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일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탄생일을 맞아 배우 박하선과 서경덕 성신여자대학 교수가 정정화 관련 다국어 영상을 국내외에 공개했다고 밝혔다.

이번 9분짜리 <수당 정정화-평범한 여인의 비범한 독립운동사>라는 제목의 영상은 한국어와 영어로 제작하였다.

8월 3일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탄생일을 맞아 배우 박하선과 서경덕 성신여자대학 교수가 정정화 관련 다국어 영상을 국내외에 공개했다. 이미지 서경덕 교수실
8월 3일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탄생일을 맞아 배우 박하선과 서경덕 성신여자대학 교수가 정정화 관련 다국어 영상을 국내외에 공개했다. 이미지 서경덕 교수실

영상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잔다르크, 안주인으로 불리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의 산증인이었던 정정화의 생애와 주요 활동을 상세히 소개한다.

또한 자서전 《장강일기》를 바탕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사진과 유물 등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평범한 여인의 비범한 헌신을 기렸다. 이번 다국어 영상 제작비는 수당 정정화 여사의 유족이 후원했다.

이번 영상을 기획한 서 교수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영상으로 이들의 삶을 널리 알리는 일은 지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며 “‘수당 정정화 영상은 유튜브를 비롯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각종 SNS로 전파중이다. 특히 전 세계 주요 한인 및 유학생 커뮤니티에도 영상을 공유해 널리 알리고 있다"고 말했다.

서경덕 성심여자대학교 교수(사진 왼쪽)과 배우 박하선. 사진 서경덕 교수실.
서경덕 성심여자대학교 교수(사진 왼쪽)과 배우 박하선. 사진 서경덕 교수실.

 

이 영상의 한국어 내레이션을 맡은 배우 박하선은 "다가오는 광복절을 맞아 정정화 여사의 삶을 목소리로 직접 소개하게 돼 기쁘며, 국내외 많은 누리꾼이 시청해 주길 바랄 뿐이다"고 말했다.

국기보훈처의 독립유공자공훈록 등에 따르면 수당 정정화는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이 된 1910년 가을 김가진(金嘉鎭)의 3남인 동갑내기 신랑 김의한(金毅漢)과 혼인하였다. 개화파 집안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남편 김의한은 아내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그 와중에서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해로 망명하자 정정화 또한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1920년 1월 초순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다.

정정화는 1930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지원을 위하여 6회에 걸쳐서 국내를 왕복하면서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32년에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절강성(浙江省) 가흥(嘉興)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이동하여 임시정부를 도왔다.

정정화는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의 창당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1940년에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하에 있는 중경 31유치원의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 산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여 훈련부장에 선출되었으며, 국내외 한인 부녀의 총단결과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에 있는 동포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고, 혹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며, 혹은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하여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계몽 교육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또 전란과 병고로 고생하는 동포들을 찾아 정성어린 위문과 부조로 천애이역(天涯異域)에서 동포애의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멀리는 미주 한국여성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락으로 재미(在美) 각계 동포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성원을 두터이 하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