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개국 역사는 곰과 호랑이 숭배하는 맥·예 부족이
쑥과 마늘 먹던 환웅집단에게서 제철 기술 전수받는 과정

일본 학계의 모호한 해석으로 문제가 있던 만엽집을 고대 한국어와 이두로 새롭게 풀어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또 하나의 만엽집>을 들고 있는 이영희 교수.

한국과 일본의 고대어와 이두를 연구하고 한· 중· 일 사서, 설화 향가집 속에 숨겨진 대단히 역동적인 동북아 고대사를 밝혀내는 이가 있다. 바로 포스코 미래창조아카데미 이영희 교수(80세)이다. 이 교수는 한국일보에서 21년간 근무한 베테랑 언론인이자 유명한 아동 문학가이며 시인이다. 또한 국사 청문회와 한일 역사교과서 분쟁에도 참여한 11대 국회의원이었다. 이 교수가 들려준 우리 역사와 고대 한일관계이야기는 서로 맞물리지 않아 버걱거리던 열쇠와 자물쇠가 비로소 맞아떨어져 ‘철컥’하고 열리는 통쾌함을 준다.


 지난 12월24일 포항 포스코로 이영희 교수를 찾아갔다. 80세라는 연세에 비해 건강하고 강단 있어 보였다. 이 교수의 연구실에서 한국과 일본 고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당초 오후 2시부터  2시간 예정했는데 저녁식사를 하고도 한참 이어졌다. 다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저녁 10시, 무려 8시간 넘게 이 교수는 한일 고대사 이야기를 했다.

  
고대에 ‘철기 문화’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규모 농사는 필연적으로 철기 생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소유욕, 권력욕과 함께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식량 걱정에서 벗어나 여유로워진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학문과 사상을 탄생시켰다. 한편 끊임없이 땅 먹기 전쟁이 전개되어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흥망성쇠를 되풀이하게 되었다. 철기를 사용하면서 역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철기시대의 개막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례는
우리나라 개국시조를 보면 유난히 알에서 태어난 왕이 많다. 고대의 제철은 강에 흘러내려 오는 사철과 사금을 녹여야 했는데 고대에는 사철 알갱이를 ‘알’이라 불렀다. 강 주변, 특히 S자로 휘감기는 삼각주, 즉 초사흘달 지역에 도읍을 정한 것은 사철이 쌓이기 좋은 지형인데다가 고대 제철 기술상 엄청난 물과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박혁거세를 예로 들면 거세는 ‘무쇠 거르기’란 의미이다. 제철 원자재를 확보하는 책임자이자 제철 왕이라는 뜻이다. 주몽, 남해왕, 김알지, 석탈해 등 수많은 왕의 이름 속에는 제철 관련 용어가 있거나 제철 관련 행적이 포함되어 있다. 첨단 제철기술을 가지고 나라를 지킬 힘과 경제적 부를 차지한 자가 백성의 신망을 얻고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철기시대는 언제부터인가

이 교수는 한국문화대백과사전의 오류를 지적했다.

'한국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서기 전 3세기경 연나라로부터 들여와 서기 전 1세기부터 철기를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같은 책 연보에는 서기 전 700년경 철기문화가 시작됐다고 써 동일한 책 내에서도 모순된다. 윤내현 교수가 철기유물 출토지를 소상히 밝혀 기존 학계의 정설을 무너뜨리고 서기 전 10세기까지 끌어올렸다. 일본 북 규슈에서는 서기 전 3, 4세기 남한의 철기인 도끼가 발굴되었다. 그런데 서기 전 7세기경 제나라 관중이 쓴 중국 고서 <관자>를 보면 치우천황이 철 생산을 위해 삼림을 철저하게 가꾼 식목정책이 소개돼 있다.

환웅시대부터 벌써 제철법이 발달했다는 것인지
맞다. 고조선 개국역사는 곰 토템을 가진 맥족과 호랑이 토템의 예족이 쑥과 마늘을 즐겨 먹던 환웅집단에게 첨단 제철법을 전수받고자 했던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 중 하나가 도구 사용이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는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제철법의 전수도 그 의미의 하나이다. 고대 제철 가마에서 작업하려면 사흘 밤낮을 일하고 숯을 넣고 빼는 날짜 등을 살펴보면 ‘동굴, 3·7일, 100일’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기존 사학계에서는 단군 역사도 인정치 않는데
1980년대 초·중학교 교과서에 고조선 개국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이라고 기재했었다. 국회의원 시절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기성 사학 교수들에게 “단군조선의 개국이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냐? 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실은 이유가 뭐냐?”고 질타한 바 있다. 결국 유물 발굴과 과학적 접근을 통해 진실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가 일본에 전파된 제철술이라고 했는데.
연오랑·세오녀는 일본에 제철법을 전달한 선진 기술 집단의 지배자이다. 일본에서 신라명신明神으로 추앙받는 아메노히보코와 비단 짜는 여신 히메고소가 바로 연오랑과 세오녀이다. 이들의 이름과 설화를 분석하면 제철왕, 제철여왕이었음이 드러난다.
일본학자들도 인정하는 편이다. “일본에 정착한 세오녀가 비단을 보내 신라가 해를 다시 맞이했다.”는 영일(迎日)현의 설화는 그녀가 일본에 가져간 첨단 제철법을 적어주어 신라의 불 꺼진 용광로에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는 의미이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제철술을 알 수 있는 사례는
지금도 매년 음력 초하루면 시마네현 이즈모 지방에서 인간 국보인 장인이 4세기 신라식 제철가마에서 최고 무쇠를 생산해 일본도를 만드는 과정을 재현한다. 그러나 포스코와 함께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인 신일본제철도 아직 일본도를 만들 만큼의 최고 무쇠를 만들지 못한다고 한다. 현대과학의 최고기술로도 4세기 신라식 가마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40대에 뒤늦게 역사연구를 한 계기는 무엇인가
1973년 한국일보 문화부장 시절 천마총이 발굴되어 매일 문화면 기사가 1면 톱기사로 올라갔다. 벽화가 아닌 최초의 그림 발굴에 쏠린 대중의 관심과 고대역사에 대한 궁금증에 답해줄 책임이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부터 공부를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두와 일본 고사서에 홀린 듯 빠져들어 연구했다. 11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한일역사교과서 분쟁이 터졌는데 일본 측 의원과 이론적으로 맞서려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철저히 알아야만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고대어와 이두, 일본식 이두를 어떻게 공부했나
당시 조금 조악한 이두사전을 참고로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다. 일본에 유학 간 아버지로 인해 동경에서 태어나 정확한 일본어 발음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북한,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가 지금처럼 희석되지 않고 본래 발음 그대로 생생하게 남아 있어 고대어 연구의 실마리가 되었다. 일본 고대어는 매우 복잡해 일본 학자도 어려워한다. 숫자관련 용어는
고구려계, 음식 제사법 등을 포함한 문화관련 언어는 백제계, 정치관련 용어는 신라계 언어로 되어 있다.
고구려인이 일본 경제를 주도했다는 것이고, 가장 많은 사학자를 배출했으며 불교와 함께 불화, 불상, 건축술 등 다양한 문화를 전파한 것이 백제인이며, 정치적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이 신라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독학으로 익힌 이두의 해석에 확신을 가진 계기는
기획취재로 일본 문화답사여행을 갔을 때 어느 마을에 있는  신사 이름을 이두식으로 풀어 “아라가야에서 온 무쇠 다루는 사람들을 모셨다.”는 뜻을 찾아냈다. 신사 주지가 “가야에서 왔다고 전해지고 모시는 신체(神體)가 무쇠찌꺼기인데 아무도 보여주지 않은 것을 어찌 알았냐?”고 기함을 했다. 내가 바른 길을 찾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고대 한·일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교류사를 공부하려면 필요한 것은
한자 지식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역사, 고대 한국어를 알아야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상상력이다. 통치자의 정치적 의도에 맞게 쓴 고대사서와 실제 역사적 진실과의 틈새에서 벌어지는 모순을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 한가지 예로 <일본서기>를 통틀어 일본 천황의 유언이 하나도 실리지 않았는데 왜 고구려 재상인 연개소문의 유언이 세세하게 기록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고 사서를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만 알고 연구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다.

일본 <만엽집>에 대한 연구를 하는 이유는
7세기에서 8세기 경, 주로 일본 고관들이 읊은 <만엽집>은 고대 한국어를 일본식 이두체로 기술한 4,516수의 고대 노래 묶음이다. 겉보기처럼 단순한 연애시나 풍자시가 아니다. 한자와 이두, 고대 한국어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고 이중적 의미를 담아 정치 정세를 비판한 내용, 권력싸움과 숨기고자 하는 천황가의 비밀 등을 수록하고 있다. 한일 고대 사서에서 감추어진 역사의 진면목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데 2011년에 한국어로 출판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만엽집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 일본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동안 일본학자들은 이 <만엽집>을 중세 이후 일본어로 풀려고 하니 뜻도 잘 안 통하고 모호하게 해석했다. 그래서 매년 일본의 대학입시에 출제될 때마다 학생들을 괴롭혔다. 1989년 <또 하나의 만엽집>을 펴내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본 학계와 참고서 출판업계에서 큰 논란이 일었고 결국 다음 해부터 입시문제에서 제외되었다.

향후 한일 역사의 연구방향에 대해 한마디
우리 학자들이 일본과의 사학논쟁이나 연구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식민사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 진실을 찾기 어렵다는 난점도 있다. 윤내현 교수와 같이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학자 간 서로 연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고대사가 밝혀져도 일본 학계가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국학신문 1월호 7면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