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은 한민족기념관과 공동으로 지난 25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라는 주제로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은 기조강연에서 "지구 곳곳에서 종교와 민족 간의 갈등에 의해 테러와 같은 비인간적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진정한 진리는 모두를 화합할 수 있게 하는 힘이기에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국가 간의 대립은 국가가 해결할 수 없고, 종교 간의 대립은 종교가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나 종교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정신이 나와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 총장은 새천년의 시대정신으로 국학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국학은 외국에서 들어온 모든 사상과 종교를 한국학으로 포용한다. 왜냐하면 국학은 홍익정신과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천지인 사상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이며, 모든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구인 정신’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일부에서 제기하는 국수주의 비판에 대해서도 "인간과 지구를 중심 삼고 인류를 화합시키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철학과 사상이 바로 국학에 있다. 그렇기에 국학은 태생적으로 국수주의가 될 수 없으며 민족 안에만 국한된 좁은 의미의 학문이 아니다. 보편적인 우주의 원리와 진리를 담고 있는, 넓고 깊고 큰 학문이다. 오히려 국학의 근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편협하고 보수적인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라고 말했다.

[전문]

국학(國學), 새천년의 시대정신으로

 

얼씨구 좋은 나라, 대한민국

지금,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국민은 있으되 국가관이 없고,
국가는 있으되 국혼이 없구나.
국혼의 뿌리인 국학이 없으니 그 어디에서 국가관을 배울 것인가?
국가관이 없으니 애국심과 애사심도 없고
가족 간의 존중과 사랑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언론은 있으되 정론이 없고,
여론이 있으되 얼이 없으며,
자식은 있으되, 인간존중이 없구나.

양심과 인간애가 살아있어야 할 곳에
이기심과 욕망이 사람과 세상의 눈을 멀게 한다.

돈과 명예, 출세와 권력이 다 인 양 착각하는 이들이 모여
나만 잘 살자, 나만 성공하자고
어두운 귀신 춤판을 벌이며 기도하고, 노래하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세상을 다 가졌다 하는구나.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은 불안하고 두렵다.
소수의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한
중산층의 몰락과
점점 커져만 가는 빈부격차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고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경제 성장의 기적과
현대 민주화를 상징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이름 뒤에는
세계 불명예 1위의 검은 그림자가
똬리를 틀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흡연율 1위, 자살사망율 1위, 자살증가율 1위,
이혼증가율 1위, 교통사고율 1위,
저 출산율 1위, 낙태율 1위,
노인 빈곤률 1위, 노인 자살률 1위,
청소년과 어린이 행복지수 4년 연속 꼴찌.

아,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누가, 어떻게 무엇으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우리에게 내려온 밝고 밝은 마음,
세상을 환히 비추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던
홍익의 양심은 지금 어디에 갔는가?

한얼 속에 답을 찾자

나만 좋으면 된다, 내 것만 옳다는 이기심은
개인, 단체, 지역, 종교, 기업, 국가의 탈을 쓰고
이리저리 세상을 활보한다.
존중과 사랑이 사라지고, 양심과 수치심도 모르니
얼이 없는 굴이 ‘얼굴’이 되어
세상을 바꾼다, 선교한다, 경영한다, 정치한다,
얼빠진 목소리를 높이는구나.

한민족은 홍익인간이요,
홍익인간은 얼을 쓰고 다 함께 좋자는 ‘얼씨구 좋다’이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 민족의 꿈이니
‘좋다’는 조화로움이고,
‘나쁘다’는 나 뿐인 것, 나만 아는 사람이다.

우리의 말 속에, 우리의 얼 속에 답이 있다.
나 뿐 인 마음을 조화롭게 열어
나쁜 생각, 나쁜 신앙심, 나쁜 교육, 나쁜 정치를
좋은 생각, 좋은 신앙심, 좋은 교육, 좋은 정치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길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참 가치를 존중하고 얼이 깨어날 때,
가족이 보이고, 국가가 보이고, 세계가 보인다.
애인(愛人), 애족(愛族), 애국(愛國), 애지구(愛地球),
인간사랑, 지구사랑은
한민족이 품어온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꿈이고,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대한민국의 국혼이요, 국학이다.

우리의 한 얼 속에서 답을 찾자.
우리말 속에 얼이 있고,
우리의 한 얼 속에 국혼이 있다.
국혼이 깨어나야 국학이 바로 서고, 양심이 살아난다.

밝음 마음으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양심의 세상,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함께 좋은 세상이야말로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아니던가.

이제, 한민족이 하나 되어, 얼씨구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세.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환한 얼굴로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목청껏 노래하세.

Ⅰ. 민족의 중심철학, 국학(國學)

  문화를 크게 전통문화와 외래문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통문화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 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철학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전통문화의 핵심은 민족이나 국가의 고유한 정신이고 철학이다. 이를 그 민족의 ‘중심가치’ 혹은 ‘중심철학’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심철학이 있는가?’라고 스스로 자문한다면 어떻게 답을 할 것인가.

  민족의식이 없는 역사 공부는 민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수많은 외래 침략에 의한 피해의식을 낳게 한다. 그렇기에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온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외래문화는 미화되었지만 반대로 민족 전통문화는 시의성(時宜性)이 없는 고리타분하고 배격되어야 할 문화로 저류화되고 말았다.

  미국의 세계사 교과서에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이기에 전통문화가 없으며, 있다면 샤머니즘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한국은 지난 2,000년 동안 주변의 강대국의 침략과 지배 속에서 끊임없는 문화 침투를 당해왔고, 그러한 시련의 역사 속에서 민족의 본래 정신과 가치를 잃어버렸다. 특히 36년간 이어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한국은 고유한 문화를 잃게 되었고, 문화적으로 식민지화 되었다. 일본이 펼쳐왔던 우민화 식민정책은 민족의 정신과 뿌리를 부정하게 만들었고, 국조 단군을 곰의 자손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한국인의 심상 속에서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는 혼재되어 왔다. 더욱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바로 서구 기독교문화의 영향권으로 들어섰기에 한국의 전통문화는 아직도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는 구분되어야 하며 역사적 시련 속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맥이 끊어졌다면 그것을 찾아 복원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주체성과 창조성은 전통문화에서 나온다. 자긍심과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미래를 창조할 수 없듯이, 전통문화가 없는 민족은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없으며 오늘의 삶과 상관없이 미래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학(國學)’과 ‘한국학(韓國學)’의 차이점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국학과 한국학은 엄연히 다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이전, 한국에는 단군조선시대와 그 이전부터 자생한 고유한 문화, 사상, 종교 등 일련의 사유체계가 존재했으며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국학’이라 한다. 단군조선 이후 삼국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 삼교가 수입되었고 고려시대의 불교문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 근대 이후의 기독교문화를 비롯하여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과 같은 이념들이 들어와 한국화 된 모든 문화와 정신을 연구하는 것을 ‘한국학’이라 정의할 수 있다. 국학에 뿌리를 둔 한국학은 있어도 국학이 없는 한국학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학은 단군조선을 포함한 그 이전의 역사와 문화, 사상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 

  한국 역사 속에서 불교문화, 유교문화, 기독교문화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사상이나 이념들이 비록 그 전래된 역사가 오래되었을지라도 한국의 전통문화는 될 수 없다. 외래문화는 전통문화의 토양 위에서 조화를 이루어가며, 그 민족의 문화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지 전통문화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국학은 모르고 한국학만 알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 고유의 사상인 국학은 외면당했고 괄시를 당해왔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짧은 시간 안에 경제적 성과를 이룩한 한국을 대단한 나라라고 칭찬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뭐냐고 물어볼 때 정확하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국학의 뿌리는 불교, 유교, 기독교와 같은 외래문화가 들어오기 전에 자생하고 있었던 ‘선도(仙道)’에 있다. 신라시대에 유교, 불교, 도교에 깊은 이해를 지녔던 대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 857~?)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고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내용은 곧 삼교를 포함하는 것으로 중생을 교화시킨 것이다. 이를테면, 들어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孔子)의 주지와 같고, 무위(無爲)로써 세상일을 처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老子)의 종지와 같으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釋迦)의 교화와 같다. 

  최치원은 유교, 불교, 도교가 있기 전에 한국에 고유한 도(道)가 있었다고 했으며, 그 도를 이름하여 ‘현묘지도(玄妙之道)’ 또는 ‘풍류도(風流道)’라 했다. 이 풍류도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이 풍류도를 ‘선도(仙道)’라 할 수 있으며, 혹은 ‘신선도(神仙道)’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 대표적인 국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는 최치원의 「난랑비서」의 현묘지도는 바로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의미한다고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최치원은 녹도문(鹿圖文)으로 된 『천부경(天符經)』을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 국학의 경전(經典)으로 『천부경』을 비롯하여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참전계경(參佺戒經)』이 있으며 그 핵심요지는 ‘홍익인간’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홍익인간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환인(桓因)이며 홍익인간 정신을 갖고 삼위태백(三危太白)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여 재세이화(在世理化)를 구현했던 사람은 환웅(桓雄)이다. 그리고 환인의 홍익인간 정신과 환웅의 재세이화 정신을 국시(國是)로 계승하여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것이다. 따라서 『천부경』과 홍익인간 그리고 그 뿌리인 단군을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은 국학이 아닌 것이 된다. 

  민족의 중심철학이라 함은 그 민족과 국민의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외래에서 들어온 종교나 사상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외래종교는 신자의 증가와 교세 확장에 중심을 둘 뿐, 진정으로 민족의 발전을 위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다. 외래이념 역시 마찬가지다. 그 이념적 수구만을 주장하게 됨으로써 민족의식의 각성은 뒷전이 되어 버린다.

  한국은 오랜 역사 속에 외래문화에 의해 문화침투를 당해왔다. 한국의 역사를 공자의 눈으로, 석가의 눈으로, 예수의 눈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래문화에는 한국의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는 홍익정신을 이 땅에 펼친 단군의 눈으로, 단군의 가슴으로 이해해야 한다. 단군은 5천 년 민족사의 첫 머리에 ‘홍익’이라는 불을 밝혔으며, 한민족의 핵심적인 가치관과 중심철학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단군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한민족의 가치관과 정체성의 핵을 알 수 없고, 중심과 가치기준이 없으므로 자연히 민족이 가야 할 목표와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이다.

Ⅱ. 우리에게 왜 국학이 필요한가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교육하고 알리는 학문이 ‘국학’이다. 전통문화의 복원은 국학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국가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며, 정권이 바뀌더라도 지속되어야 할 민족의 천년대계이다.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고유한 학문인 국학의 중요성을 알고, 국가차원에서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본에는 신도(神道)를 토대로 한 국학원대학교가 설립되어 있다. 많은 명문대학이 있지만, 일본인들은 이 대학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중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북경에 있는 인민대학 내에도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한 국학원과 국학연구원이 설립되어 있고, 앞으로 중국 각지의 대학에 국학원을 설립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경우, 여러 대학에서 국학을 주제로 연구하는 연구소가 있지만 단군시대를 포함하여 그 이전의 문화와 사상, 역사를 연구하는 곳은 드물다.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있다고는 하나, 이름이 보여주듯이 국학보다는 한국학 연구에 주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인 국학을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국학 연구는 마땅히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민간차원에서라도 연구를 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2004년에 (사)국학원(國學院)이 설립되었다. 국학원에서는 국학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공무원, 회사원, 학생, 군인, 주부 등을 대상으로 국학 교육과 민족혼 교육을 진행해왔다. 

  국학의 복원은 전통문화의 복원이며, 국학이 복원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는 홍익정신의 복원이다.
  둘째는 한민족의 철학인 『천부경』의 복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학이라면 『천부경』을 말해야 하고, 『천부경』이 없으면 국학이 아니라 한국학이 된다.
  세 번째는 국학을 연구하고 국민들에게 교육을 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국학이 복원될 때, 비로소 한민족의 전통문화는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국학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부활(復活)’이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한다. 없던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단군의 홍익정신이 이 시대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국학에는 한국의 민족혼이 스며들어 있다. 국학은 단순히 추상적인 학문적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민족혼과 철학이 지식과 어우러져 새로운 학문으로 재정립된 것이다. 그렇기에 마땅히 국학은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국민 실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한국이 안고 있는 당면한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국학이 일부 관심 있는 학자들이 연구하는 학문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대중적이고 국민적인 문화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한국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고대사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이 거의 소실되었다. 그나마 파편적으로 전래되어 온 문헌들조차 실증사학자들에 의해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하여 위서僞書라고 주장되고 있다. 이런 상황들 속에서 국학을 이론화하고 학문적으로 정립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다. 비록 어려운 현실이지만 국학의 학문화는 꼭 필요하다. 그리고 국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 국학을 알려서 국혼을 깨우는 문화운동이 함께 전개되어야 한다. 

  국학이 제일 발달했던 시대는 단군조선시대이다. 당시 국학은 국정의 목표였고, 그 목표가 바로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으로 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단군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라를 세운 것이지 국민을 지배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홍익의 정신은 정치로 발전하여 정치 철학이 되었다. 철학이 정치화될 때 그 철학은 진정한 철학으로 만개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철학과 정치가 따로 있고 현실 속에서 구현되지 않는다면, 그런 철학은 건강, 행복, 평화와 같은 현실적인 인간의 삶과는 거리가 먼 공허하고 사변적인 학문으로만 남게 된다.

  한국은 해방 이후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했으며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인 오바마까지도 한국을 칭찬하는 기사를 언론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이․청소년 주관적 행복지수가 23개 OECD 회원국 중에 4년 연속 최하위이고, 자살사망률 1위, 자살증가율 1위, 이혼증가율 1위, 교통사고율 1위, 저 출산율 1위, 낙태율 1위, 노인 빈곤률․자살률 1위이다.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지표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의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폭력과 자살로 얼룩져가고 있는 교육의 문제이다. 

  국학의 천지인(天地人) 사상 즉,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상과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 속에서 양극화 문제와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발견할 수 있다. 천지인 사상이 바로 홍익정신이라 할 수 있기에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종교는 ‘홍익종교’가 되고, 그런 정치와 경제는 ‘홍익정치’이며 ‘홍익경제’가 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국민 대다수가 삶의 목적을 홍익인간에 둠으로써 국민의 의식이 높아질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국학을 통해 국민의 의식을 높일 수만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해결하지 못한 양극화 문제와 교육 문제를 한국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도 진리이고 불교의 진리도 진리이나 이것이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는 없다. 비록 기독교와 불교의 문화가 한국의 문화와 생활에 미친 영향은 크지만 그것이 부분적인 것이지 전체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 한국이 추구해야 할 것은 국학을 중심삼고 외국에서 들어온 많은 정신과 진리를 조화하고 화합시켜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으로부터 반 만 년 전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은 지금 이 땅위에서 다시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바로 ‘Human Technology’인 ‘단학(丹學, Dahnhak)’과 ‘뇌교육(Brain Education)’이다.

Ⅲ. 우리말에 깃든 국혼(國魂)

  외래문화의 역사는 잘 정리되어 있지만, 이에 비해 국학과 관련된 자료는 전쟁을 통해 소실된 것이 많다.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 국학의 뿌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병화에도 소실될 수 없는 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다. 그렇기에 우리말 즉, 한국어는 국혼을 품고 있는 국학의 상징이며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한글은 세종대왕 때 창제되었지만 한국말은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단군조선시대부터 있었기에 한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대표하는 것이다. 

  민족문화는 그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에 영향을 주고 언어와 문화는 그 민족의 사유를 담고 있다. 근대 이전까지 문자는 소수 지배층에 의해 독점화 되었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현재까지 남겨진 문자로 된 문헌만으로 민족문화를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말은 한글이나 한문으로 표현되기 이전에도 사용되었고, 따라서 조상대대로 내려온 우리말 속에는 민족의 정신, 얼이 스며들어 있다.

  한민족은 예로부터 수행하는 생활을 강조했고, 구체적 수련방법으로 『삼일신고』「진리훈(眞理訓)」에서는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기에 한국어를 학문적으로 언어학적으로만 이해하기에 앞서, 호흡이나 명상 수련을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직관적으로 통찰한 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학의 3대 경전의 핵심 원리가 한국어를 통해 전해져 온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우리말에 내포된 의미나 상징을 잘 해석한다면 국학의 사상적, 문화적 배경과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아리랑(我理朗)’과 인간완성

  아리랑은 한국의 대표적인 구전민요이다. 민족의 정한이 깃든 이 노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장 널리 애창되었던 겨레의 노래이며, 한말 이후 일제 강점기 때는 겨레의 울분과 억눌린 민족의 한을 표출하는 저항의 노래이기도 했다.

  아리랑은 민족 고유의 대표적인 민요지만 작자 미상이며 현재까지도 그 유래에 대해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아리랑’이란 어원 역시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정설은 없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아리랑에 대해서는 학문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하는 해석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리랑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랑은 한문으로 풀어보면, ‘아(我)’는 ‘참나眞我’를 의미하고 ‘리(理)’는 ‘이치를 깨닫는 것’을 의미하다. 그리고 ‘랑(朗)’은 ‘즐거움’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아리랑’의 의미는 ‘참 나를 깨닫는 기쁨’을 뜻하게 된다. ‘아리랑 고개’는 바로 ‘깨달음의 고개’를 상징하고, ‘십리’에서 ‘십十’은 가로(―)와 세로(|)의 만남, 여자와 남자의 만남, 하늘과 땅의 만남, 해와 달의 만남, 물과 불의 만남을 통한 완성과 종합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랑 노래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참 나를 깨닫는 기쁨이여 참 나를 깨닫는 기쁨이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깨달음의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참 나를 버리고 가는 사람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인간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발병이 난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얼이 영글고 영글어서 만들어진 민족의 혼이 담겨진 노래이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가(怨望歌)지만, 아리랑을 부른 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님’은 ‘삶의 영원한 근원’, ‘참 나’, 커다란 ‘민족적 자아’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가 되려면 단순히 정한의 노래에 그쳐서는 안 된다. 끝없는 개인적․집단적 수행을 통하여 자기완성․전체완성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정신이 녹아들어갈 때라야만 아리랑은 진정한 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리랑은 잠든 나를 깨우는 노래이며, 잠자고 있는 민족혼을 깨우는 힘을 가진 노래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적인 노래이며 인류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깨달음의 노래이다.

  2. ‘얼’과 생명전자

  우리말에 ‘얼’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는 ‘정신’, ‘넋’, ‘혼’을 뜻한다. 얼과 관련한 말 중, 그 대표적인 것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얼굴’이라는 말이 있다. ‘얼굴’이란 두 개의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얼’과 ‘굴’. 이때 ‘굴’은 ‘구멍’으로 눈구멍, 콧구멍, 입구멍, 귓구멍을 뜻한다. 

  ‘얼굴’이란 ‘얼이 들락날락 거리는 굴’을 뜻하며 이때의 얼은 ‘정보’를 의미한다. 구멍(굴)을 통해 외부의 정보가 들어오고 나간다. 눈을 통해 정보를 보고, 귀를 통해 정보를 듣는다. 코를 통해 들어오는 냄새도 일종의 정보다. 그리고 모든 정보는 뇌에서 종합, 정리되어 입을 통해 정보를 출력하고 외부와 소통한다.
  이 외에도 머리에는 ‘대천문(大天門)’과 ‘소천문(小天門)’이라는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굴이 더 있다. 한의학에서는 이를 ‘백회(百會)’와 ‘전정(前頂)’이라고 하는데 머리 맨 위, 정수리 부근에 위치해 있다. 선도仙道에서 대천문은 천기(天氣)가 흘러 들어오는 문이기에 ‘통천혈(通天穴)’이라고도 하며, 소천문은 대천문 앞에 있는 혈로써 우주의 맑은 기운인 천기가 잘 흘러들어오는 곳이다. 따라서 얼굴에는 도합 아홉 개의 구멍(굴)이 있는 것이다.

  이 굴들은 뇌와 연결되어 있으며 정보를 주고받는 일종의 정보 통로이다. 굴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하여 최종 판단하는 것이 바로 뇌이고, 이 뇌는 두개골에 싸여 있어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보고 듣는 것은 눈과 귀가 아니라 바로 뇌가 보고 듣는 것이다. 예를 들면, 뇌에 호랑이라는 정보가 없으면 호랑이를 보고 호랑이라고 할 수 없다. 호랑이를 쥐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신의 정보만큼 판단하고 정보만큼 보고 듣는다. 그 정보는 인간의 뇌 속에 있으며, 그 정보의 가치와 질이 한 인간의 가치와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얼굴을 영어로는 ‘페이스face’라고 하며 한문으로는 ‘안면(顔面)’이라고 한다. 얼이 들락날락 거리는 구멍이라는 우리말의 얼굴의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동일한 것에 대한 타 문화의 언어와 비교했을 때 우리말의 특징 즉 국학의 특징이 잘 드러나게 된다.

  우리말에 ‘얼간이’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얼이 빠진 사람’, ‘얼이 간 사람’을 의미한다. 굴을 통해 얼 즉 정보가 왔다 갔다 하기에, 얼을 지키지 않으면 얼은 가버리게 되어 얼굴이 있더라도 얼이 빠진 사람이 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얼굴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얼빠진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한국인에게 ‘한국의 얼이 뭐냐, 한국의 정신이 뭐냐’라고 물어볼 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미국의 정신이 뭐냐’, ‘이스라엘 정신이 뭐냐’라고 물을 때 대답을 잘 한다면 그 사람은 얼빠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얼빠진 교육은 얼빠진 사람을 만들어 낸다. 얼빠진 교육은 지식 위주의 교육이 된다. 교육제도는 있으되 얼이 없는 죽은 교육이 되는 것이다. 얼이 없는 부모가 얼이 없는 자녀를 낳고 키우게 된다. 얼이 빠진 사람에게서는 바른 인생관과 국가관 그리고 세계관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얼은 우주 전체의 본질을 의미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본체를 의미한다. 성경과 불경, 도덕경 등과 같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본래 자리’로 이를 『삼일신고』에서는 ‘하늘(한얼, 天)’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저 파란 창공이 하늘이 아니며 저 까마득한 허공이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얼굴도 바탕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위아래와 둘레 사방도 없고, 겉도 비고 속도 비어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무엇이나 싸지 않는 것이 없다.

  선도 전통에서 ‘사람은 한얼 속에 한울 안에 한알이다’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여기서 ‘울’이란 ‘울타리’를 의미한다. 집에는 집의 울이 있고 나라에는 나라의 울이 있으며, 지구에는 지구의 울, 우주에는 우주의 울이 있다. 한울은 한 울, 전체의 울을 의미하기에 전체가 다 한울 안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한얼 속에 한울 안에 한알이다’라는 의미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전체이면서 또 하나인 것이고, 이 하나는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하나가 아니라 전체와 연결되어 전체 속에서 숨 쉬는 하나라는 것이다. 전체와 떨어져 있을 때 하나는 존재할 수 없으며 전체와 연결된 하나일 때 그 하나는 진정한 하나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얼’은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때 마음은 몸과 다른 것이 아니며 한 단어()에서 나온 말이다. 일반적으로 몸과 마음을 나누어 놓고 어느 한쪽만을 강조한다. 몸을 물질로 보고 물질을 강조하면 유물론이 되고, 반대로 마음이나 정신만을 강조하면 유심론 혹은 관념론이 된다. 몸과 마음은 나눌 수가 없는 것이기에,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분리해 놓으니 세상도 자연히 조화를 찾지 못하게 된다. 

 『삼일신고』「진리훈」에 나오는 지감․조식․금촉 수행은 삼도(三途, 感․息․觸)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몸이 없으면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없어진다. 따라서 몸은 욕망의 근원으로 거부하고 배격해야만 할 대상이 아니라 수행을 위해 아끼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다. 또한 마음은 『천부경』에서 ‘본심본태양앙명(本心本太陽昻明)’이라고 표현했듯 태양처럼 밝고 밝은 것이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밝은 마음’ 즉 ‘양심(陽心)’이 내재하고 있으며, 그 양심대로 사는 삶이 홍익의 삶이 되는 것이다. 

  세계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둘은 서로 관계가 없다는 실체이원론이나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기에 다른 한쪽과 대립해야 하는 일원론적 사고의 극복은 몸과 마음의 조화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의 조화에서 출발하여 나와 세계와의 조화 그리고 우주와의 조화를 이루는 우아일체(宇我一體)의 경지로 나아가야 한다.

  우주와 합일을 느끼는 것은 지적인 학습이나 철학적 사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 됨을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을 통해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주에 편재하는 기(氣), 생명전자(Lifeparticle)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생명전자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몸속에서 순환하는 기의 흐름을 우주의 힘과 연결시켜야 비로소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교감이 가능해지며 생명전자의 흐름을 타고 전해지는 모든 정보를 활용할 수 있다. 

  이 정도의 감각을 회복하게 되면 지구 환경 보호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온실효과나 삼림파괴의 심각성, 멸종 위기에 놓은 동식물 등의 수치를 들어 말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한 번 느껴보는 것으로 족하다. 지구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땅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하늘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우주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 된다. 생명전자는 인류의 영적 각성과 더불어 펼쳐질 정신문명 시대에 민족과 종교, 사상,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쓰일 새로운 ‘보편 언어’이다. 기는 영혼의 언어로써 우주에게로, 신에게로, 궁극적으로 자신에게로 가는 통로이다.

  얼을 깨치기 위해서는 생명전자를 느끼고 터득해야 한다. 그렇기에 국학은 ‘감각 회복 운동’이다. 생명전자를 터득한 사람은 뭇 생명과 인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있기에 뭇 생명과 교류를 할 수 있다. 생명전자를 통해 얼이 깨어나고 모든 생명과 자기 자신이 연결된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연결되어 있고, 하늘의 생명과 땅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이다. 하나이기 때문에 남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홍익인간 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3. ‘좋다’와 견시관(見視觀)

  우리말 중에 ‘나쁜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나쁜 사람’의 반대말은 ‘좋은 사람’이다. ‘나쁜’은 ‘나’와 ‘쁜’이 합쳐진 것이다. ‘쁜’은 ‘뿐인’으로 ‘나쁜’은 ‘나뿐인’으로 ‘나쁜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좋은’은 ‘조화로운’을 의미하며 ‘좋은 사람’은 ‘조화로운 사람’을 의미한다. 모두가 다함께 좋을 때 ‘좋은’ 것이 되는 것이다. 정말 좋을 때 ‘얼씨구 좋다’라고 한다. ‘얼 빠져서 좋은 것’이 아니라 ‘얼을 쓰니 좋은 것’이다.

‘남’이란 ‘나’와 ‘ㅁ’이 합쳐진 글자이다. ‘나’를 가두게(⃞)되면 ‘남’이 되고 ‘나’를 열어두면 모든 것이 ‘나’가 된다. 나를 닫아버리면 상대방과 자신과 분리가 되는 의식을 갖게 되고 열어두면 모든 것이 다 ‘나’가 되어 결국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남을 나쁘게 하고 좋다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좋다는 것은 남도 좋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나만 좋을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남을 해롭게 하면 나쁘다고 했고 남이 잘 될 때 좋다고 했던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만 잘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다 함께 행복해지고자 하는 사상이 우리말 속에 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가 좋다’는 것은 바로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홍익인간 정신은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견(見)․시(視)․관(觀)’에서의 ‘관(觀)’에 해당한다. ‘견(見)’은 ‘견해’이고 ‘시(視)’는 ‘시각’이다. 견해와 시각을 갖고 토론하게 되면 시각과 견해의 차이에 의해서 서로 갈등하게 되고 모두 다 공감하는 결과를 얻기 힘들어진다.
  ‘관(觀)’은 통찰력의 차원으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의식으로 ‘나쁜 의식’이 아니라 ‘좋은 의식’이다. 바로 ‘모두가 행복하면 좋겠네’라는 마음이다. 이러한 ‘관’의 수준에서 인생관과 국가관, 세계관이 형성되어야 한다. 아무리 시력(視力)이 좋아도 전체를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시비가 많아지게 된다. 공부할수록 시비가 많고 지식이 많을수록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공부를 잘하고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좋은 교육이 아니라 나와 남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인생관과 국가관 그리고 세계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 좋은 교육이다.

  4. ‘안녕(安寧)’과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

  ‘안녕’이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① 안전하고 태평함, ② 편안, 건강, ③ (작별할 때) 인사말 등이다. ‘안녕하다’는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을 뜻하며, 영어로는 ‘well-being’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적 의미로는 ‘최적의 건강을 향한 일종의 선택, 복지를 향한 최고의 잠재력에 도달하려는 생활 방식, 계속 발달하는 하나의 인지과정, 내․외적 에너지의 효율적 관리, 육체 정신 영혼의 통합, 자신에 대한 애정 깊은 수용 등’으로 정의된다.

  ‘안’은 ‘정신적인 평화’를 의미하고 ‘녕’은 ‘육체적 건강’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은 ‘마음도 몸도 모두 편안하십니까’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안’을 정신적인 측면으로 ‘양(陽), 하늘(天)’을 의미하고 ‘녕’은 육체적인 측면으로 ‘음(陰), 땅(地)’을 의미한다. ‘안녕’의 중심은 사람이고, 사람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이다. 이는 천지인 사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를 『천부경』에서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고 표현한다.

 『천부경』은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하여 하나로 돌아가되 그 하나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사람 안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들어있다’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러한 『천부경』의 정신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생활철학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단군의 ‘홍익인간․재세이화’이다. ‘홍익인간․재세이화’라는 건국이념은 단군이 어느 날 갑자기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민족의 사상이 집약된 정신이며,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요.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니, 세상에 났으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큰 깨달음 속에서 나온 사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홍익인간 정신은 현재 대한민국 교육법에서도 근본 교육이념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홍익인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으니, 홍익은 죽은 글자가 되고,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용지물처럼 생각하게 된 것이다.

Ⅳ. 새천년 시대정신, 국학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 지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세계의 여러 국가나 종교 등에서 나름대로의 인류평화의 가치를 주장하고 있지만, 아직도 모든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정신이 나오기는 요원한 듯하다. 이 인류를 이끌어갈 중심철학은 없고. 이기주의와 패권주의가 세상을 이끌고 있다. 

  국가나 종교, 문화마다 진리의 정의가 다르다면 그 진리 속에는 항상 갈등을 내포하게 된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종교와 민족 간의 갈등에 의해 테러와 같은 비인간적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 진정한 진리는 모두를 화합할 수 있게 하는 힘이기에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지금 인류는 국가와 종교를 넘어서는 새로운 천년을 맞이할 수 시대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 간의 대립은 국가가 해결할 수 없고, 종교 간의 대립은 종교가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나 종교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정신이 나와야 한다. 

  한국에 들어온 외래문화는 큰 저항 없이 수용되었다. 흔히들 한국을 종교 백화점이라고 하는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처럼 다양한 종교가 있으면서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갈등 없이 수용되고 있는 나라는 드물다. 그러한 이유는 바로 한국인의 심성 속에 뿌리 깊이 내재한 홍익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국학은 외국에서 들어온 모든 사상과 종교를 한국학으로 포용한다. 왜냐하면 국학은 홍익정신과 천지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천지인 사상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이며, 모든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구인 정신’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산다고 다 지구인이 아니다. 지구를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지구를 느끼고 지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지구를 판단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 차이를 내세워 대립하기보다는 같은 지구인이라는 생각으로 서로 협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구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다’라는 정신만이 현재 인류가 안고 있는 종교, 환경, 경제, 정치,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새천년에 필요한 시대정신, 바로 지구인 정신이다. 이러한 지구인 정신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하나라는 한민족의 천지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홍익인간이 곧 지구인이고 지구인이 곧 홍익인간인 것이다.

  인간과 지구를 중심 삼고 인류를 화합시키고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철학과 사상이 바로 국학에 있다. 그렇기에 국학은 태생적으로 국수주의가 될 수 없으며 민족 안에만 국한된 좁은 의미의 학문이 아니다. 보편적인 우주의 원리와 진리를 담고 있는, 넓고 깊고 큰 학문이다. 오히려 국학의 근본 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편협하고 보수적인 국수주의와 민족주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국학은 ‘평화학(Peaceology)’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의 위대한 홍익정신이 있기에 ‘인류평화’는 21세기 인류에게 희망으로 남을 수 있으며, 한국은 위대한 정신이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