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격동의 아시아, 1‧2차 아편전쟁의 결과 청의 수도이자 황제의 도시인 베이징이 서양인에게 활짝 열렸다. 청은 영국을 위시한 서양 제국들에 속수무책으로 패했고,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와 각각 텐진조약과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조약을 맺은 국가의 서양인은 중국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18일 교양총서 '베이징에 온 서양인, 조선과 마주치다'를 발간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재단은 지난 18일 교양총서 '베이징에 온 서양인, 조선과 마주치다'를 발간했다. 사진 동북아역사재단.

당시 동아시아로 향한 서양인들의 시선은 중국을 넘어 유일하게 빗장을 걸어 잠근 채 어떠한 통상 요구나 조약도 거부하던 조선을 향했다. 종교적 관심 또는 학문적 호기심, 무역 이득에 대한 기대 등 이유는 다양했다.

그 시기 조선 조정은 서양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위정자들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며 서양인과의 교류를 엄히 금했다. 하지만 매년 베이징에 간 사신들, 국경지대에서 교역을 하던 이들은 서양을 접했을 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를 알아가고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발간한 교양총서 ‘베이징에 온 서양인, 조선과 마주치다’에서는 18세기 말부터 조선이 개항하는 1860~1876년까지 조선이 중국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서양을 경험하는 여정을 다뤘다.

선교사, 외교관, 기자, 사진사, 엔지니어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서양인과 조선인의 접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조선인을 만난 적도 없는 윌리엄 그리피스는 ‘은자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통해 조선이 세계와 단절된 세상이며 수동적이라는 이미지를 주었지만 실제 조선인을 만난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들이 말하는 조선인의 공통점은 ‘강한 호기심’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천주교를 엄격히 금했음에도 베이징에 온 서경보, 윤치겸은 초대받지도 않은 러시아 정교회 사제들이 머무는 아라사관을 찾아 간곡히 청해 천주상과 교당을 구경하고 연행록에 기록했다. 또 러시아 화가에게 초상화를 부탁하기도 하고, 당시 놀라운 신기술인 사진을 찍으러 가기도 했다.

‘중국과 중국인 사진집’을 출판한 영국인 존 톰슨은 베이징을 방문한 조선인을 촬영한 사진을 게재하고 조선인에 대해 언급한 내용 일부를 발췌하면 “생김새가 유럽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크게 놀라웠다. 한 털의 더러움도 없는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흰색이었다. 이처럼 정결한 모습은 내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인들의 결기로 판단하건대, 만약 일본인들이 그들과 전쟁을 한다면,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깔끔한 백의민족인 용모가 유럽인처럼 보인다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톰슨의 여정에서 만난 동남아시아와 중국 남부 지역 사람들이 왜소한데 반해 조선인은 풍채가 좋고 수염을 길러 유럽인처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신미양요 직후라 미국 함대의 포격에 맞서 강화도 광성보, 초지진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까지 저항했던 조선인의 이야기가 그에게 준 인상이었던 듯하다.

또한, 청과 조선의 접경지역 ‘고려문’에서 조선인을 만났던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엄슨은 “조선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예의바르고,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으며, 매우 호기심이 많았다”라고 했다.

한편, 독일 동아시아 연구의 창시자라 할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은 고려문으로 건너가 후시에서 장사하는 조선인과 만난 후 “유럽인과 외모가 비슷하며 매우 청결하며, 예의 바르고 자부심이 강하며 호기심이 많다”라며 조선인은 교제에 있어 총명하고 활발하며 탁 트이고 붙임성이 있다고 했다.

당시 조선인은 중국인, 일본인보다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어떤 물건을 보면 그 원리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했고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있음에도 유럽 국가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외국을 평가하고, 외국의 비밀을 캐고 그 지식을 배우려 했다.

밀려오는 제국주의 서양 세력에 문을 걸어 잠근 조선의 위정자들,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 대한 조선인들의 관심과 호기심은 매우 높았다. 첨단 기술과 변화에 민감한 지금 한국인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