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은 한민족기념관과 공동으로 지난 25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라는 주제로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복기대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역사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거나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점에 다다르면 공통적으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등장한다”며 “이런 이념이 한국에서 시작되어 그 역사적 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념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복 교수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당시 무덤 유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왕이 죽으면 함께 껴묻는 ‘순장 풍습’을 예로 들었다.

“고조선 무덤은 순장(殉葬)이 없다. 순장이 없다는 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 사람을 위한 다른 사람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하유역의 상나라에서는 순장풍습이 횡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둘의 차이를 통해 두 나라 간에 사람에 대한 인식차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밝혔다. 즉 두 나라 중에 통치철학으로 인간 존중을 담은 홍익인간 이념의 여부가 무덤 양식으로 반영된 것이다.

[전문]

고조선기에 만들어진 한민족의 이념에 대하여


1

  1945년 대일승전(對日勝戰) 후 한국은 남·북전쟁(南北戰爭)을 겪으면서 60여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 명실상부한 온 누리의 리더국가로 발돋움 하였다. 이런 발전 속도는 과거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한 국가발전을 도모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을 빼고는 온 누리에서 그와 같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 현대사의 기록이다.

  이런 발전이 있었던 것은 한민족이 단순한 경제발전의 목적만을 가지고 일로매진(一路邁進)한 결과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승리감을 맛보기 위한 자아의식의 발로가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자아의식의 발로 과정에서 한국은 경쟁상대국으로 늘 일본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말마다 ‘일본도 하는 일을 왜 우리는 못하나?’ 하면서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그 결과 온 누리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한국의 부상(浮上)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위치에서 한국의 위상을 살펴보면 뭔가에 걸려서 더 이상의 한걸음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으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특별한 진전이 없이 계속 맴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제자리 현상이 계속되면 발전보다는 상대적인 퇴보로 점점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일본의 경우가 그랬다. 일본은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학(日本學)을 발전시켜 성장과 도약의 발판을 삼았다. 대다수의 일본국민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학에 동의하여 정부정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재도 1945년 이후 과거에 만들었던 일본학을 근거로 하여 경제적인 발전을 하였지만 그 한계성으로 인해 1980년대 말부터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 이른바 개혁·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실제적으로는 등소평(鄧小平)이 주장한 다민족융합의 중화민족주의(中華民族主義)를 만든 동시에 중화는 세계의 리더라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면서 중국은 20여 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글쓴이는 이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여 보았다. 위에서 본 것처럼 동아시아 3국의 발전은 모두 자신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일정 시기가 가면 모두 주춤거리는 현상을 볼 수 있다. 현재 중국도 마찬가지인데 전반적으로 주춤하는 상황이다.

  글쓴이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었다. 이런 관심은 역사학을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 결과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게 되었는데, 그 결론은 둥지를 지키는 이념과 둥지 밖에서 생존하는 이념은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 한국, 중국이 일정부분 고도성장한 것은 둥지를 지키는 이념을 창출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성공하였다. 그러나 둥지를 벗어나 둥지 밖에서 생존할 이념을 만들지 못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국민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이타주의(利他主義)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족만을 하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이타주의(利他主義)에 대해 큰 기쁨을 느끼는 감성이 강하다. 그래서 가수 수와진의 행동에 감동하고, 가수 김장훈에게 감동하여 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본, 한국, 중국은 둥지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여기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타주의에 대한 것을 우리 역사에서부터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의 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2

  한국사에서 등장한 첫 국가공동체는 고조선(古朝鮮)이었다. 이 고조선에 대한 것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실제가 없다느니 또는 훨씬 후대라는 등등 많은 논란이 있다. 이런 논란에 대해 글쓴이는 단호하게 반론하는데 ‘어떻게 해야 실체가 있는 것이고, 어떻게 후대라는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한국사에 끊이지 않고 나오는 기록이다. 이런 기록들에 대해서 무시한다면 이것은 역사를 연구하지 말자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연구의 문제점은 있다하더라도 고조선의 실제는 책에 쓰여 진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글쓴이의 지론이다.

  이런 고조선의 건국이념(建國理念)이 주지하다시피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이다. 나라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은 널리 두루 이롭게 하는 것이고, 서로 더불어 잘 살자는 것이 건국이념이다. 이 이념은 온 누리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건국이념인 것이다. 이런 이념이 4300년 전에 시작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이념은 고조선시대 유적에서부터 볼 수 있다. 글쓴이는 고조선시대를 증명할 고고학문화를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로 보고 있다. 이 시기의 무덤유적과 동시에 황하유역의 상(商)나라 유적을 비교해보면 두 문화 간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그림1, 2참조).

그것은 고조선시대 무덤은 순장(殉葬)이 없다는 것이다. 순장이 없다는 것은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 사람을 위한 다른 사람이 희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하유역의 상나라에서는 순장풍습이 횡행(橫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두 나라 간에 사람에 대한 인식차이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민족은 맥족(貊族)이 주축 되었다. 맥(貊)이란 짐승이 갖는 의미는 정의롭지 않은 사람을 가려내어 징벌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 맥족에 대하여 황하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孔子)도 맥족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자는 맥족을 진실로 싫어했는데 그는 맥족을 미개인이라고 취급할 정도였다. 아마 그 이유는 공자가 그렇게 찬양하였던 동이문화(東夷文化)와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스스로 이족(異族)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주(周)나라의 변방이었던 노(魯)나라의 후손이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또한 정치하는 사람들도 맥족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정치가 중에 한 사람이 세제(稅制)를 말할 때 나온다. 훗날 송(宋)나라 경덕(景德) 4년(1007) 진종(眞宗)에 의해 상성(商聖)으로 봉해지고 민간에서는 인간재신(人間財神)이라 불린 백규(白圭)가 자기 나라의 세법(稅法)을 고치는데 5% 세법을 제시한다.

  여기에 대하여 맹자(孟子)는 매우 불쾌하게 얘기를 하면서 그것은 맥국(貉國)의 세법이라 힐난하면서 맥국의 국가 시스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때 맹자는 맥국은 아무것도 없는 나라이고 조상에 대한 제사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5%세법으로 되지만 위나라나 황하유역국가들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된 나라이기 때문에 세금을 적게 받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맹자 얘기의 골자를 보면 서로 다른 방식의 세상을 말하고 있다. 맹자가 사는 곳은 철저한 조직의 통치를, 이와 반대로 맥족이 다스리는 나라는 철저한 행정조직보다는 인화(人和)를 강조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규는 인화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맥국의 세제를 따르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백규의 세제는 실패를 하면서 당시 중국은 매우 혼란한 시기로 돌입한다. 사방에서 난이 일어나고 별도의 정부들이 곳곳에서 스스로 왕이라 부르며 독립 국가를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상앙(商鞅)의 주도로 민생위주의 개혁정치를 한 진(秦)나라가 곧 통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의 관점과 백규의 관점은 고고학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오늘날 만주지역과 황하유역의 자연조건을 비교해볼 때 황하유역이 훨씬 살기가 좋은 곳이다. 이는 객관적으로 비교 해봐도 누구나 같은 말을 한다.

  그런데 기원전 5-4세기경의 시기의 상황을 보면 이상한 현상이 발견된다. 그것은 만주지역에 황하유역에 살던 사람들이 대거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국가를 이룬 것도 아니다. 그 반대로 황하유역에서는 만주지역 사람들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황하유역사람들이 살던 곳은 경제적으로는 살기 좋았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나 정치제도에서는 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살기 편한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역사기록에 보면 전국시대 말고도 그 후에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서한(西漢) 때의 위만(衛滿)세력도 그런 예라고 볼 수 있다. 기실 황하세력들이 맥의 땅, 즉 고조선 땅으로 들어온 세력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기자(箕子)세력들이다. 기족(箕族)들은 주나라 세력에 밀려 동쪽으로 또한 동북쪽으로 흩어졌는데, 동북쪽으로 온 일파들은 그대로 살아남았고 동쪽으로 간 세력들은 노(魯)나라, 제(齊)나라에 모두 흡수되었다. 이런 이동에 대하여 윤내현은 역사적 사료를 검토하여 고조선지역으로 넘어온 기족들은 훗날 고조선의 후국(侯國)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는 매우 타당한 견해라고 본다.

  이런 현상을 중국학자들은 황하유역 정권들이 만주지역까지 진출하여 나라를 세력을 넓혔다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아주 비근한 예로 최근 중국정부에서 발표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현재 한국의 청천강(淸川江)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나, 흑룡강성(黑龍江省) 지역까지 올라갔다고 하는 주장이 바로 이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중국학자들의 이런 해석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진정으로 그랬다면 공자(孔子)나 맹자(孟子)가 당시 만주(滿洲) 땅이 자기들의 땅이었다고 말했을 터인데 왜 맥(貊)의 땅이라고 하였겠나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현대 중국학자들의 주장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렇듯 중국세력들이 끊임없이 만주지역으로 이동해오는 이유가 바로 경제적인 문제에서는 힘들지만 정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한국 사서(史書)에는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것은 몇 군데에서 나타난다.『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에 보면 화백회의(和白會議) 제도가 있다. 이 제도는 만장일치제의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모두의 의견이 일치가 되어야하는 결의 사항이 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는 바로 선대(先代)의 고조선에서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신라본기 권1」에서는 ‘신라는 조선유민(朝鮮遺民)’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제도(制度)도 그대로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의 역사를 봐도 5부제도(五部制度), 5경제도(五京制度) 등을 운영하여 절대로 한 세력이 독자적인 권력을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고구려 같은 경우는 멸망할 당시까지도 중앙집권(中央集權)적 경향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권력다점주의(勸力多點主義)는 한 정권의 운명을 매우 길게 가지고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교(儒敎)가 정치적 이념으로 대두되면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고, 뚜렷한 계급질서가 운영되면서 새로운 방식 즉, 중앙집권과 철저한 신분제가 실시되는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고려에 들어오면서 철저한 신분제와 중앙집권적인 통치가 강화되면서 동시에 대외적(對外的)으로는 사대(事大)를 하는 풍조가 눈에 뛰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고려의 정신을 지키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런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받으면서 많은 타격을 받았다. 몽골침입 이전의 고려와는 다른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고려는 정치치제가 유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몽골 침입기에도 철저하게 유학적인 정치제도는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몽골행정관들은 고려의 그런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려의 정치가들을 혹독하게 비판을 하였다.

즉 고려의 지배계급들이 고려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을 하였다. 어떻게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는가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하였다. 그러면서 몽골은 고려의 노예제를 풀어 보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고려의 지배계층들이 완강히 저항하는 바람에 몽골인들은 그들이 추구했던 정책을 포기하였다.

  그러던 것이 고려후기에 고려인들 스스로 자아인식(自我認識)을 하면서 외세침략(外勢侵略)에 대한 저항을 국가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공민왕(恭愍王)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펴는 것이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하면서 불교를 내세우지만 이때 이미 고려는 고조선에 대한 의식이 점점 팽배해지고 있다. 이런 의식이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紀)』, 권근(權近)의 『응제시주(應製詩註)』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삼국유사』에 나타난 고조선건국 내력은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은 그동안 전승되어 내려오던 이념을 압축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려후기에 나타난 전통사상에 대한 응집력은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런 응집력은 조선으로 이어졌고, 그 절정은 세종(世宗) 때 나타났다.

  주지하다시피 세종의 정치는 모든 나라사람들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문자의 발명도 그렇고, 세제, 사람을 다루는 모든 법령을 전통사상에 입각하여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종은 역사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흔적을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에 그대로 남겨 놓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내용 중『단군고기(檀君古記)』에 나타난 기록은 한국사의 정통성을 그대로 압축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시대에 국운(國運)이 활짝 피었던 것은 바로 세종이 갖고 있었던 전시대의 고유전통 때문인 것이라는 것이 글쓴이의 생각이다.

  이런 전통은 성종(成宗)이 집권하면서 다시 철저한 유학정치가 시작되면서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대명률(大明律)』을 참고하여 만든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철저한 유학정치의 기본을 법률로 정해놓은 것이 되었다. 이 경국대전을 근거로 조선을 움직였고, 유학이라는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경국대전에 미진한 부분을 보충하여 주었다. 급기야는 전대미문의 사대주의(事大主義)가 시작되어 한국사상 돌이킬 수 없는 전통을 만들어 놓았다. 그 예로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는 기자숭배사상(箕子崇拜思想)은 픽션을 논픽션으로 만드는 일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조선 중기의 정신은 1592년 ‘조·일전쟁(朝·日戰爭)’으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면서 바뀔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한 은혜가 덧붙여져 오히려 더 고착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그 단적인 예가 ‘조·청전쟁(朝·淸戰爭)’의 결과였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치욕을 당하였다.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도 조선과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신하들은 명나라가 당하는 치욕에 더 힘들어 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가 흔히 역사적으로 충신이고 지사로 부르는 삼학사(三學士) 중의 한 사람이 인조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그들의 임금은 인조가 아니고, 명나라 황제임을 분명하게 표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유학적인 사고가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명이 멸망을 하였지만 많은 조선학자들은 명나라를 흠모하여 ‘만력(萬曆)’이라는 연호를 자의로 해석하여 명나라가 망한지 백년이 지나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

  이런 상황에서 18세기 이르러 이른바 실학자(實學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같은 유학자들 사이에서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즉 친명파(親明派)는 진정한 한국사의 시작을 ‘기자(箕子)’로 보는 것이고, 후자들은 ‘단군(檀君)’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차이는 사유체계정립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실학파들로 분류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자아의식을 분명하게 친명파들과는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명나라나 청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조선’을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사상은 당시 크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분명 훗날 큰 영향을 끼쳤다. 

5

  1910년 대한제국(大韓帝國)은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條約)’으로 대한제국의 황실주권(皇室主權)이 일본 황실로 이관(移管)되었다. 이에 대한제국민들은 결사항전을 해가며 일본과의 투쟁을 하였으나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자 대한제국민들은 바로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을 내세워 국체(國體)를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바꾸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국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체가 중국 상해시 프랑스조계에서 만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이다. 이 신생정부는 고조선의 건국이념으로 뭉친 결정체였고, 대일항쟁운동(對日抗爭運動)도 바로 홍익인간이라는 기본 이념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런 이념으로 대일항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오랜 세월을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도 외래사상을 갖은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홍익인간’ 이념 중시자들은 절대로 군국주의(軍國主義)를 중심으로 한 천황 1인 지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임정은 효율적으로 일본과 항쟁을 하였고, 결국 완전한 대한민국의 단독은 아니지만 ‘대일승전(對日勝戰)’이라는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임정의 대일승전은 48년 정부수립에 그대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라이름도 임정시기에 정했던 ‘대한민국’을 그대로 썼고 대부분의 정부요직은 임정출신들이 맡았다.

6

  5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전통시대에 벗어나 온 누리의 구성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수많은 국제조약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이름으로 협약을 맺게 되고, 국가발전이라는 당면한 현실에서 수많은 외국과의 교류를 해야 했다. 이런 과정은 자연스레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고, 그 결과 한국 전통의 많은 것을 알게 모르게 바꿔야했고 이를 버리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많은 성과를 거뒀고 오늘날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은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특히 80년대 후반부터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는 세계화라는 시대적 변화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이 세계화는 출발부터 잘못되었다.

  그것은 우리 중심으로 세계화를 할 것인가? 아니면 온 누리에 우리가 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충분한 협의를 하지 않고 세계화를 진행한 것이다. 이런 합의 없는 세계화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었고, 그 결과는 지금도 상처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90년대 중반부터 대한민국은 뼛속에 환부(患部)를 숨겨 놓은 현상유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다. 그 환부를 고쳐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처방을 못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과거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국가적 전성기를 맞이하거나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점에 다다르면 공통적으로 전통시대의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등장한다. 이 이념으로 모두가 뭉치는 것이다. 왜 뭉쳐지는가 하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안다. 지금이 그런 시기라 생각한다. 8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세계화속에서 우리의 주체성이 흔들려 버린 것이다. 지금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일본이 80년대 이래 계속 주저앉은 것은 세계 사람들은 고사하고 일본인들을 설득시키기 어려운 이념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이 없는 것이 있다. 한국 사람도 동의하고 온 누리 사람들이 모두 동의 할 수 있는 이념이 있는 것이다.

  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념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바라는 바이다. 이런 이념이 한국에서 시작되어 그 역사적 실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념을 실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시켜야할 것이다.
 
  이 이념으로 통일을 해야 하고, 세계 리더국가로 나서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지금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 스스로 뿐만 아니라 온 누리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민족이 될 것으로 본다. 이것이 국학(國學)이 현재 우리의 고민을 풀어주고 온 누리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