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은 한민족기념관과 공동으로 지난 25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라는 주제로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김동환 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국학의 개념 확립을 위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국학이란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학문으로, 우리가 우리학문의 가치관적 근간을 부를 때 일컫는 명칭이다. 남이 우리의 학문을 부를 때 일컫는 한국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나’라는 가치관적 자각에 의해 ‘나’라고 하는 것이 국학이요, ‘나’라는 가치관적 자각 없이 ‘너’ 혹은 ‘그’로 지칭하는 것이 한국학이다.”라고 밝혔다.

김 연구원은 “1950년대『WEBSTER』사전에 일본학(Japanology)과 중국학(Sinology)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만, ‘한국학(Koreanology)’은 아예 없다”며 “외국 사전에 국학이 없는 것은 일본과 중국의 학문적 고유성은 인정받지만, 한국의 학문적 고유성은 철저히 외면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는 “국학은 정신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학문적 기반이기 때문에 정신적 사회간접자본(SOC)이다”며 “중국이나 일본은 국가가 책임을 지고 국학을 이끌려가는데 반해 우리의 국학은 공공부문에서 방치된 지 오래고 민간부문에서조차 외면당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 김동환 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국학의 개념 확립을 위한 제언’을 주제로 발표했다.

[전문]

국학의 개념 확립을 위한 제언

1. 들어가면서

  “난, 우리 ‘걸림돌Albatross’ 이겨볼까 애쓴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된다. 더욱 때로 이 문제로 우리 식자들과 말 나눠보면 거의 다 나와 달리 생각한다. 이 ‘걸림돌’ 때문에 우리 뒤 떨어져 변두리 지엽문화로, 그리고 이젠 ‘동양검둥이’로 낙인찍고, 남 눈 밖에 난 걸로 아는데! 이 다 내 몸에서 난 부스럼Abscess인데! 나처럼 이런 느낌 없는 듯Analgesic, 남의 일로 아나 한다. 나와 다른 이런 사실Contrarian, 몸으로 느끼면서 애써 이 ‘걸림돌’ 내 식대로 가려Exegesis 풀이해 봤다. 그 속셈엔 이 ‘걸림돌’ 옳고 그름 차원 떠나 바람직한 우리 국가와 문화와 국학 갖추고자 해서다. ‘나 아니라도 언젠간 우리 걸림돌 누가 됐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아닐까요’ 내가 말 이렇게 하지만 내 맘의 갈등 지울 길 없다.

  이 말은 오랜 미국생활 속에서 비로소 국학이라는 말을 깨닫게 되었다는 량기백의 고백이다. 국학이라는 말을 생소하게 여기는 이유는, 중세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나타난 중화주의적 학문관과, 20세기 국권상실로 인한 일제식민지학문으로 나타난 패배주의 가치관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해방 후 득세한 서구 중심의 학문이론이 여과 없이 밀려오면서,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전반적 삶을 설계하고 논리화하는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국학이라는 단어는 익숙한 듯 생소한 말이다.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반응과도 흡사하다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막연히 아는 듯하면서 모르는 것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 이후 우리 사회 전반에 나타난 중화주의적 학문관과, 20세기 국권상실로 인한 일제식민지학문으로 나타난 패배주의 가치관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해방 후 득세한 서구 중심의 학문이론이 여과 없이 밀려오면서,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전반적 삶을 설계하고 논리화하는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광복을 이룬 후에도 주인의식을 통한 자주적 활로를 찾지 못하고 외세의존적인 가치활동이 지속된 것 역시 이러한 맥락과 연결된다. 따라서 창조적 학문 자세의 부재로 인한 자립학의 붕괴와, 모든 것을 수입학에 의존하려는 병폐 역시 이와 같은 정서에서 나타난 필연이었다.

  한편 동북아 삼국 중 일본은 이미 오랜 세월 전에 국가적 차원에서 국학의 총체적 의미를 정리했을 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문화적 시스템까지도 완성되었고 학문적 양산 상태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중국 역시 20세기 초에 치열한 국학 논쟁을 통해, 그 의미를 여과한 지 오래며, 1990년대 이후에는 유교를 중심으로 한 국학에 대한 국가적 합의를 마치고 추진․정립 상태에 들어가 전국적 시스템화하는 작업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다만 한국만이 국가적 차원이나 민간 차원에서 국학의 개념만이 아니라 그 범위나 실체․속성과 연관된 의미 규정마저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것은 한국에서의 국학 논리의 정립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즉 일본과 중국의 국학은 이미 국가적으로 합의 된 내부논리의 확산을 통해 외부논리에 대항하고 보편적 논리로서의 지향만을 향해 정진할 수 있으나, 우리는 지금부터 과거(국학의 개념 규정)와 현재(구성원들의 합의) 그리고 미래(보편적 논리로의 지향)와 싸우면서 국학논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학은 정신적 사회간접자본(SOC)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국학을 정신적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학문적 기반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간접자본의 특징이 다른 나라에서 제공받을 수 없는 서비스 등이 반드시 포함된다는 측면에서 보면, 다른 나라에서 제공받을 수 없는 정신적 재화나 방법론 등에 대해서 국학이 감당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그대로 도출된다. 이러한 인식의 기반 위에서는 국학을 민간부문에서 담당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이 국가가 책임을 지고 국학을 이끌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우리의 국학은 공공부문에서 방기된 지 오래고 민간부문에서조차 외면당한 상태다. 이러한 결과로, 우리의 정신적 사회간접자본을 다른 나라의 정신재(精神財)가 대부분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듯 중요한 가치가 국학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국학이란 용어를 사용함에 보수적 또는 국수주의적인 느낌으로 오해를 받음이 일반적 정서다. 학계에서도 이의 사용을 꺼리는 경향이 있어 한국학으로 얼버무리는 것 같다. 그러나 한국학이 학문적․개방적이요 국학은 비학문적․폐쇄적이라는 정서야말로 비학문적이요 감정적인 자세라는 점을 분명히 짚어두고 싶다. 또한 국학에 대한 왜곡된 정서를 교정하는 첫걸음 역시, 국학 개념화 작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제언하고자 한다.

2. 국학의 개념 확립을 위한 제언

  (1) 국학 개념화의 필요성

  국학을 외면하려는 현상은 우리가 우리로서의 논리를 주장하고 내세우지 못한 결과다. 더욱이 우리가 포기해 버린 정체성을 남이 앞서 세워줄 이유도 없다. “한국학의 정체성 확립은 인문학적 차원과 동아시아학적 차원의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학․일본학과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닌 한국학의 본질을 발현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서양에서의 한국학이 동양학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기는 하지만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하여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도 이와 맞물린다. 한국학과가 없이 동아시아학과 안에서 한국학 연구가 진행되기 때문에 한국학은 중국학․일본학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과 역시 우리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국학보다는, 학문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인 한국학이 득세해 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서양인에 의한 한국학은 19세기 후반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외교관․여행가 등에 의한 보고서, 항해기, 여행기, 그리고 때로는 한국에 관한 수준 높은 전문연구서를 통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은 한국의 언어․역사․종교․문화․관습 등에 많은 저술을 남겨 한국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요즈음 서양에서 한국학 연구가 큰 위기에 봉착해 있는 점이 안타깝다. 신자유주의의 파고 속에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학으로서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중국학이나 막대한 재정지원을 통해 위상을 키워온 일본학에 비하면, 견줄 것이 궁색하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학이나 일본학과 견주어 나타나는 정체성의 부족은 한국학 외면의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다. 한국학의 생존문제가 국제적으로도 그 정체성을 밝히는데 있음이 확인된다.

  우리 학계에서는 국학 내지 한국학 개념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해 왔으면서도 아직 그에 대해 누구나 합의 할 수 있는 명쾌한 정리가 이루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의 연구와 같이 국학의 정의를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양상과 이 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일체의 사상체계, 또는 학문의 지역적 대상을 한국으로 하고 그 중에서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에 속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학문, 그리고 한국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생산(곧 연구)하고 유통(곧 교육)하는 학술이라고 개념화시킨다면, 정체성과 차별성 그리고 연속성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막연한 감이 있고 주변문화의 아류 또는 모방이라는 멍에를 결코 벗을 수 없다고 본다. 더욱이 “한국 이해의 학문을 총체적으로 國學이라는 과거적인 용어에서 벗어 韓國學이라 함에 더 뚜렷한 의미 개념을 표시한다.”라는 주장에서는, 국학이라는 용어를 과거퇴행적인 명칭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국학을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민속․사상․문화 등을 연구하는 학문(우리나라에서는 국어․국문학․국사 등이 이에 딸림)이라고 말하는 개념 정의나, 자기 나라의 고유한 역사․언어․풍속․신앙․제도․예술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보다도 훨씬 애매하고 후퇴한 평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변방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가령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8년에 발간된 그의 책에서, 한국의 문학이나 교육체계․조상숭배 등 문화적 사유 양식이 모두 중국적 성격으로, ‘중국문화의 패러디’라고 규정하고 있고,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뒤, 라이샤워와 페어뱅크가 공저한 책(1960년 발간)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문화를 중국문화의 종속으로 단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1990년대 들어 문명사적 관점에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예견한 저서인 『문명의 충돌』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문명은 말하면서, 한국문명은 아예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이 역사가 흐르면서 오히려 퇴색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례로, 세계화 시대 속에서 우리 국학의 위상 정립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학의 의미규정을 정확하게 개념화시킴으로써 국학연구와 국학운동의 기본적인 걸음을 뗄 수 있다고 본다. 다양하고 모호한 사상과 가치가 혼재되어 있는 우리로서는 가장 먼저 시도해야 할 부분이 국학에 대한 가치 개념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2) Koreanology와 Korean studies

  국학이란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이 되는 학문으로, 우리가 우리의 학문의 가치관적 근간을 부를 때 일컫는 명칭이다. 남이 우리의 학문을 부를 때 일컫는 한국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즉 ‘나’라는 가치관적 자각에 의해 ‘나’라고 하는 것이 국학이요, ‘나’라는 가치관적 자각 없이 ‘너’ 혹은 ‘그’로 지칭하는 것이 한국학이다.

그 동안 객체적․수동적 시각으로의 학문에 익숙해온 우리 학계에, 국학이 아닌 한국학이라는 명칭이 자연스러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립적 학문은 무너진 지 오래고, 수입된 학문에 의해 타율적 학풍이 지배한 정서적 결과다. 따라서 우리의 가치관을 올바로 이것은 나의 나라를 ‘내 나라’라 하지 않고 ‘그 나라’라 칭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치 내 아버지를 부친이라 못하고 춘부장이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아니다. 국학은 한국학을 우리의 처지에서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가치에 근사할 수 있다. 또한 중국학자들의 분명한 지적처럼, 나라 사람(중국인)들이 자기학문을 일컬을 때는 ‘국학(國學)’이며, 외국인들이 중국의 학술을 칭할 때 ‘한학(漢學)’이라 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학은 영어로 ‘Koreanology’ 또는 독일어로 ‘Koreanologie’라고 하는데, 이집트 문화의 연구를 Egyptology라 부르고, 터키의 연구를 Turcology, 인도의 연구를 Indology, 중국의 연구는 Sinology, 일본의 연구는 Japanology라 부르고 있다. 더욱이 2백년 조금 넘은 미국학 역시 Americanology로 명명됨을 보면, Koreanology라는 용어가 결코 생소하고 특이한 용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영어의 접미사로 많이 쓰이는 ‘-logy(혹은 -ology)’라는 어휘는 사고․탐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log’에, 학문을 뜻하는 어미인 ‘-ia’가 붙어 ‘-logia’가 되며, 이것이 영어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logy’는 논리적․과학적 탐구를 하는 학문의 어미로 사용되며, 연구 혹은 학문적 기초(academic discipline)를 나타낼 때 많이 붙는다. 즉 지식의 토대(bodies of knowledge)를 나타낼 때 붙는 접미사가 바로 ‘-logy’다. 이것은 ‘Koreanology’가 한국학의 기초․토대가 되는 학문을 의미하는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지금 한국에서 수행되는 한국학에는 조선학(또는 국학)의 전통과 지역학으로서의 ‘Korean studies’라는 두 개의 흐름이 겹쳐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학이란 일제시대의 경성제국대학에서 ‘제국의 지식’으로 추구된 어용적 조선학이라는 제도적 학문과 이에 대응한 제도 밖의 자주적 ‘조선학운동’을 모두 아우른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학은 특히 후자인 ‘조선학운동’, 즉 한민족 위기에 대응해 성립한 학술운동에서 그 정통성의 유래를 찾는다. 이것은 우리 국학의 전통이 저항적 학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는 말로, 어용적 조선학과 대척점을 이루는 자주적 조선학을 구분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하에서의 자주적 조선학이란 명칭은, 우리의 정체성을 동반한 ‘Koreanology’로서의 의미와 근사한 듯한 표현이다.

  문제는 어떠한 경우든, 일제강점기의 조선학이라는 명칭에서 잃어버린 자기신원(自己身元)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주권을 강탈당한 현실에서, 국어가 조선어로, 또 국사가 조선사로 몰락 당한 경험을 직시해 본다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학을 조선학이라 할 수 밖에 없었던 배면에도, 이러한 주인의식의 상실감이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즉 ‘나그네(망국민)’로서 ‘나그네의 학문(조선학)’을 주창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일본이나 중국이 일본학이나 중국학이 아닌,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정체성(和魂洋材나 中體西用의 근간)을 세우고자 한 것과는 대비가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학만이 주창된 것은 아니다. 박은식이나 신채호가 처음부터 국학이라는 외침으로 우리의 고유성을 추구하면서, 주인으로서 주인의 학문을 세우고자 한 노력이 분명히 보여주었다. 먼저 신채호는 단군시대로부터 흘러온 정신을 국학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즉,

“夫餘․馬韓 等 十餘國의 이름을, 그 沿革을 찾으면 다 壇君 때부터 있던 稱號라. 後世에 國學이 끊어져 그 根源을 찾지 않고 다만 그 자취를 따라 이 이름은 이때에 나고, 저 이름은 저 때에 났다고 해 왔다.”

라는 기록이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사담체(史談體) 소설인 『꿈하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단군시대로부터 흘러오는 신교적(神敎的) 인물들을 열거함에 있어, 굳은 신앙을 보여 준 동명성제․명림답부, 밝은 치제(治制)를 행한 초고대왕(백제)․선왕(발해), 높은 이상을 펼친 진흥대왕․설원랑, 역사에 밝았던 신지선인․이문진․고 흥․정지상, 국문에 힘을 쏟았던 세종대왕․설 총․주시경, 육군(陸軍)에 능했던 태조(발해)․연개소문․을지문덕 등을 열거하면서,

“國學에는 비록 도움이 없지만 일방의 교문에 통달하여 朝鮮의 빛을 보탠 佛學의 元曉․義湘, 儒學의 晦齋․退溪….”

라고 서술함을 볼 때, 국학과 불학․유학을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옛 것을 지키려는 이는 漢文이 있음은 알아도 國文이 있음은 알지 못하고, 새 것을 찾는 이는 洋學이 있음은 알아도 國學이 있음은 알지 못하니….”라는 지적을 통하여, 양학(洋學)에 대비하여 사용한 국학의 의미도 분명히 하고 있다.

  박은식도 국학이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다만 그는 국학을 국교(國敎)․국어(國語)․국문(國文)․국사(國史)와 함께 국혼(國魂)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는 국혼과 국백(國魄)을 대비시키면서, 나라의 멸망은 국혼과 국백이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나라의 근본인이 되는 국혼은 쉽게 소멸하지 않는 속성을 가짐으로, 국혼을 굳건히 하면 국백이 일어나 광복이 될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박은식이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 설정한 국학이라는 말은 다른 하위 개념(국교․국어․국문․국사)에 비해 그 의미가 모호하고, 박은식 또한 국혼의 하위 개념으로서의 국학에 대해 뚜렷한 의미 규정이 없다. 다만 논리적 접근을 통해 정리해 보면 다음의 유추가 가능하다. 즉 동위 개념의 설정에 있어 의미의 상호 배타성을 고려한다면, 국어․국문․국사와는 다른 가치로써 국교와 중복되지 않는 철학․사상 혹은 풍속을 의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까닭에 신채호의 국학과 상통하는 박은식의 개념 용어는 국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이것은 신채호의 국학과 박은식의 국혼이 문(文)․사(史)․철(哲)을 토대로 한 우리 고유의 정신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최근 들어 한국학을 ‘Korean studies’라고 일반화하는 경향이 많다. ‘Koreanology’라고 부를 때에는 흔히 한국문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많고, ‘Korean studies’라고 하면 한국문화의 역사적인 면은 물론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도 포함하는 넓은 영역의 한국학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려 한다. 더욱이 ‘Koreanology’는 국수적․폐쇄적이요, ‘Korean studies’가 보다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명칭인 양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Korean studies’의 보편적 사용에 영향을 준 듯하다. 따라서 우리의 국학(한국학)을 영어로 표시함에 ‘Koreanology’를 부담스러워 하고 ‘Korean Studies’를 굳이 사용하려는 것도, 우리가 포기해 버린 우리의 학문적 정체성을 ‘Korean Studies’라는 표현으로 얼버무리려는 의미도 담겨있는 것이다. 한국학이 ‘Korean studies’로 쉽게 환원될 수 없다는 이유도 이것과 무관치 않다.

그 영문 명칭은 다 같지만 ‘국학’(예컨대 연세대 국학연구원) 또는 ‘민족학’(예컨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이라는 명칭이 한국학과 병용되는 관행이 여전히 살아 있음이 그것이다. 즉 중심 없는 한국학이 ‘Korean Studies’라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다. 한편 “외국에서는 한국에 관한 연구를 종합적으로 한국학이라고 한다”고 전제하면서, “국내에서의 한국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를 국학이라 하고, 국외에서 지역학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연구를 한국학이라고 한다”는 규정하는 것도, 너무 평면적인 규정임과 아울러 ‘해외 한국학’이란 동어 반복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1950년대 『WEBSTER』사전에 일본학(Japanology)과 중국학(Sinology)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만, ‘Koreanology’은 아예 없다. ‘Japanology’에 대해서는 ‘일본의 모든 것을 연구(the study of things Japanese)’하는 학문으로 기록하고 있고, ‘Sinology’에 대해서는 ‘중국에 대하여 다루는 조직화된 분야, 즉 그들의 문화․언어․문학 등(that branch of systematized knowledge which treats of the chinese, their culture, language, liturature, etc)’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1970년대에 나온 영영사전에도 ‘Koreanology’에 대한 설명은 없다. 먼저 랜덤하우스사전에는, ‘Sinology’에 대해서 ‘중국의 언어․역사․전통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고, 옥스포드사전에도 ‘Sinology'에 대해서 비슷한 설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두 사전 모두에서 ‘Koreanology’만이 아니라 ‘Japanology’라는 어휘도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1978년도에 출판되어 1982년 수정 제2판으로 나온 LONGMAN사전과, 1974년에 출판되고 1980년 제12판이 나온 HORNBY사전을 보면 ‘Sinology’에 대한 설명은 있어도‘Koreanology’와 ‘Japanology’에 대한 설명은 없다. 더 놀랄 일은 이 두 사전에는 아예‘Korea’에 대한 어휘도 실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일본의 영화사전(英和辭典)에도 일본학(Japanology)과 중국학(Sinology)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으나, 역시 한국학(Koreanology)은 없다. 이러한 설명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발간된 사전에도 그대로 답습되는 상황이다. 다만 한국에서 발간된 영한사전(英韓辭典)들에는 한국학을 ‘Koreanology’로 소개하면서, ‘Japanology’와 ‘Sinology’에 대해서도 각각 일본학과 중국학이라는 설명으로 실려 있다. 일본과 중국의 학문적 고유성은 인정받지만, 한국의 학문적 고유성은 철저히 외면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3) 朝鮮語와 朝鮮史가 주는 교훈

  주권을 빼앗겼던 시기, 우리의 국어와 국사가 조선어와 조선사로 전락한 아픔을 우리는 안다. ‘나’를 ‘나’라 못하고 ‘그’라고 칭하게 된 역사적 사례다. 1911년 8월에 공포된 이른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은 일제의 초기 민족말살정책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교육령 제2조는 ‘교육은 교육에 관한 칙어에 기초한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한다’고 하였고, 제5조는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전수하고 특히 국민다운 성격을 함양하고 국어(일본어-필자 주)를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다. 즉 이 조선교육령은 교육의 주체가 한민족이 아님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조선교육령」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제도화하고 그 방침을 천명한 것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은 조선교육령 반포 직전인 7월 1일 각도 장관 회의에서 훈시를 행하였는데, 이때 교육방침과 관련된 다음 사항은 조선교육령의 숨겨진 의도를 그대로 알려주고 있다.

一. 한국인을 일본 신민으로 육성하는 것을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一. 점진주의(漸進主義)로 한다.
一. 근로의 습관을 형성하도록 힘쓴다.
一. 보통교육 및 실업교육에 힘쓴다.
一. 국어(일본어) 보급을 도모한다.

  데라우치 조선총독은 조선교육령의 실시를 맞이하여, 그들의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의 취지를 들고 조선은 아직 내지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덕성의 함양과, 일본어의 국어의 보급에 힘써 일본천황의 충량한 신민(臣民)다운 자질과 품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유고(諭告)를 내린 것이다. 특히 마지막 항에 “국어(일본어) 보급을 도모한다”는 부분에서는 우리말이 나그네의 언어인 조선어로 몰락하고, 일본어가 국어의 자리를 차지하여 주인 행세를 하게 됨을 여실히 볼 수 있다. 비록 지금은 한글학회로 자리잡았지만은, 조선어학회란 명칭 역시 기분 좋은 이름은 아니었다. 1911년 국어의 자리를 일본어에 빼앗긴 수모 속에서, 국어학회란 명칭을 떳떳하게 사용하지 못한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본디 조선어학회가 1908년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를 모태로 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 후 1931년 1월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고 1949년 9월 명칭인 한글학회로 정착한 것이다.

  우리 국사의 몰락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역사교육이 결정적으로 위축되게 된 것 역시 1910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떨어진 뒤다. 일제는 수차에 걸친 조선교육령 등 각종 법령을 통해 우리의 역사교육을 압살해 나갔다. 당시 조선인의 교육을 일본천황의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따라 충성스럽고 착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을 본의로 했기 때문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1911년의 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당시 보통학교에서는 역사를 국어(일본어)과나 조선어과 안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국사는 바로 일본사를 의미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더욱 한국사의 말살에 혈안이 되었다. 고등보통학교의 경우 당초 교과과정 편성에서 주당 2시간의 조선사를 허용했으나, 1919년 12월 관련 규칙의 개정을 통해서 조선사를 제외시키고 1921년에는 일본사를 정식 교과과정에 편입하였다. 그리고 각급 사립학는 일본사를 정식 교과과정에 편입하였다. 그리고 각급 사립학교의 경우도 공립학교규칙에 준하도록 하였다. 당시 총독부 학무과장 유미게즈리(弓削幸太郞)는, 3․1운동의 최대원인이 조선인의 독립욕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없애고 마침내는 자기가 일본인이라는 관념을 갖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일제의 교육방침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 것이다. 한마디로 국사(일본사)의 자존심을 높이고 조선사의 열등의식을 고양하는 것이 그들의 방침이었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조선사의 식민지근성을 강조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즉 주인(일본사)과 노예(조선사)의 구별을 분명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만든 국사(일본사)에서 조선은 일본의 일개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거기에서 나타난 조선사의 모습은 정체되고 타율적인 역사로서 일본의 합병에 의해 그 본연의 지위를 얻고 문명화가 가능하게 되는 그러한 역사로 조작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사(노예의식으로 점철된 역사)에 대한 인식은 해방 후에도 청산하지 못한 멍에로 남아있다. 한마디로 국사(주인의식을 담은 역사)의 위상을 지금껏 세우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국사는 조선사로 전락한다. 주인의 학문이 나그네의 학문으로 밀려나는 순간이었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한 원로사학자가, 역사학도로 발을 디디게 된 소회를 적은 글의 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는다. 즉 소학교 4학년 때 일본어와 일본사를 국어, 국사라는 교과서로 공부했던 역사적 슬픔은 충격이었다는 고백이 그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국어와 국사가 조선어와 조선사로 몰락한 배경을 유추해 보면, 국학과 한국학의 차이 역시 분명해진다. 국학은 주관적․국수적 명칭이요 한국학은 객관적․개방적 명명이라는 논리 자체가 해괴함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국어․국사가 조선어․조선사로 되는 것이 객관적․개방적이 아님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정체성의 해체와 자아의 망실이 불러온 결과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국학을 구태여 한국학이라 명명하려는 배면에는, 자기신원(自己身元)을 망각한 ‘떠돌이 나그네의 심사(식민지의 노예근성)’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4) 일본과 중국의 국학 개념

  일본의 국학은, 전래의 기기(記紀)류나『만엽집(萬葉集』등, 고전의 연구를 통하여 일본 고유의 사상․정신을 연구하는 학풍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비롯한 유교의 고전과, 불경의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 경향을 비판하고, 일본의 독자적인 문화·사상 등의 정신세계를 일본의 고전과 고대 역사 속에서 찾으려 했다. 특히 일본의 국학연구의 시도는 ‘중국 정신을 말끔히 씻어내 일본정신을 견고히 한다(淸除漢意 堅固和魂)’는 기조에 있었다. 나아가 반중화문화적 성향을 보임은 물론, 심지어 중화문화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즉 일본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증강하자는 기치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국학의 배경에는 유학적 토대를 완전히 외면할 수 없다. 이시다 이치로(石田一良)가 말하는 일본 국학의 성립 배경을 보면 파악된다.

“도쿠가와(江戶) 후대에 들어와 국학이 흥기했다. 국학이 비록 카마쿠라(鐮倉) 시대에 일어나 무로마치(至町) 시대에 번성하여, 도쿠가와 초기에 이르러 유학(儒學) 연구에 나타나는 일본학(倭學)의 정신전통을 계승했다 하더라도, 실은 겐로쿠(元祿) 시대 후기에 유행한 유학계의 고학(古學) 부흥의 분위기와 그 문헌학 연구 방법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학설이다.”
 
즉 일본의 국학은 겐로쿠 시대 유학의 고학 부흥운동과 접맥되어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 국학은, 고학 부흥의 분위기를 타고 에도(江戶)시대에 발생한 학문으로써, 일본의 고대 정신을 토대로 일본의 고전을 문헌학적으로 연구하려는 학풍으로 정리된다. 그러므로 일본의 국학은 학문의 방법으로서는 실증적인 문헌학적 방법을 취하고, 인간관으로서는 감정과 정서를 중요시하는 주정적인 인간관을 취하였다. 주자학을 비판하고, 고대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면에서는 고학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으나, 고학자들이 중국 고대 성인의 정신을 이상으로 하였다면, 국학자들은 일본 고대의 정신을 이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또한 일본의 국학은 학자들에 따라서 화학(和學)․왜학(倭學)․황왜학(皇倭學)․고학(古學)․황조학(皇朝學)․황국학(皇國學) 등으로도 불리었다. 특히 신도학(神道學)으로도 통용되었음을 감안해 볼 때, 일본의 국학이 일본신도와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암시받을 수 있다. 신도는 본래 일본의 원시종교로, 한자를 차용하여 ‘神道’라 명명한 것이다. 일본의 신도는 외래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들어온 이후 줄곧 부용적(附庸的)인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와서 불교와 유교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이러한 신도의 발전이 일본 국학 탄생의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일본 국학의 인물사적 주요 흐름은 케이추(契沖)와 카다노 아즈마마로(荷田春滿)로 시작된다. 그리고 카모노 마부치(賀茂眞淵)․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히라타 아츠타네(平田篤胤)로 이어지면서 사상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케이추가 문헌학적 방법을 통해 국학연구의 실마리를 확립한 이래, 아즈마마로는 국학을 신도(神道)와 연관시켜 체계화하였으며, 마부치는 일본 고대가요인 『만엽집』을 통하여 일본 고대정신을 궁구하고자 했다. 특히 노라나가는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로써 국학을 집대성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그는 도(道)를 인간의 천성(天性)으로 파악하고,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이해했다. 또한 도는 위대한 신령이 만든 것으로, 천황의 조상신으로부터 천황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노리나가는 일반인들이야말로 천황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을 강조했는데, 국학의 최고 중심에 천황을 연결시키고 있음이 주목되는 것이다.

  후일 노리나가의 고도학(古道學)을 계승한 아츠타네에 와서 신비주의적이며 국수주의적인 국학으로 나타나는 배경도 이것과 무관치 않으며, 아츠타네에 와서 일본의 신도가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게 된 것 또한 우연치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국학을 이해하는 데는 신도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일본의 국학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사유 속에서 움튼 일본의 문화연구라는 점과 그 중심에는 신도가 굳게 서 있기 때문이다.

  중국 근대 국학의 등장도 일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주례(周禮)』의 「춘관(春官)」이나 『수서(隋書)』의 「백관지(百官志)」등에서 국학이라는 명칭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천자(天子)나 제후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에 체계적 개념으로서의 국학이 언급된 것은 20세기 들어서 일본의 영향이었다.

  본디 중국의 국학은 중학(中學)․국수(國粹)․국고(國故)․국고학(國故學)․고학(古學) 혹은 구학(舊學) 등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중학이란 말은, 청나라 말기 장즈퉁(張之洞)의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이란 구호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학(西學)에 대항하는 중국학술로서의 중학을 말한다. 국수란 말은 쉬디산(許地山)의 『국수와 국학(國粹與國學)』이란 책 제목과, 류스페이(劉師培)와 장삥린(章炳隣)이 주도한 『국수학보(國粹學報)』에서 연유한 것으로, 여기서의 ‘수(粹)’란 정수(精粹)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국고라는 명칭도 장삥린의 『국고논형(國故論衡)』에서 등장하는 말로, 여기서의 국고란 ‘중국구학(中國舊學)’이나 ‘중국의 장고(掌故)’라는 의미를 가진다. 장고(掌故)란 예로부터 굳어져 계속 전해 온 전례(前例)를 말하는 것으로, 고실(故實)이나 전고(典故)와 같은 의미다. 또한 국고학은 차오쥐런(曺聚仁)의 『국고학대강(國故學大綱)』에서 기인하는 용어인데, 과학적 방법을 통해 하나의 학적 계통을 세우려는 노력을 보였다. 끝으로 고학이나 구학은 서양의 철학․정치․윤리 등의 신학문을 번역함에 있어, 중국의 학술을 고학이나 구학으로 칭했던 것이다.

  근자에는 서양학자들의 중국에 대한 연구가 보편화되면서, 그들에 의해 중국학이 한학(漢學Sinology) 혹은 화학(華學)으로 칭해지고 있다. 또한 일본인들에게는 중국학 연구가 ‘지나학(支那學)’으로 명명되는가 하면, 한국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중국학(中國學)’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일부 국가에서는 ‘중국연구(Chinese Studies)’나 ‘동방연구(東方硏究Oriental Studies)’, ‘원동연구(遠東硏究Far East Studies)’라 칭하기도 한다.

  한편 근대 중국학자로서 일본의 국수보존운동에 최초로 주목한 인물은 황치에(黃節)와 량치차오(梁啓超)다. 황치에는 1902년 발표한 글에서 일본의 국수주의운동이 구화주의(歐化主義)의 반동으로 일어났다고 소개하였으며, 량치차오는 1901년에 이미 국수(國粹)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고 1902년 황쭌샨(黃遵憲)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민양성을 위해 국수보존을 중요시해야 함을 강조했다. 물론 량치차오는 문호를 개방하고 신학(新學)을 고취해야 한다는 황쭌샨의 답장 이후, 더 이상 국수(國粹)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치에는 국수보전과 국학의 고취를 잡지 『정예학보(政蘂學報)』의 중요 방침으로 정하고, 1905년 장삥린․류스페이․덩시(鄧實)․류야지(柳亞子)․첸커빙(陳去病) 등과『정예학보』의 뜻을 이은 『국수학보(國粹學報)』를 창간함으로써, 본격적인 국수보전운동에 나섰다. 다만 일본의 국학이 편협한 국수적 성격을 가졌다면, 당시 중국의 국학은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 중국 고유문화의 유산 전반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5) 국학의 개념 확립을 위한 제언

  문제는 우리의 국학에 대한 개념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다. 국학의 개념 정의 없이는 논리적 국학의 확산을 시도할 수 없다. 여기서는 일본의 편협한 국학이나 중국의 중화주의적 국학과는 무관한, 우리 순수국학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고민에서, 포괄적 국학의 의미와 함께 향후 세계화를 위한 창조적 국학의 정립도 가능하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찍이 백수 정열모는 국어․국사 연구를 중심으로 한 발전적 국학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개진한 바 있다.
 
“國學이라 하면 얼른 국어 국사를 연구하는 것으로 알지마는 실상은 국어 국사는 국학연구의 기초가 되고 入門이 되는 것이지 국어 국사가 국학의 전체는 아니다. 정치 문화 공예 심지어 의복 음식까지 모두 민족사상의 발로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국학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중략)…국학을 연구하는 것은 다만 옛 것을 찾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옛 것을 알아서 새 길을 찾고 아름다이 하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즉 국학이란 민족사상의 발로로써, 국어와 국사를 기초로 하여 민족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학문이라는 것과, 과거의 연구를 토대로 미래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온고지신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 나라를 알고 세계 각국의 민족을 이해하는 것도,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눈여겨 보아온 우리나라와, 같은 겨레로서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며 더불어 살아온 배달민족을 준거로 삼을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또한 세계의 중심에 우리나라를 두고 인류의 가운데에다 우리 민족을 설정했을 때,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인식 또는 인류 이해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국학의 시․공간적 범주의 제약은 정태적일 때 한계로 작용할 수 있지만, 이를 발전적으로 확대해 나갈 때는 오히려 생산적 의미로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에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순수국학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앞서, 먼저 ‘국학(國學)’이라는 단어에 나타나는 ‘국’의 의미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국학’이라는 말은 ‘국(國)’과 ‘학(學)’의 합성어로써, ‘국’이란 정체성을 내포한 국가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의 국가란, 조직체나 지역단체 혹은 통치권력단체나 최고단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영구적 단체라는 성격과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영구적 단체로서의 국가란, 단순히 현재의 국민뿐만이 아니라 선조(先祖)의 생명을 받고 후대 자손에게 그 생명을 전할 국민 전체의 결합으로 구성되는 통일체이며, 그 구성분자인 각 개인의 생명과는 다른 영구적 생활체를 영위하면서 독자적 목적과 의사를 갖는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학을 우리의 민족사를 관통․통섭하는 학문으로서의 고조선학․부여학․고구려학․백제학․신라학․발해학 나아가서는 고려학․조선학을 시대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학문이 되는 동시에, 공시적으로는 체제분단적인 학문, 즉 남쪽의 한국학이나 북쪽의 조선학(Koreanology)을 아우를 수 있는 통합학이 될 수 있다. 또한 국가적 단위를 넘어선 보편적 개념으로서의 ‘국학(각 국가의 학문National Learning)’이 한국이라는 특수한 개념으로서의 ‘국학(Koeanology)’으로 옮겨가는 근거 기준 역시, 이러한 국가 개념에서부터 가능할 것이다.

  한편 국학의 개념을 도출해 내는데 있어 국문학의 개념 설정을 원용해 보는 것도 방법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 국문학 의미 규정에 있어 순수국어와 한문의 혼재는, 순수국학과 광범한 국학의 의미 접경과 상당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문학의 개념 범주를 논함에 있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가 항상 문제가 되어 왔는데, 일찍이 가람 이병기가 우리 국문학의 개념을 정의할 때에도 순수한 조선문학과 광범한 조선문학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한 바 있다.

“순수한 조선문학이란 조선인이 조선말과 글로 쓴 순수한 문학작품(詩歌․小說․戱曲 等)을, 광범한 조선문학이란 조선인이 조선말로 쓴 광범한 문학작품(日記․紀行․書簡․傳記․傳說․說話․雜錄 等) 또는 조선인이 다른 나라말로 쓴 순수한 문학작품과 광범한 문학작품이다.”

  이러한 구분은 국학의 개념 정리나 속성 파악에도 시사하는 바 크다. 즉 국학의 속성상, 사상적․공간적․시간적 요소들을 고루 갖춘 국학을 순수국학의 의미로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안재홍이 협의(狹義)의 조선학을 ‘조선에 고유한 것, 조선문화의 특색, 조선의 전통을 천명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개념화한 것도 이러한 순수국학과 흡사하다.

  근대 중국 국학의 근간이 되는 국수의 이해에서는 정신적 속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황치에가 “국수란 국가 특유의 특별한 정신”(앞의 글,「保存國粹主義」)이라고 하여 정신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나, 허치헝(許之衡)이라는 인물이 국혼(國魂)을 내세우면서 한 나라의 국수 속에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강조한 것이 그것이다. 특히 허쉬웨이(許守微)는, “國粹란 精神의 學이며 歐化란 形質의 學”이라고 말하면서 중국의 국수를 서학(西學)과 대비시켜 설명했는데, 국수를 버리고 구화(歐化)를 받아들인다면 허수아비에게 비단옷을 입히는 것과 같아서 중국의 영혼(정신)은 없게 될 것이라고 역시 강조하고 있다.
  근자에 중국 인민대학 지바오청(紀宝成) 교수가 “국학은 중국 전통학술이며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라고 중국 국학을 개념화했는데, 이 또한 유교라는 정신을 중심으로 국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순수국학의 개념 규정에 있어도 많은 점을 암시받을 수 있다. 더불어 분과학문의 융합적 관점에서 한국학을 이해하려는 다음의 주장 역시 주목되는 부분이다.

“한국학의 개념은 흔히 한국의 어학․문학․역사․철학․문화, 나아가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인식된다. 그럴 경우 한국학의 의미는 이들 각 분과학문의 기계적 조합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각 분과학문을 융합한 한국학의 학문적 정체성은 확립되지 않았다. 각 분과학문 나름대로 연구의 심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해외 한국학에 응대하는 의미에서라도 이제는 한국학의 각 분과학문의 융합을 통한 한국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에 있다. ‘동아시아한국학’에서는 한국에 관한 어학․문학․역사․철학에 대한 심화된 연구를 바탕으로, 이를 융합하여 한국학의 방법론을 계발하고 문화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중국학․일본학․미국학 등 외국학과 구별되는 한국학의 내재성을 확립하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요소와 주변 정황을 통해 우리의 순수국학의 개념요소를 간추려 보면, 순수국학이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줄기로 하여 우리 민족사에 연면히 이어온 인문학적 사상(事象)이라고 일단 정리할 수 있다. 다만 광범한 의미에서의 국학은 외래적인 종교․사상․문화․풍습․언어․제도 등과, 정치․경제․사회․과학․예술 등의 타학문을 포괄하는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다. 즉 광의적으로는 우리 순수국학의 줄기에 녹아들어 자리잡은 모든 사상(事象)을 포함한 것으로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3. 나가면서

  세계는 지금 문명의 레토릭으로 어지럽다. 문명충돌이나 문명공존 등에 대한 말들도 결코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더불어 문화적 패권주의를 통한 영향력 확산이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기도 한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동북아 공동체 건설’ 역시 이러한 맥락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미국은 팽창하고 유럽정치연합은 연합전선을 견고히 구축하고 있는 반면, 아시아에서는 분열과 대립, 갈등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추후 문명권의 향배가 유럽문명권과 아메리카문명권 그리고 동북아문명권으로 엮어질 것임을 감안한다면, ‘동북아 공동체 건설’의 도래는 불가피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안보공동체와 경제공동체 뿐만 아니라, 문화공동체로서의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 질 것이다.

  유럽연합은 그 중심이 어떤 국가 되든 ‘Pax Romana’를 상기하면서 잃어버린 과거의 영화를 새롭게 꿈꿀 수 있다. 미국 역시 ‘미국 중심의 질서(Pax Americana)’를 보다 더 끌고 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듯하다. 중국은 과거의 ‘화이질서(華夷秩序:Pax Cinica)’에 대한 그리움을 새기면서 ‘신중화질서(新中華秩序: Neo Pax Cinica)’에 대한 야욕을 다각도로 노출시키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라면 일본 역시 팔굉일우(八紘一宇)를 표방한 ‘탐욕적 일본질서(Pax Japanica)’에 대한 나름대로의 계획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문화적 정체성이나 학문의 정체성에 대한 확인 문제는, 각 집단(국가나 민족)에 있어 선택이 아닌 필수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단일민족․유구한 역사․반만 년 문화민족 등의 추상적인 구호에 익숙해 있던 우리에게도, 우리는 누구며,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 왔고, 또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때다. 이것이 바로 국학의 필요성이며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나 학문과 관련한 주체적 인프라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특히 국학과 연관된 연구줄기는 끊어진 지 오래며, 그 개념 정리도 마련치 목한 상황이다. 외래학이 국학인 양 행세한 지 오래고, 우리 국학의 본모습을 알고 싶다는 외국학자들의 성화에도 묵언수행을 한 지 오래다. 하기야 수입된 학문사조나 방법론의 범람 속에서 우리다운 국학을 만들어 내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외래학으로 포장된 국학을 국학으로 내 세우기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국학은 그 집단의 학문적 정체성을 대신한다. 그것은 그 집단의 性情을 만들어 내는 감성학(感性學-美學Aesthetica)이다. 또한 상대적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이성학(理性學-論理學Logica)이다. 국학을 발견치 못하는 집단은 건강한 국가정체성를 가꿀 수 없다. 국학을 내세우지 못하는 집단은 창조적 세계학을 지향할 수 없다. 오히려 국가적 노예근성이 싹틀 수 있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혼돈기를 맞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잘못을 성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국학이라는 의미를 또 다시 생각치 않을 수 없다. 국학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 정체성의 논리요 외국에 대한 국력이론이다. 원심론(세계화론)을 위한 구심론(민족이론)임을 먼저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위기 때마다 정신적 단합요소로 작용한 것이 우리 국학이다. 우리의 역사를 역사답게 만들어 온 문화사의 정수이며 민족을 민족답게 지켜 준 정신사 고갱이가 국학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정리하고자 한 ‘국학 개념 확립을 위한 제언’은 이와 같은 노력을 위한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글의 논리에 많은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논리의 졸렬함에도 기꺼이 이 주장을 펴는 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듯하기 때문이다. 주변질서가 그것을 암시하고 있다. 더욱이 국학이 등장한 지 한 세기가 지났으며, 학문의 주권(主權)을 찾은 지도 60여년이 넘었다. 그러나 기존 학계는 너무도 많은 시간만을 헛되이 보냈다. 까닭에 그들이 하는 말이나 논리에 일일이 견주어가면서 숨고를 겨를이 없다. 화석화된 사고 논쟁으로 시비할 생각도 없다. 다만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기준이 무엇인가를 우선 세우려 함이 이 글의 의도였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