ‘세계사 속의 고조선사’가 되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박 박사는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기원전 3~2세기 고조선 문화와 명도전 유적’으로 석사학위를(2000년), ‘화폐유적을 통해 본 고조선의 교역’(2008년)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 명도전 연구로는 유일한 전문가다.

그가 2009년에 저술한 <고조선과 동북아의 고대화폐>는 대한민국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최근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후 과정(Post-Doc)을 마쳤고 모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대부분 시간은 연구 활동에 전념한다. 

▲ 국내 유일의 명도전 전문가 박선미 서울시립대 박사. 그는 화폐라는 유물은 이동성이 강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점에서 명도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 명도전에 관한 ‘오해’

- 석사논문에서 명도전 출토 지역분포도가 고조선 영역으로 일치한다고 했다.

“명도전 전체의 분포가 아니라 중국 동북지역을 두고 한 것이다. 석사학위 때는 적봉까지를 주요 검토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재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하면 북경지역이 가장 많다. 거푸집이 나왔는데, 이것은 명도전 화폐를 제작했다는 것이다. 산둥성(山東省), 한반도, 일본 등에도 나온다. 설사 러시아 학자 유 엠 부찐이 이야기했던 고조선의 강역과 일부 중복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이 부분은 명도전이 분포하는 전체 범위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고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사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규명해야지 곧바로 이것을 하나의 국경으로 연결시켜 보면 안 된다.”

- 결국 명도전은 표지석 유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출토량에서 북경이 많다. 서북한지역도 출토량에서 적지는 않지만, 비교가 안 된다. 연나라 수도 이시엔(易縣)에서 가장 많은 명도전과 거푸집이 나온다. 화폐라는 유물은 이동성이 강한 특성이 있다. 사고파는 행위나 혹은 인구의 이동으로 흘러가는 것이 화폐이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관점에서 명도전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동안 정치적으로 봤기 때문에 명도전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인가?

“그렇다. 오늘날 대외교역을 하는데 달러로 결제한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의 속국은 아니다. 그 당시에는 연나라의 화폐를 썼던 것뿐이다. 경제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예속된 것은 아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니까 문제다.”

- 북한에서는 고조선 화폐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조선 화폐라는 것도 뉘앙스가 있다. 고조선이 제작한 화폐인지 아니면 사용했던 화폐인지. 비록 고조선이 명도전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고 해도 이것을 고조선 내부 경제의 매개수단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용으로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주거지에서의 명도전 출토가 너무 적다. 오히려 대외교역의 수단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명도전은 청동이라 재질로서도 가치가 있다. 그것을 사들여 녹여서 사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 일부가 잘린 명도전이 하북성에서 나오는데 이는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명목화폐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 중국 장박천 교수가 명도전을 고조선 화폐라고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장박천 교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의 화폐라고 본 것이 아니다. 장 교수가 말한 고조선은 기자조선이다. 장 교수의 논문을 자세히 봐야 한다. 장 교수는 요령성 등 중국동북지역과 한반도 서북부에서 나오는 늦은 시기의 명도전을 기자조선이 만들고 사용한 것으로 보면서, 이들 지역 전체를 상(商 )의 후예국이자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파악한 것이다. 중국사학계는 고조선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180도 다르다. 그들이 말하는 고조선은 중국사로서의 기자조선밖에 없다. 그의 이 글은 단편적인 논문에 불과하다. 그의 기자조선에 관한 다른 논문들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대다수 중국 학자들도 기자조선에 관한 한 마찬가지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도전을 기자조선의 화폐로 보는 학자는 내가 알기로 장 교수 외에는 없다.”

■ 명도전의 기원은 연나라가 아니다, 왜?

▲ 박선미 박사가 지난 2009년에 저술한 <고조선과 동북아의 고대화폐>. 대한민국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된 책이다.
- 명도전에 관한 기록은?

“명도전을 연나라가 만들었다는 기록은 안 남아있다. 다만 명도전에 주조된 지명과 글자가 당시 연나라의 강역에 속했던 곳이어서 연에서 주조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명도전의 기원은 어디인가?

“명도전은 첨수도에서 시작한다. 첨수도는 한반도나 요하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명도전이 처음부터 아무런 연고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중국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산융이나 중산국 등 북방 유목민족이 자신의 필수품인 손칼을 모방하여 첨수도폐를 만들어서 화폐로 사용했다. 연이 세력을 북방으로 확장하면서 이들을 복속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들의 화폐제도인 첨수도를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명도전은 첨수도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주조됐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대체로 전국시대 전기 후엽으로 보고 있다.”

■ 삽, 조개, 손칼 등이 화폐로 만들어진 것

- 화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그 지역의 필수품을 본떠서 화폐를 만들었다. 농경지역은 삽 모양을 본떠서 포전(布錢)을 만들었고, 초나라는 조개를, 유목민족은 손칼을 본떠 화폐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삽이나 손칼 등 실물 자체를 가지고 교환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거래가 잦아지고 거래량도 많아지면서 실물이 번거로워지게 되었다. 이의 해결책으로 삽이나, 칼 등을 청동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화폐에 글씨를 새기지 않다가 나중에 다양한 기호나 지명 등을 새기게 된다. 그것이 시기가 내려오면서 점점 작아지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 화폐 발행이 고려 996년 성종 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나온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화폐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삼국에 대한 경제 이야기는 많지만 화폐는 없다. 우리가 연구해야 된다. 다행히 단편적이지만 고구려나 신라 등에 무문전(무늬나 문자가 없는 돈이라는 뜻)이라는 화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한국고대국가는 중국 내지의 여러 나라들과 대외교류를 활발하게 하였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시장의 존재를 말해주는 문헌기록들이 있다. 고려 성종 때의 기사는 주전 관련 사실을 처음 기록한 것이지, 그 이전에 주전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삼국에서 화폐를 발행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기록이 없다고 해서 실제로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변진에서 철이 나오는데 이것을 중국에서의 돈과 같이 사용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웃 나라인 왜와 군현에서 이를 사간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국고대국가에도 화폐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한반도 중부 이남에는 덩이쇠로 불리는 다양한 형태의 판상철부와 철정 등이 나왔고, 큐슈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열도에도 나왔다. 이로 보아 판상철부와 이 기록이 관련이 있지 않나 짐작된다.” 

- 고고학적으로 고대 화폐가 발굴된 사례는 있는가?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화폐를 제작했다는 기록은 없다. 또한 화폐가 있다는 기록도 정사류에는 없다. 유물로 출토된 적도 없다.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에서조차도 자체 제작한 화폐가 나왔다는 소식은 못 들었다. 출토된 화폐는 대부분 한나라나 당나라에서 만든 것이고, 출토량도 많지 않다. 현재로서는 삼국 내부에서 화폐가 사용되지 않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 세계와 소통하는 중국이 되어야

- 중국과 일본에서 교과서 왜곡과 영토분쟁 등이 계속되고 있다.

“중국은 당나라와 송나라 였을 때만 하더라도 문화의 중심이었다. 주변국과 소통의 창구를 마련해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데 현대 중국은 소통을 안하고 있다. 중국은 땅만 크지 역사의식을 가지고 크게 소통하는 통로를 해줘야 하는데, 폐쇄적으로 하고 있다.”

- 앞으로 어떻게 해야되나?

“중국이 그렇다고 해서 단편적인 대응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내부적으로 100% 기반을 다져놓아야 한다.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고 우리 내부에서 ‘맞아’, ‘맞아’ 라고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최종적인 목표는 도태되지 않고 공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문명이 사라졌다. 소통할 수 있는 학문, 소통하는 고조선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 고조선 박사학위자는 3명에 ‘불과’

- 우리나라 고조선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몇 명인가?

“고조선 박사는 나를 포함해 3명이다.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 연세대 박준형 박사. 고구려는 10명 정도 있는 것 같고, 신라는 많다. 백제도 최근에 많아지고 있다.”

- 고조선 전문학자가 손에 꼽을만하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로 많이 간다. 문헌이 충분하고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웃음).

- 고조선 박사인데, 수업은 많이 하는가?

“선사시대와 고고학으로 전체 수업 중에 3시간밖에 못한다. 다른 수업에서는 할 수 없다. 없는 대학도 많다.”

- 다른 나라는 어떠한가?

“미국은 잉카와 마야 수업만 한 학기동안 한다.”

- 고조선과 함께 요하문명에 대한 관심도 높다.

“우리는 언론에서 이슈화되기 이전에 중국을 답사했기 때문에 요하문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학자들은 모른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다 봤고 중국 학자와 접촉도 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전공한 학자가 없다.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연구하면 겨우 논문 1~2편이 나올까 말까이다.”

- 이 분야 연구자가 많아져야겠다.

“많아질 것이다. 고고학을 한다고 해서 고조선을 연구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우리는 남쪽 고고학만 한다. 북한 고고학을 발굴할 기회가 없다. (앞으로) 북한과의 교류가 있다면 우리가 갈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되면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질 것이다.”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의 국민으로서 고조선사에 관심을 갖고 애정을 쏟는 것은 당연하다. 고조선과 관련된 시기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국민의 관심 덕분에 고조선사에 대한 연구가 끊이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조선은 한국사에서 최초의 국가이자 오랜 역사를 갖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우리의 긍지일 수도 있겠다. 이제는 세계와 소통하는 고조선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로서의 고조선사가 아니라 동아시아사의 일부로서 고조선을 연구하고 동아시아의 구성원으로서 고조선의 위치를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조선은 중국의 전국시대 여러 나라및 한나라와 지속적인 외교관계를 발전시켰고 이를 통해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당시 한반도에 있었던 정치체들에게는 선진문물을 전해주는 통로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외부의 신문물에 의한 충격을 완화시켜주는 완충역할을 했다. 명도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린다.”

10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