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로 지정된 전북 '부안 내소사 범종'. 사진 문화재청.
국보로 지정된 전북 '부안 내소사 범종'. 사진 문화재청.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는 듯 크게 벌린 입과 부릅뜬 눈 뒤로 활짝 편 귀, 잔뜩 치켜든 허리와 힘차게 뻗은 다리로 곧 날아오를 듯 조각한 한 마리 용이 700근 무게를 800년 간 지탱해온 전북 ‘부안 내소사 동종’이 지난해 12월 국보가 되었다.

지난 1월 9일 내소사 대웅보전 및 수장고에서는 최응천 문화재청장, 주지 진성스님을 비롯해 신도들과 지역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지난해 12월 26일 국보지정 기념행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최응천 문화재청장은 진성스님에게 국보지정서를 전달했다.

(왼쪽)지난 1월 9일 내소사에서 개최한 '부안 내소사 범종' 국보지정 기념행사에서 진성스님에게 국보지정서를 전하는 최응천 문화재청장. (오른쪽) 내소사 동종을 설명하는 최응천 문화재청장.
(왼쪽)지난 1월 9일 내소사에서 개최한 '부안 내소사 범종' 국보지정 기념행사에서 진성스님에게 국보지정서를 전하는 최응천 문화재청장. (오른쪽) 내소사 동종을 설명하는 최응천 문화재청장.

‘부안 내소사 동종’은 1222년(고려 고종 9년)에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당대 최고의 금속 장인 한중서韓仲敍가 제작한 것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동종 가운데 가장 크고 조형미나 기술 면에서 매우 뛰어난 범종이다.

현재 내소사 보종각에 걸린 동종의 높이는 104.8cm, 구경이 67.2cm. 통일신라시대 상원사종(725년)과 성덕대왕신종(771년, 에밀레종)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고려 범종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이자 기준작이라 평가받는다.

은은하게 멀리 울려 퍼지는 깊은 울림이 특징인 우리 범종을 고리에 걸기 위한 부분은 전통적으로 용으로 장식되어 ‘용뉴’라 한다. 용은 평소에는 연못이나 바닷속에 살다가 때가 되면 물을 박차고 나와 하늘로 올라가 지상과 초월적인 하늘을 연결해주는 영적인 존재로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내소사 동종의 용머리. 상반신만 새긴 조각에서 박진감이 넘친다. 용뉴와 함께 대나무 모양의 음통도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내소사 동종의 용머리. 상반신만 새긴 조각에서 박진감이 넘친다. 용뉴와 함께 대나무 모양의 음통도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장인 한중서가 부석사 동종에 새긴 용은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고 발톱을 세운 다리로 힘차게 발길질을 하고 있어 훨씬 박진감 있고 사실적인 조각 수법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용을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인 느낌으로 전달하려 한 제작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범종의 위와 아래에는 활짝 핀 모란꽃과 덩굴무늬가 어우러져 띠를 이룬 모란당초문대가 뛰어난 장식미를 더했다. 게다가 동서남북 네 곳에는 연꽃 대좌에 앉아 선정인 자세를 한 본존상과 좌우에 서 있는 협시보살로 이루어진 삼존불을 독창적으로 표현해 도드라지게 양각으로 새겨졌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뭉게구름이 떠받치고 구름 꼬리가 유려한 곡선으로 궤적을 그리며 펼쳐져 있다.

(왼쪽) 내소사 동종 4곳에 새겨진 삼존불상.(오른쪽) 탁본. 삼존상이 표현된 것은 고려 범종 중 연복사 종과 함께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사진 문화재청.
(왼쪽) 내소사 동종 4곳에 새겨진 삼존불상.(오른쪽) 탁본. 삼존상이 표현된 것은 고려 범종 중 연복사 종과 함께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사진 문화재청.
(왼쪽)내소사 동종에 새겨진 삼존상 가운데 본존상 가슴에 卍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삼존상 위를 장식한 천개와 유소. 사진 문화재청.
(왼쪽)내소사 동종에 새겨진 삼존상 가운데 본존상 가슴에 卍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삼존상 위를 장식한 천개와 유소. 사진 문화재청.

통일 신라시대 범종 중앙에 주로 비파나 피리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이 등장하다가 고려 범종에서 무용, 비행, 합장 천인 등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점점 천인상이 사라지고 후기에는 불보살상으로 대체되었다. 내소사 동종에 고려 후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또한, 동종의 어깨 부분으로 천판(天板)과 몸체 연결 부위에 꽃잎무늬를 입체적으로 세워 장식한 '입상화문대'도 신라 범종과 다른 고려의 특징이기도 하다.

(왼쪽 위) 종의 천판과 몸체 연결부위에 꽃잎무늬를 입체적으로 장식한 '입상화문대'과 윗부분 모란당초문. (오른쪽 위) 동종의 아랫부분 모란당초문. (아래) 종의 위 아래를 장식한 모란당초문의 문양. 사진 문화재청.
(왼쪽 위) 종의 천판과 몸체 연결부위에 꽃잎무늬를 입체적으로 장식한 '입상화문대'과 윗부분 모란당초문. (오른쪽 위) 동종의 아랫부분 모란당초문. (아래) 종의 위 아래를 장식한 모란당초문의 문양. 사진 문화재청.

내소사 범종의 가장 큰 특징은 종에 범종의 제작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이를 만든 장인 등 종을 만든 내력을 기록한 주종기(鑄鐘記)가 명문으로 새겨졌고, 추가로 본래 청림사에 있던 종을 내소사로 옮긴 기록인 이안기(移安記)까지 새겨져 내력이 명확하다.

고려 시대 범종의 경우 명문이 간략하고 장인에 대한 기록도 흔치 않은데, 내소사 범종을 제작하고 이관한 이력이 세세 모두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범종 연구에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었다.

종에 새겨진 바에 의하면, 1222년 동량도인 허백과 도인 종익의 발원發願을 받아 한중서가 변산의 청림사에서 제작했다. 이후 청림사가 어떤 사유로 폐허가 되면서 땅속에 묻힌 것을 은사 김성규가 1849년 발견하고 다음 해인 1850년(조선 철종 원년)에 부안 내소사에 시주했다.

처음 새긴 주종기에는 “부녕의 변산에 청림사가 있으니 삼한의 옛 절은 없어지고 지금 다시 세워졌다. 건물은 크고 화려하며, 선승(禪僧)들이 많이 모이니 백공 등에게 명하여 종을 만들도록 하였다”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어지럽고 막힌 것을 깨우치게 하리니 무릇 귀가 있는 이들은 (듣고서) 본심(本心)을 열고 깨달으라”고 범종에 담은 뜻을 밝히며, 이를 사주(社主) 선사(禪師) 담묵이 지었다고 했다.

(왼쪽) 1222년 내소사 범종의 제작기록인 주종기와 탁본. (오른쪽) 종을 옮긴 내력을 담은 이안기와 탁본. 탁본은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지식e음 제공. 사진 문화재청.
(왼쪽) 1222년 내소사 범종의 제작기록인 주종기와 탁본. (오른쪽) 종을 옮긴 내력을 담은 이안기와 탁본. 탁본은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지식e음 제공. 사진 문화재청.

한편, 내소사 동종을 만든 장인 한중서는 1218년 고령사 금고(청동북)부터 1252년 옥천사명 반자(飯子, 절에서 쓰는 북모양의 종)까지 금고 3점과 범종 2점을 통해 그 이름을 남겼다. 각각 금고와 동종에 새겨진 명문을 토대로 그의 장인으로서 성장과 관직명을 확인할 수 있다. 전하는 마지막 작품인 옥천사명 반자에는 그가 대를 이어 개경에서 활동한 공인(工人) 집안 출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고령사 청동북(1218년)을 통해 그가 당시 수녕궁주방 시위군의 일개 군사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고, 4년 뒤 내소사 동종에는 ‘장인’이란 명칭을 썼다. 1238년 제작된 신룡사명 소종에는 ‘대장’의 명칭을, 같은 해 복천사명 반자에는 ‘별장동정(別將同正)’이라고 관직명을 썼다.

그가 1238년 기술적으로 숙련되어 장인의 우두머리인 대장의 지위에 올랐고, 관에 소속된 관장으로서 관직까지 받은 것이다. 고려시대 걸출한 장인의 한명인 그는 이후 큰 변동없이 ‘별장동정 한중서’로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한중서 외에 고려시대 관장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원성사 소장 동종〉의 ‘대장위 김경칙’ 등 4명 정도에 불과하며, 한중서와 같이 여러 작품을 남긴 것은 관사장(官‧私匠)을 통틀어 그가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