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령 당시 고구려지킴이 온라인 팀장.

 

2003년 겨울, 충남 천안에 국학원 전당 개원을 앞두고 홍보팀은 전시관 준비에 한창이었다. 중국이 유네스코에 고구려 유적을 자국 유적으로 등재하려 한다는 제보를 받았다. 개원 준비로 바쁜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국학원이 나서야 할 때”라는 결론에 따라 전원이 이를 저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유네스코 등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파리 예비회의가 1월에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홍보팀 장예령 씨가 맡은 업무가 온라인 홍보였다. 당시 국내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고 정부도 나서지 않는 상황이라 빠른 시일 내에 국민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선 인터넷이 중요했다. 장 팀장은 급히 국학원 소개와 동북공정 설명, 동북공정저지 서명 페이지로 만든 간단한 국학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누리꾼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국학강사들처럼 동북공정을 알리고 서명을 받기위해 거리로 나섰다.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장 팀장은 “이런 심각한 일이 어떻게 소리 없이 이루어지겠느냐? 혹시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려는 사기꾼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는 달랐다. 먼저 10대 청소년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고 자발적으로 정보를 알려나갔다. 언론은 이를 ‘성급하고 감정적인 대처’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전화위복이 되었다. 오히려 30대 누리꾼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어 20대 누리꾼이 참여하면서 열기가 급속히 확산돼 나갔다. 하룻밤 자고 나면 수천 명이 동북공정 저지 서명을 하러 홈페이지에 방문했다. 홈페이지를 개설한 지 열흘 만에 급기야 ‘국학원 홈페이지’가 방문자 과다로 다운 되는 등 누리꾼들의 호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시스템이 안정적인 포털사이트에 별도의 온라인카페를 열면서 정한 이름이 ‘고구려 지킴이’였다. 누리꾼들이 모여들어 매일매일 동북공정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퍼 날랐다. 그녀는 “새벽에도 동북공정을 알리면서 자신의 체험, 소감을 카페에 올리는 누리꾼의 글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이런저런 일을 하자고 미션을 카페에 올리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며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항의하는 고구려 지킴이들.

 

‘ICOMOS의 심사위원들에게 고구려 역사의 진실을 타당성 있게 알리기 위한 항의메일을 보내자.’는 을지문덕 프로젝트를 발표했을 때 번역가 이명진 씨(당시 29세)가 영어로 번역한 글을 카페에 올렸다. 그러자 대학생, 대학원생들이 불어, 러시아어로 계속 올려주었다. ICOMOS 위원의 이메일 주소를 찾아 올려준 누리꾼들도 있었다. 결국 카메룬의 모하드 하만 위원이 “모르던 사실을 알았다. 메일의 내용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증명할 자료를 더 보내 달라.”는 호의적인 답신을 보냈고 예비회의의 판도가 달라졌다.

장 팀장은 당시 어렸던 고구려지킴이들이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도 찾아온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도 그때를 말한다. 우리나라를 지킨다는 마음으로 밤을 새웠어도 좋았다고 아직도 그리워한다.”며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DNA 속에 기본적으로 애국심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행복한 미소를 보냈다.

고구려지킴이에서 활동한 청소년들은 이후 온라인 '사이버의병'으로서 세계국학원청년단과 함께 활동했다. 3대 국경일인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에 태극기 몹을 하고 젊은이들이 재기 발랄한 애국 UCC를 만들어내 누리꾼들의 화제를 모으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제는 국경일에 누리꾼들이나 포털사이트에 태극기를 다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었다.

<국학신문 1월호 3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