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원은 한민족기념관과 공동으로 지난 25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한국학을 넘어 국학으로' 라는 주제로 정기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국학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라는 주제로 “국학의 수난은 한말 일제하의 일제식민사학으로 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은 고려시대까지 살아있던 국학이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훼손되었다.”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오래도록 복간되지 못한 사실과 『규원사화』와『환단고기』가 끝내 간행되지 못하고 근대에 이르러서야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모종의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밝혔다.

그 이유는 세조 2년(1456)에 각도 관찰사에게 20권이 넘는 상고사 기록을 모두 압수한다고 명령한 수서령이 그것이다.

박 교수는 “이때 압수대상이 된 고기의 장서목록들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지만 이암의 『단군세기』를 비롯하여 이맥의『태백일사』에 수록된 고서가 다 그 안에 들어있었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하여 후손들에게 마치 원천석元天錫이 그랬던 것처럼 뜯어보지 말고 비장하라 일렀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25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국학원 정기학술회의에서 ‘국학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를 주제로 발표했다.

[전문]

국학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

 1. 머리말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전통적인 史書로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 3서가 있고 조선시대에 복간되어 공개된 사서였으나 『규원사화』와『환단고기』 2서는 조선시대에 공개되지 않은 비서로 사가에 오래 동안 묵혀 왔던 책이다. 근현대에 와서야 세상에 알려진 책이었다.

이 때문에 學界는 상고사를 인정하는 국학계와 인정하지 않는 한국학계로 갈라져 그 골은 매워지지 않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학계에서는 『사기』『유사』『운기』3서만을 眞書 또는 信書로 인정하지만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2서에 대해서는 僞書로 의심하고 있다. 그 현실적 결과는 학계 교육계 그리고 사회일반의 역사인식에 영향을 끼쳐 국론분열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해마다 10월 3일을 가장 중요한 국경일로 삼았으나 대통령이 행사에 나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으나 학계에서 이 고대5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모두 고려시대 후반에 집필된 동시대의 사서들이며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상고사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모종의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는 복간되어 공개되었으나『규원사화』와『환단고기』는 민가에 비장되어 조선왕조가 망한 뒤인 근현대에 복간 공개되었다. 그 자초지종부터 살펴 보고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기로 한다.

2. 사기(史記)와 유사(遺事)의 복간(復刊)

  앞에서 열거한 다섯 가지 고대사서는 모두 고려시대에 집필된 책들로서 그 원본을 읽을 수 없게 된 뒤 출간되었다. 『사기』와 『유사』가 조선 초 중종 대에 복간되었으나 그 과정을 살펴보면 우여곡절이 심하다. 두 사서 말미의 발문(跋文)에 보면 다음과 같은 사연이 요약되어 있다.

  우리 동방 3국에 本史(삼국사기)와 遺事(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오직 경주에만 있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다. (吾東方三國 本史遺事兩本 他無所刊 而只在本府) 그러나 경주에 남은 『사기』와 『유사』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훼손되어 해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에 그 完本을 구한다고 통고하였으나 4.5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다행히 성주목사星州牧使 권주權輳가 내게 그 완본完本을 구했다 하여 이를 간행하게 되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사기』와 『유사』는 영원히 읽을 수 없는 책이 될 뻔하였다. 그러니 후일 학자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이 책의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마시오.

  이 글을 남긴 분은 경주진병마절제사慶州鎭兵馬節制使 리계복李繼福이었고 복간한 시기는 1512년 조선 중종 7년(1512)의 일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저술한 해는 고려 인종 23년(서기 1145)이었으니 이계복이 『사기』를 복간한 것은 실로 300여년 뒤의 일이었다. 한편 일연의『삼국유사』는 『사기』보다 늦은 고려 충열왕 7년(서기 1281)에 집필되었으니 『유사』 또한 160년 만에 복간된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와 『유사』는 당시 우리나라 유일무이의 고대사서로서 매우 귀중한 책이었는데 왜 이 책이 방치되어 한 줄에 다섯 자 정도밖에 읽을 수 없는 고서가 되었을까. 만일 이계복이 두 책을 복간하지 않았다면 영구히 사라질 뻔 한 것이다. 간혹『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을 사적(史賊)라 매도하지만 그의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 역사는 머리 없는 괴물이 되었을 분명하다. 일연의 『유사』 못지않게 『삼국사기』에도 단군은 물론 단군 이전의 역사와 국학의 뿌리 (花郞道 風流道 皁衣仙道 등) 에 대해 귀중한 증언을 수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에서 시작하여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로 끝난다. 그 이전의 부여 삼한 고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외면하였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산국 이전의 역사가 빠져 있으나 실제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귀중한 기록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1) 신라는 고조선古朝鮮 유민遺民이 세운 나라

 『삼국사기』 첫머리 紀異 제1 신라본기에 보면 “일찍이 朝鮮 遺民(亡人)들이 산곡에 이주하여 여섯 마을을 이루어 살다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혁거세를 임금으로 모셨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신라를 건국한 사람들이 고조선의 유민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이다. 고조선 백성들이 고조선 이래의 고유종교 仙道를 믿고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고조선이란 위만 조선 기자 조선이 아니었다. 환인 환웅의 나라를 이어받은 단군조선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록이 중요한 것은 단군조선과 신라 그리고 선도와 화랑도의 연속성 그리고 선도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증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씨昔氏가 황금 수례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으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말을 믿었기 때문에 실제 역사가 되고 말았다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해설하였다. 그러나 조선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조상이 쌓았던 방식 그대로 서라벌에 도성을 쌓아 건국했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

  2) 삼국에 민족 고유의 선도문화仙道文化가 있었다.

  이것은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 백제에 민족 고유의 문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으로 삼국문화가 뿌리 없는 원시문화가 아니요 원본이 없는 복사 문화(更紙文化)가 아니란 사실을 증언 한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에 본시 현묘지도가 있었는데 그 속에 외래삼교가 다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삼국사기』는 최치원의 鸞郞碑 序文을 빌어 증언하고 있다. 즉 “옛날 이 나라에 고유의 현묘한 도가 있었는데 이름을 풍류라 하였고(昔有玄妙之道 曰風流). 그 실상은 유불선 삼교를 모두 포함한 도였고 그로서 민중을 가르쳤다.(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고 하였다.

  이 부분이『삼국사기』에서 가장 귀중한 기록이다. 옛날 고조선으로부터 이어받은 신라 고유의 선도가 있었고 그것이 儒佛仙 三敎를 받아들인 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도가 외래 삼교에 흡수당한 것이 아니라 외래삼교가 도입되어 기존의 선도문화에 흡수당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최근 『문명의 충돌』로 유명해진 미국학자 헌틴턴은 문화를 문화와 문명으로 이분하고 문명이 이동할 뿐 문화는 이동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신라가 받아드린 외래문화는 문명이었지만 그 문명마저도 이미 고조선에 기존한 문화였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또한 신라의 화랑도가 고조선에서 유래한 고유문화 즉 국학이었다고 증언하고 화랑이 신라의 국수였다고 증언하였다.

  화랑도의 무리는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道義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즐겼으며 山水를 노닐어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인품이 바르고 바르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들 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뽑아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래서 김대문이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신은 화랑에서 나고 좋은 장수와 날랜 군사도 화랑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화랑이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사실은 『삼국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가 망할 때 왕이 왕건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한 마의태자가 있어 무려 1천명의 화랑군을 거느리고 강원도 한계산성으로 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마의태자는 신라부흥의 의병장이 되어 싸우던 것이다. 신라의 화랑과 원화의 유습이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져서 화랑은 고려 때 삼별초가 되어 몽고침략군과 싸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이어 임진왜란 때는 권율장군이 지휘하는 호남의병이 되어 왜군을 무찔렀고 원화는 행주치마에 주먹밥을 담아 행주산성의 의병들에게 군량을 날랐다. 

  3)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세속오계世俗五戒는 고조선古朝鮮 유풍遺風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는 불교의 10계가 아니라 신라 고유의 오계였다. 貴山 등 젊으니까 원광법사를 찾아가서 일생의 훈계가 될 만한 가르침을 물었을 때 원광은 세속오계를 지키라 하였다.

  첫째 事君以忠 둘째는 事親以孝 셋째는 交友以信 넷째는 臨戰無退 다섯째는 殺生有擇이었다.

  귀산은 뒷날 백제와의 전쟁터에 나아가 선생(원광)께서 말씀하신 가르침 임전무퇴를 지켰다. 그는 “군사는 어찌 적군과 만나서 물러설 수 있는가”외치면서 힘껏 싸우다 전사하였던 것이다.

 4) 고구려 백만 대군이 중국을 침공하였다.

  최치원의 문집에 고구려(마한)와 백제(변한)가 전성기에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으로는 중국의 吳와 越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중국의 유연과 제 노를 괴롭혔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은 이들 두 나라를 큰 적으로 알았다. 특히 수나라는 요동에서 큰 타격을 두 나라에 받았다.

발해인 무예가 말하기를 “옛날 고구려가 강성할 때 강군 30만으로 唐에 항거하여 대적하였다.

4.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사기』보다『삼국유사』에 진귀한 기록이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유사』의 서두에 있는 고조선 조가 그것이다. 만일 이 부분의 원문이 훼손되어 읽을 수 없는 공란이 되었더라면 단군이고 고조선이고 선도문화고 할 것 없이 모두 없어 질 뻔한 것이다. 근대에 와서 아무리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나왔다 해도 한국사학계는 위서론을 한층 더 소리 높여 외쳤을 것이다.

  1) 환국과 단국의 역사

『삼국유사』에는 그 첫 머리에 고조선뿐만 아니라 단군 이전의 환인 환웅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모두가 다 아는 기록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昔有桓因 庶子桓雄 (1) 數意天下 貪求人世 (2)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 遣往理之

(1) 數意天下 貪求人世자효는 재가지효와 출세지효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2) 父知子意는 父慈子孝의 父慈에 해당하는 말이다.

熊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神檀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 等 凡主人間三百六十余事 在世理化

徒衆三千 一伯二師

  2) 이차돈이 순교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차돈異次頓은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순교자이다. 이차돈에 대해서는 『유사』는 물론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法興王(22대)과 그 다음의 진흥왕眞興王 (23대)은 二興이라 하여 불교를 공인하고 심지어 임금지리를 버리고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어 죽은 임금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두 임금은 조선시대의 세종대왕과 같은 명군이었다.

  어느 해 법흥왕法興王이 신하臣下들을 모아 놓고 크게 개탄하기를 ‘짐이 不德해서 世上이 어지럽고 뒤숭숭하다. 절(寺)를 지어 불교를 널리 布敎하면 나라가 달라질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모두가 큰소리로 반대하였다. 그때 末席에 앉아있던 이차돈이 일어나더니 “小臣의 목을 베어 증론을 정하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니 이차돈이 다시 “小臣이 저녁에 죽어서 내일 아침 이 나라에 불교가 행해진다면 임금께서는 영원히 편안하실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다시 물으니 모두가 “지금 佛敎를 公認하면 이상한 옷을 입은 중들이 이상한 木鐸소리를 내면서 돌아다니게 되니 나라가 망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차돈은 왕에게 말씀 올리기를 “지금의 衆論은 옳지 못합니다. 무릇 非常한 사람이 있어야 비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불사를 지어 불교를 공인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다수의 與論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이차돈을 감옥에 보내라 그리고 사형에 처하라”고 명하였고 衆議에 따라 이차돈의 목을 쳤다. 이렇게 해서 이차돈이 불교를 위해 순교하게 되는데 이차돈의 목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지 않고 하얀 우유가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들은 임금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興法寺라는 절을 지어 죽은 이차돈을 위로하였고 불교도 공인하였다.

  왕은 뒷날 왕의 옷을 벗어던지고 가사袈裟로 갈아입었고 절에 들어갔다고 한다. 왕비王妃도 비구니比丘尼가 되었고 다음 왕인 眞興王은 法興王의 뜻을 받들어 여러 곳에 많은 절을 짓고 불교를 널리 포교한 뒤 그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라는 佛敎의 나라가 되었고 신라를 이은 고려왕조도 500년간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俗名 金見明)은 法興王과 異次頓을 높이 평하기를 “아아! 이런 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신하가 없었고 이런 신하가 없었으면 이런 이차돈의 공이 없었을 것이다.”(嗚呼 無是君 無是臣 無是功) 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차돈의 순교가 훌륭하다 할 것이 아니라 왜 당시 신라의 관료들은 불교의 공인을 반대하였을까 하는 것이다. 신라에 아무런 고유종교가 없었다면 불교를 반대할 리 없었을 것이다. 선도는 당시 신라의 국교 또는 국학이었기 때문에 불교라는 외래문화를 반대한 것이다.

  어찌 되었건 후삼국을 통일한 왕 건은 신라의 화랑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고려 건국의 정신적 동력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의 선비 이인로(1152-1220)는 일찍이 신라가 화랑을 양성하여 나라 안팎을 튼튼히 하였다고 예찬하였다.

  계림의 옛 풍속에 화랑제도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화랑을 받들었다. 그 무리가 삼천여명에 이르렀는데 마치 중국의 전국시대에 각기 나라에서 선비를 양성하던 것처럼 신라도 뛰어난 자를 뽑아서 벼슬을 주었고 죽으면 비석을 세워 그들을 추모하였다.

5.『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오늘날 상고사와 선도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 『사기』와 『유사』 그리고 『제왕운기』등 3서만으로는 부족하다. 『규원사화』와『환단고기』를 아울러 연구하여야 완전하다. 그러나 이들 2서를 위서라고 단정하거나 대부분 위서일 것이라고 보는 한국사학자가 많다. 그러나 위서론에 대해 이렇다 할 의견을 내어놓은 학자는 많지 않다. 다행히 한영우 교수의 논문 「행촌 이암과 단군세기」이『행촌 이암의 생애와 사상』에 수록되어 있어 여기서 인용하기로 한다. 한 교수의 글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해 위서론과 진서론의 양극단을 절충하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한 학계의 현황을 살펴보는데 편리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규원사화』 전체를 검토한 것이 아니고 이암의 「단군세기」에 한하여 검토하고 있다.
 
  행촌 이암은 『환단고기』에 수록된 「단군세기」의 저자로서 고려 말에 문하시중을 지낸 대표적인 고려충신이었다.

  이암의 年譜에 의하면 1335년 39세의 나이로 천보산 태소암에 1년간 거주하면서 素佺이라는 奇人을 만나 환단시대의 역사를 논하고 「太白眞訓」이라는 책을 썼다. 「태백진훈은 『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동안거사 李承休가 강원도 삼척의 두타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쓴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이암은 이때 청평거사 이명과 휴애거사 범장을 대동하고 함께 素佺도인을 만나 소전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神書를 얻어 보았는데 모두가 桓檀시대의 眞訣이었다. 조선 숙종 때 인물인 북애의 『규원사화』에 의하면 이암과 함께 소전도인을 만난 이명은 그때『震域遺記』를 썼으며 범장 역시 『北夫餘記』와 『迦葉原夫餘記』(환단고기에 수록)를 집필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암의 조부 이존비(1233-1287)가 고려 최초의 성리학 수용자로 알려진 安珦(1243-1306)과는 과거 동문이었고 또 이존비는 『제왕운기』를 쓴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와도 교유하였다고 한다.

이암의 영향을 받은 성리학자로는 목은 이색(1328-1396)이 있다.
또 이암이 교우한 사람으로 백문보白文寶( ? -1374)를 들 수 있다. 백문보는 고려사 열전에 청백리로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고려에 하늘의 운수가 왔다고 예언한 학자로 유명하다.

  행촌은 48세 되던 충혜왕 5년에 왕명으로 강화도 참성단에서 함께 삼신에 제사 드리면서 “神은 인간에 의지하고 인간은 神에 의지하여 서로 의지함으로서 백성과 나라가 영원히 평안해진다고 하였다.

祭天은 궁극적으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암은 또 고려 충신 冶隱 吉再(1353-1419)와도 교우하였고 명나라 황제에게 동방에 최초의 군장 단군이 있었다고 한 權近을 잘 알고 있었으니 권근이 이암의 아들 李岡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서거정 또한 권근의 외손자였다. 

  한 교수는 이렇게 이암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소상하게 기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교수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600년이나 지난 뒤 한말 일제하게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공개된 것을 매우 불행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 교수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14세기 행촌의 학풍과 행적이 과연 600년을 뛰어넘어 후손들에게 전수된 것인가. 아니면 20세기의 애국지사 후손들이 600년 전의 조상을 더욱 애국적으로 보이게 만든 것인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그리 쉽지 않지만 아마 두 가지 질문에 모두 정답이 들어있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단군세기」의 저자가 과연 이암인가를 검토할 차례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현존하는 『단군세기』는 한 사람의 저술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책속에는 극히 현대적인 용어와 안목이 담겨져 있는가 하면 또 현대적인 창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고기』의 체취가 풍긴다. 현대적인 감각이 가장 많이 보이는 곳은 서문이다.

 『단군세기』의 서문은 역사를 통해 혼을 찾고 혼을 바탕으로 원(몽고)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救國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는 한말 일제시대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인 박은식이나 신채호와 같은 분들의 글을 연상시킨다. 더구나 世界萬邦이란 용어가 매우 현대적이요 三神一體 사상은 바로 대종교의 교리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의문은 高麗니 蒙古니 하는 용어이다. 공민왕 시대의 당시 사람들은 고려니 몽고니 하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더구나 원나라 간섭 기에 대신을 지낸 이암의 입장에서는 쓸 수 없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당초에 어떤 모습의 책이었을까. 지금의 『환단고기』에 실린 「단군세기」는 너무 현대적이다. 본래의 「단군세기」는 아마도 단군 47대 왕계표를 간단히 정리하고 여기에 단군이래의 三神信仰을 간단히 언급할 정도의 글이었을 것이다.

  한말 일제시기의 고성이씨 가운데 해학 李沂, 석주 李相龍과 같은 애국지사가 있어 그 민족주의 열정이 이암을 더욱 애국적인 인물로 아니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추앙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 교수는 「단군세기」를 모두 위서라고 판정하는 것을 반대하면서도 본래의 「단군세기」가 형편없는 한 책의 야사였을 것이라 추론하고 있다. 그리고 「단군세기」가 야사인 이상 오랜 세월 속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 내용이 상당 부분 부풀려졌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렇게 한말에 부풀려진 이암의 「단군세기」 내용은 화려하지만 고려시대 아임이 쓴 「단군세기」 원본은 볼품없는 야사로 단정하고 야사인 이상 진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도 많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가장 확실하게 후대에 가필된 부분으로 고려와 몽고란 말 그리고 세계만방이란 현대ㅣ어를 쓰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결국 결론부분까지 읽어 보니 한 교수의 단군세기론檀君世紀論은 몇몇 단어를 빌미로 한 위서론僞書論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편찬한 위서의 단서라 꼬집었다. 그러나 원시니 고려니 몽고니 하는 단어만을 빌미로 단군세기를 위서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세종 대에 나온 고려사의 색인을 보면 도처에 고려란 단어가 들어있고 몽고란 단어 역시 헤아리기 어렵게 들어있다. 고려사가 조선시대 책이라 하여 반박할지 모르지만 이암의 단군세기가 후대에 가필된 고기라 하면 고려와 몽고는 돌아 있어도 위서라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6. 여말 선초와『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앞에서 『사기』와 『유사』가 고려시대에 나온 책이어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 초에 이르러서는 전국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책이 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왜 『사기』와 『유사』가 그렇게도 일찍이 전국 어디에 가도 찾아볼 수 없는 책이 되어버렸을까. 그 원인과 배경을 찾아보면 거의 같은 시기에 집필된 『진역유기』(『규원사화』의 원본) 와『환단고기』가 왜 복간되지 않고 숨어버렸는가를 알 수 있고 그리고 조선왕조가 망한 뒤 근대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환단고기』에 수록된 「천부경」이 두문동 47현 중 한 사람인 農隱의 후손에 의해 오래도록 비장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려시대에 나온 책들인데 왜 조선시대에는 볼 수 없는 책이 되었는가. 한 마디로 말해서 금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기와 유사가 복간되기까지 고려왕조(34대 475년)가 망하고 조선왕조(27대 516년)가 들어섰다. 이것이 14세기 말(1392년)의 일이었다. 이 사건을 그리 큰 이변이 아닌 것처럼 기술되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읽어보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고 엄청난 정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와 그 추종자들이 왕조교체를 시도한 것은 단순한 易姓革命이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무시무시한 유혈혁명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시작되는 왕조교체의 전 과정은 이성계의 손자 세종대왕이『龍飛御天歌』를 지어냄으로서 크게 역사가 왜곡되었다. 穆祖에서 翼祖 度祖 桓祖 太祖 太宗으로 이어지는 여섯 마리 용(六龍)이 우리나라에 내려 와 天福을 누린 것처럼 기술되었으며 백성들이 이를 암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역사의 실상은 달랐다. 2천명이 넘는 고려왕족과 수많은 충신 그리고 애국지사들이 희생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麗末鮮初라 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적 정권 교체처럼 묘사하였으나 역사의 실상은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극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여말선초가 진시황의 분서갱유 못지않은 참극이었다는 것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참한 사건은 왕씨 일족이 예성강에 水葬되고 개성의 두문동에 숨은 학자들이 화장당하였다. 이 비극은 조선 영조 때까지 재평가 받지 못하였는데 그나마 동 두문동에서 죽은 무신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도 설원되지 않고 있다.

  여진의 침략과 몽고의 침략 그리고 왜구의 침략을 물리친 고려 말의 역사는 위대한 민족사의 한 단면이었으나 이성계 한 사람의 공적으로 재포장되어 왕조교체의 실상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서울 교외의 최영 장군 묘지에는 풀이 나지 않는 것이다. 고려청자의 사용은 금지되고 옷 빛깔까지 백색으로 바꾸게 한 여말선초의 비극은 상고사 왜곡의 어두운 죄악사까지 곁들여 나고 말았다.

세종이 편찬한 『고려사』에는 마치 고려왕조가 불교의 積弊로 인한 것처럼 기술되어 태조 이성계와 그 추종세력의 반역행위를 위대한 건국공적으로 정당화하였다. 이리하여 500년간 우리나라 역사관과 역사인식은 왜곡된 채 이어져 내려왔다.여말선초에 대한 역사 왜곡은 고려사에 국한되지 않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까지 미쳐 300년간 전국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는 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 세조(1455-1468)의 수서령(收書令)이 내렸다. 세조 2년(1456)에 각도 관찰사에게 20권이 넘는 상고사 기록을 모두 압수한다고 명령했다. 만일 이 어명을 어기고 책을 감춘 자는 참형(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1910년의 경술국치직후에 일제가 강행한 20만권 국사 분서정책 못지 않는 만행이었다. 세조의 수서령은 실지원국(失志怨國)의 고려충신들에 대한 철퇴였다. 이때 압수대상이 된 고기의 서목들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지만 이암의 『단군세기』를 비롯하여 이 맥의『태백일사』에 수록된 고서가 다 그 안에 들어있었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하여 후손들에게 마치 元天錫이 그랬던 것처럼 뜯어보지 말고 비장하라 일렀던 것이다. 이계백이『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복간한 것은 그보다 50여년 뒤의 중종 7년(1512년)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계복은

  무릇 선비라면 온갖 나라 역사에 대해 널리 알아야 하는 것이거든 하물며 이 나라에 산다는 선비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라고 개탄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기』와 『유사』두 사서는 모두 구 왕조 고려시대의 사기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감히 읽을 수 없는 불온 史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의『진역유기』를 읽고 『규원사화』를 쓴 북애(北崖)는 17세기 숙종 때의 사람이었으나 저자 이름을 밝히면서 책을 쓰지 못한 것을 볼 때 수사령의 후유증은 숙종 때까지 수백 년 간 사라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무릇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배반을 당하며 재물로서 사람을 쓰고자 하는 자는 그 재물이 다하면 가게 되어 있다. 번쩍하는 순간에 천년 역사가 오가는 것인데 어찌 백골만 남는 인생에 있어서 명예와 치욕을 위하여 다투랴.

 이것은 이계복이 누구를 두고 비판한 것일까.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말은 규원사화의 서문에도 이어져

  내 말하거니와 조선에 국사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걱정이다. 우리나라에 옛 經史가 여러 번 병화(戰禍)를 입어 흩어지고 없어졌고 또 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모두 漢籍에 빠져 事大主義만을 옳다 하였으나 먼저 그 근본을 세울 줄 몰랐고 내 나라를 빛낼 줄 몰랐다.(不知先立其本 以光我國)

고 하였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사기』와 『유사』처럼 조선시대에 복간되어 햇빛은 보지 못하고 조선왕조가 망하고서야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북애의 서문이 꼭 구한말 근대에 쓴 글이라 보는 것은 편견이다. 다시 읽어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강원도 오지에서 우연히 淸平의 『진역유기』를 발견하고 모든 과거시험을 포기하였다는 말도 거짓이라 할 수 없다.

  내 일찍이 國史를 써보고자 하였으나 나라 안에 볼만한 자료가 없었으니 名山石室에도 珍藏된 것이 없었으니 어찌 하랴! 그러나 다행히 峽中에 淸平이 저술한 『 震域遺記 』속에 三國이전의 古事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얻어 보았으니 비록 그것이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나 지은 이의 士氣가 萬丈하였다!

7. 소전素佺과 참전계경參佺戒經

  여기서 우리는 『규원사화』를 쓴 북애가 강원도 오지 청평에서 『진역유기』를 얻어 보았다는 말과 이암이 북한강 상류 소양강가청평사에서 소전(素佺)이란 도사를 만나 「삼성기」「단군세기」등『고기』를 발견하고 필사하였다는 말이 서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전이란 누구인가. 소전은『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참전이었다.

  고구려의 名宰相 을파소(乙巴素)는 젊은이들 가운데 영준(英俊, 꽃같이 아름답고 뛰어난)한 자를 뽑아서 선인도랑(仙人徒郞, 道令)으로 삼았다. 그들의 敎化를 맡아보는 교사를 참전(參佺)이라 하였고 무예를 맡아보는 자를 조의(皁衣)라 하였다.

  홍만종의 『해동이적』에 보면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이 본시 선인이었다고 한다. 신라에 화랑이 있었듯이 고구려에도 선비(조의)가 있었고 백제에도 수사修士라는선비가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삼국의 보배 즉 國粹였다. 그런데 고구려의 선인도랑 가운데 武藝를 맡아보는 조의선인이 있고 文藝를 맡아 교육하는 參佺이 있었다. 신라의 화랑도에도 무사를 전문으로 하는 화랑과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문사가 따로 있었다고 하니 삼국이 모두 같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의선인이나 참전에게는 엄한 계율이 있었으니 “사람이 하늘을 대신하여 공업을 이루어야 한다.”(代天行功)는 것이다. 이것이 神市理化의 이념이었으니 을파소의 말을 빌리면

  “神市理化의 世는 萬代를 지내도 변하지 않는 표준 즉 이념(神市理化之世萬世不可易之標準)이었다.”

  신시이화란 곧 환웅이 태백에 세운 나라 배달국의 규율이었다는 것이다. 이 규율을 민중에게 가르치는 교사가 바로 참전이었다.

  참전(參佺)에게는 계율이 있으니 그것은 민중에게 신을 가르치는(神以化衆) 것이다.

  사람에게 神을 가르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뜻이고 이것을 일명 한맹(寒盟)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맹은 결코 어길 수 없는 계율인데 그것은 곧 인간이 하늘을 대신하여 공업(功業)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맹(皁衣)의 계율은 하늘을 대신하여 공업(功業)을 이루는 것(代天行功)이며 이는 스스로 마음을 정하여 뒷날의 공업을 위해 힘을 기르는 것(自立心作力備後功)

이라고 하였다. 즉 성통공완(性通功完) 한다는 뜻이다.

8. 맺는말

  이상의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려시대의 두 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오래 동안 방치되었다가 조선왕조 중종 때에 가서야 복간되어 자칫하면 없어버릴 뻔 한 사실을 말하고 『유사』는 물룬 『사기』에도 귀중한 상고사와 선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단군 이전의 환인과 환웅시대에 관한 정보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어 두 사서에 이르러서야 6천년 민족사가 들어나게 되고 비로소 한국사가 아닌 국사가 성립된다.

  흔히 국학의 뿌리가 잘리고 머리 없는 한국사가 정설이 된 것은 한말 일제하의 일제식민사학으로 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은 고려시대까지 살아있던 국학이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훼손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오래도록 복간되지 못한 사실 그리고 『규원사화』와『환단고기』가 끝내 간행되지 못하고 근대에 이르러서야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모종의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학은 고려시대 말까지 건재하고 있었으나 조선 500년간 특히 조선 후기에는 단군조선 이전의 상고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못하게 금지되었다. 명이 망하고 청이 중국을 지배하게 된 뒤에는 약간 해금되어 일부 실학자들이 상고사에 언급하였으나 완전히 해금된 것이 아니었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가 일부 공개되어 상고사와 민족 고유문화에 대한 서적이 나왔으나 일제의 탄압이 기다리고 있어 또 다시 침체의 늪에 빠졌다. 1945년 해방과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상고사 연구는 다시 한 번 해방의 나래를 달았으나 한국학과 외래종교가 이를 막아 다시 한 번 이 나라에 제2의 소전이 나타나 국학 부활의 국풍이 불기를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