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학계는 요하문명을 우리와 상관없는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하며, 요하문명에 대한 논의들은 중국학계에서 벌어지는 일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요하문명은 우리 상고사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민족공동체연구소(소장 정영훈)는 2일 동 연구원 게스트하우스에서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와 정체성을 재검토하는 연속 세미나'를 개최했다.

정영훈 소장은 "국내 역사학계에는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에 대해 주류학계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이른바 '비주류 학자'들이 적지 않다”며 “비주류 학자들의 이론과 입장을 중심으로 토론의 자리를 만들고 한국사의 진정한 범위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대안적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이번 세미나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날 우실하 항공대학교 교수는 '요하문명과 한민족 고대사-단군신화 다시읽기와 고대사 연구방향'을 주제로 홍산문명 곰 토템족은 단군신화의 웅녀족이라고 발표했다.

최근 중국학자들이 각종 사서(史書)에서 황제족은 유웅씨(有熊氏)라고 한 기록을 근거로 홍산문화를 주도한 곰 토템족은 황제족이라고 발표하고 있다는 것이 우 교수의 주장이다.

▲ 우실하 항공대학교 교수는 2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요하문명과 한민족 고대사-단군신화 다시읽기와 고대사 연구방향'을 주제로 홍산문명 곰 토템족은 단군신화의 웅녀족이라고 주장했다.

웅녀족, 홍산문화의 주도세력

우실하 교수는 "신화로 알려져 있는 단군신화를 재해석해야한다"며 "웅녀족은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인 곰 토템족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황제시대를 포함한 3황 5제의 신화체계는 이미 남성위주의 ‘고도화된 부계사회’를 전제로 한 신화체계이고, 홍산문화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초기 부계사회’라는 것이다.

유국상 등은 우하량 유적이 발견되는 홍산문화 만기(기원전 3500~기원전 3000)의 거대 적석총 중앙의 석실묘에서 발견되는 인골(人骨)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을 들어서, 홍산문화 만기에는 부계사회로 진입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대부분의 신의 형상물은 가슴이 풍만하고 둔부가 발달된 여성신이었다. 여신묘의 주실에도 실제 사람의 3배 크기의 여신이 있었다.

이를 통해서 보면 홍산문화 만기는 아직은 모계사회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초기 부계사회’라고 볼 수 있다. 결국 홍산문화 만기의 주도세력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집단이었고, 이들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모계사회의 주도세력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서 황제신화에서는 황제의 후손들은 모두 남성으로 이어지고 있어 이미 ‘고도화된 부계사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우 교수는 단군신화의 전개를 4단계에 따라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의 관계에 대한 가설을 제시했다.

1단계는 곰과 호랑이가 고조선이 발원한 지역에서 토착세력으로 살던 시기다. 이것은 고조선 지역에서 곰족과 호랑이족이 살던 시기로, 요하문명의 흥륭와문화 등 선(先) 홍산문화나 홍산문화 초기 시기에 해당한다.

2단계는 (1) 환인의 서자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외부에서 새롭게 유입되고,  곰과 호랑이 그리고 새로 유입된 환웅의 무리가 공존하는 시기로, (2)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곰과 호랑이는 환웅에게 가서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3) 환웅은 곰과 호랑이에게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면서 100일을 견디라고 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신석기문화의 모계사회인 토착세력(곰족, 호랑이족)과 청동기문화의 부계사회인 유입세력(환웅족)이 공존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곰족과 호랑이족은 앞선 문화를 지닌 환웅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홍산문화 후기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본다.

홍산문화 우하량유적의 여신묘는 모계사회의 흔적이고,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1500여개의 청동 슬러지나 거푸집 등은 초기 청동기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홍산문화는, (1) 고아시아족과 퉁구스족을 바탕으로 한 요서지역의 토착세력, (2) 앙소문화 지역을 거쳐서 채도와 초기 청동기문화를 들고 들어온 세력과 만나면서 꽃을 피운다.  이런 과정에서 곰 토템족의 일부는 서남방으로 남하하여 황제족으로 발전한다고 본다.

3단계는 동굴에서 머물던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지만 곰은 아름다운 여인 웅녀로 변신하고, 변신한 웅녀와 환웅이 혼인하여 단군을 낳고 성장하는 시기이다. 이 신화적 시기에 곰족은 환웅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융화되고, 곰족과 환웅족은 혼인동맹을 통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다. 탈출한 호랑이족은 사서(史書)에서 호랑이를 신으로 모신 동예(東濊) 등의 예족(濊族)으로 이어지며 후에 한반도로도 유입된다.

요하문명의  홍산문화 후기에는 초기 국가 단계로 진입한다. 단군신화의 이 시기는 신석기문화와 초기 청동기문화가 공존하던 시기로, 홍산문화 말기에서 동석병용시대 소하연문화 (小河沿文化: B.C. 3000 ~ B.C. 2000) 시기로 볼 수 있다.

4단계는 단군이 성장하여 고조선을 건국하는데, 그 때가 요임금과 같은 시기라는 내용이다. 이시기는 요하문명의  하가점하층문화의 발달된  청동기문화로 완전한 국가 단계로 진입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민족공동체연구소(소장 정영훈)는 2일 동 연구원 게스트하우스A회의실에서 '한국사의 시공간적 범위와 정체성을 재검토하는 연속 세미나'를 주제로 두 번째 회의를 개최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박선미 서울시립대 강사는 "곰토템은 고조선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북방 초원에서 활동했던 여러 종족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토템 중에 하나이다"고 말했다.

이어 박 강사는 “고고학 자료를 해석할 때 세계 고인돌의 분포 예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같은 유물이라도 다른 정치체 또는 다른 국가에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며, "중국 동북지역의 고고학 자료가 한국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고 했을 때, 홍산 문화 외에도 일련의 여러 고고학 자료에 대하여 보다 정밀한 분석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토론에 대해 우실하 교수는 "많은 동물 상징이 나오는데 왜 하필 곰만 가지고 설명하느냐? 그것은 중요도에서 차이가 난다. 여러 동물형상이 나오는데 주신(主神) 옆에 곰상이 있었다. 또한 곰뼈도 발굴됐다. 다른 동물에 비해 숫자도 많다"라고 답변했다.

금나라는 우리 역사로 편입해야

▲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
이에 앞서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김위현 명지대 명예교수는 '한국사로서의 금의 역사'를 주제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한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며 역사학적, 민족학적, 영역적, 관계사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김 교수는 이 가운데 민족학적 근거로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혹 고려)에서 옮겨 온 유이민이고 나라를 세울 때 협력한 발해 유민들은 곧 고구려계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아골타 근족들의 혼인 대상 민족은 요양에 거주하던 발해 귀족의 여식들이었다. 이들 후손들이 금 일대를 통치하였으니 황제는 신라유족, 후비는 발해 유족이었다"고 설명했다.

만주몽골지역은 고대부터 우리 조상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기원전 수천 년 전에는 고조선이 있었고 기원전 1세기부터 300년간은 부여가 있었다. 기원전 37년부터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워 668년(보장왕 27) 멸망할 때까지 28대 705년간 북아시아 전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되던 해인 699년에는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발해를 세워 926년 멸망할 때까지 14대 227년간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국가를 유지하였다.

김 교수는 "만주에서의 우리 역사가 발해의 멸망과 함께 한반도 내로 위축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러나 만주지역에서의 역사는 여기서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금나라는 어느 모로 보나 고구려와 발해 못지않게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구난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중국은 고대부터 청대에 이르는 북방민족 역사를 자국사로 편입하는 논리를 급속하게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이러한 때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북방사를 되돌아보고 한국사의 외연과 내연의 새로운 접점을 모색하는 의미있는 문제 인식을 던져주었다”고 평가했다.

구 교수는 “안정복安鼎福은『동사강목東史綱目』의 사론에서 발해를 기록한 것에 대해 '순치지세脣齒之勢였으므로 서술'했다고 대변한 바 있다. 당시 신라 중심적 시각에 젖어있는 사론계에 던지는 가히 혁명적 일침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식 전환은 후에 유득공의 『 발해고』 등과 같은 인식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금사'를 한국사의 외연에 둘 때 대안적 담론이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요하문명이 아니라 고조선문명으로

▲ 박선희 상명대 교수
마지막으로 박선희 상명대 교수는 '복식과 예술로 본 홍산문화와 고조선'을 주제로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소하서 문화의 뒤를 이은 흥륭와문화와 홍산문화는 분포지역이 거의 같고 계승관계를 나타낸다"며 "이 문화유적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물은 옥기와 새김무늬 질그릇으로, 신석기 초기부터 한반도지역의 유물과 성격을 같이해 한반도와 만주지역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밝혀준다"고 분석했다.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신석기초기부터 만들어진 다양한 옥장식들은 과학적인 분석결과 모두 요령성의 수암岫岩과 관전寬甸 일대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신석기시대부터 한반도와 흑룡강성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옥의 재료를 요령성지역에서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케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만들어진 옥으로 만들어진 복식물들이 재질에서도 모두 수암옥으로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홍산 문화에서 보이는 양식과 같은 계통으로 고조선 복식문화로 지속된다고 하겠다.”라고 말했다.

또한, 홍산문화 유적의 우하량무덤에서 출토된 옥고玉箍와 절풍모양의 옥장식에서 상투 머리양식이 신석기시대부터 정착된 사실과 고조선에서 상투머리를 덮는 모자로 널리 사용된 절풍의 원형을 찾을 수가 있다.

절풍은 여러나라 시대와 삼국시대로 오면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에서 두루 사용되어, 고분벽화에 보이는 관모와 금관, 인형식, 토우, 가면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물들에서 확인된다. 우리나라 관모의 기본양식은 홍산문화로부터 비롯된 고조선문화의 전통에서 그 실체와 정체성을 재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박선희 교수는 “최근 중국에서는 홍산 문화를 포함한 만주의 고대문화를 총칭하여 하나의 강 이름으로 포괄하여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이를 중국의 황제문화로 포함시키려 하고 있다”며 “우리가 ‘요하문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중국학계의 단순한 설명을 용납하고 동북공정을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우리는 이 문화를 반드시 '고조선문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이종수 단국대 교수는 “발표문에서 다루고 있는 시간적 범위는 BC 6,000년경(흥륭와문화)에서부터 AD 600년(고구려)까지로 무려 6,600년에 이르고 있다. 공간적인 범위 역시 요서지역에서부터 한반도 남단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 몇 가지 문화속성을 가지고 몇 천 년이 넘는 시공간적 범위를 뛰어 넘어 문화적 연속성을 주장하기에는 시공간적 범위가 너무 넓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시기별 혹은 지역별 각각의 문화 간에 나타나고 있는 문화변천 과정에서의 구체적인 분석, 즉 발명, 전파, 혹은 민족이동 등 연속성과 상호 관련성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