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3년 심수관 가문은 신성한 ‘해신의 바위 ‘위에 ‘쿄쿠산신사’를 세우고 4백여 년 동안 국조 단군 제사를 지냈다.

일본 남쪽 큰 섬 규슈의 먼 끝자락 카고시마(鹿兒島). 여기 카고시마 남녘 푸른 물결 속에 만(灣)을 이룬 바다 한가운데로 오늘도 쉼 없이 불길을 뿜는 화산섬 사쿠라지마가 장관을 이룬다.

필자가 지난 12월 5일에 카고시마 중앙역에서 30분 거리 작은 시골정거장 이주인(伊集院)역을 찾은 것은 저명한 도예가 14대 심수관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에 의해 강제로 일본 규슈에 끌려온 도공 심당길의 까마득한 후손이다.

금년 85세의 노옹(老翁)은 손을 덥석 잡으며 한국에서 단군 연구 학자가 온 것을 몹시 반가워했다. 그는 서울에서 단군을 모시는 사직단을 참배했었다며 ‘국조 단군님은 잘 모시고 있는지’ 안부부터 물었다.

필자가 “제가 있는 대학원의 뒤편, 한민족역사문화공원(충남 천안)에 33미터의 웅장한 국조 단군상이 우뚝 서 계시다.”고 하니 심수관 옹은 금세 불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기뻐했다. 그는 꼭 찾아가겠다며 새하얀 둥근 떡, 가루캉을 차와 함께 내왔다. 먼 고향 땅이 그리워 한국의 시루떡처럼 즐겨먹으며 조상 제사에 올린다는 이 떡은 한국어로 ‘가루 떡’이라는 뜻이었다.

도예가 14대 심수관 선생(사진 왼쪽)은 한국에서 온 단군연구 학자인 필자를 매우 반가이 맞으며 전통 가루캉을 대접했다.

도쿄 명문대인 와세다 대학 정치과를 졸업하고도 조상의 발자취를 지키기 위해 젊은 날 학문보다는 부조(父祖)를 이어 그릇 굽는 도공의 길을 택했다는 심 옹. 그는 젊은 날 단군 사당을 모신 이곳 카고시마땅 미야마(美山) 본가 가마터로 내려왔었다.

임진왜란때 끌려온 도공 심당길 ‘사쓰마아키’명품 만들어 가문 대대로 계승

일본 도예의 고장으로 소문난 미야마 지역은 심수관 가문의 도예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본 ‘사쓰마야키 도기’의 본 터전이다. 이 문중이 이른바 ‘노보리가마(登窯)’에서 구워낸 그릇이 바로 귀족용의 흰 도자기인 시로사쓰마와 일반인을 위한 검은 도자기인 쿠로사쓰마이다. 그러므로 심수관 가마터를 보지 않고는 미야마 도요지를 방문했다고 할 수 없다. 이곳에서 4백여 년 동안 이어온 역대 명장의 도예 명품이 전시된 수장고도 견학할 수 있었다.

초대 도공 심당길은 경북 청송 땅에서 1599년 사쓰마 번주(藩主)였던 시마쓰 요시히로에 의해 카고시마로 끌려왔다. 선대부터 고려청자, 조선백자에 심취한 요시히로는 그에게 이주인향(伊集院鄕)에서 도예가마터를 운영케 했다. ‘나에시로가와야키’라는 명산품을 만든 심당길은 또다시 번주의 명령으로 뛰어난 도공 박평의와 함께 백토로 구운 ‘사쓰마야키’라는 명기(明器)를 만들어 대대로 계승했다.

크게 기뻐한 번주는 1673년 3대 심수관에게 “미야마 산위에 단군의 태양이 내려왔다니 그곳에 단군 사당을 지어 제사를 모시면서 더 훌륭한 그릇을 구워내시오.”라고 격려했다. 도예명가 심수관가에서 미야마 산언덕에 세운 단군사당은 평양의 옥산묘에서 이름을 따온 ‘교쿠산신사(玉山神社)’라 불렸다. 그해가 심당길이 끌려 온 지 74년째 되는 해였다.

이곳의 유래에 대해 심 옹은 “1673년 새해 첫날 밤 한국 쪽 바닷가 하늘에서 미야마 산 위로 시뻘건 불덩어리가 내려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점술사를 불러 물었더니, 조선 민족이 역사상 존숭하여 온 신령이 내려오신 것이라 했답니다. 그래서 길일을 택해 아직도 불기가 넘치고 있는 산위로 올라가서 내려앉은 신성한 ‘해신(日神)의 바위’ 앞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 위에 사당의 전각을 세워 그해 8월 14일(음력)에 준공된 것이죠.”라고 설명했다. 번주 시마쓰 가문에서 단군의 보살핌 속에 도자기를 훌륭하게 구워낼 것을 소망하여 사당을 지어준 것이다.

심수관 옹이 손수 보여준 고문서 <옥산궁 유래기> 서두에는 “교쿠산궁은 본래 조선조를 개국한 단군을 모신 사당이다.”라고 한민족 단군 민족사의 발자취가 밝혀져 있다. 필자는 쿄쿠산신사 사당 정면에 매달린 큰 방울을 힘껏 흔들어 소리 내고 단군 신주 앞에 두 손 모아 머리를 깊이 숙였다. 이역 땅에 끌려오고도 끈질기게 국조의 제사를 모셔왔다는데 심수관 가문의 숭고한 조국애에 가슴이 마냥 후끈거렸다.

신성한 해신(日神)의 바위 위에 국조단군 모신 사당세워 4백년 이어와

사당 밖으로 나가 건물 뒤편 아래쪽을 두루 살폈으나 큰 바위에 가려 신성한 해신의 바위는 전혀 노출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젯밤까지 내렸던 비가 말끔히 갠 오후, 미야마의 신선한 공기를 흠뻑 마시며 단군의 보살핌으로 쿄쿠산신사에 참배를 무사히 할 수 있었다는 기쁨이 가슴에 물결쳤다.

심수관 선생은 “저는 사당 밑의 해신의 바위를 두어 번 보았습니다. 정월 초하룻날과 춘분, 추분에 제수를 마련해 단군님께 제사를 올립니다. 이 지역의 학생이며 주민들은 모두 이곳에서 단군님께 입학시험 합격도 빌고 가내 평안과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라며 흐뭇해한다.

또한 노옹은 “단군님 덕분에 제 아들도 도쿄의 대학을 마친 뒤 이곳에 내려와 제 뒤를 이어 그릇을 굽고 있습니다.”라며 단군 성조를 모시며 가업을 계승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15대 심수관(大迫一輝, 오사코 카즈키)씨도 벌써 연세 50줄에 들어섰다. 심수관 가문은 대대로 ‘심수관’이란 이름을 이어받고 있다.

앞으로 규슈 카고시마를 여행하는 많은 한국인이 교쿠산신사를 참배하게 될 것을 염원하며 산길을 내려오는 마음이 마냥 푸근했다.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홍윤기 석좌교수

<국학신문 5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