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날씨답지 않게 포근했던 오후, 나는 서울 남산 자락에 있는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 섰다. 신사복 차림의 안중근 의사는 미소를 띤 온화한 모습이었다. 그 옆으로 열두 개의 길쭉한 직사각형 건물이 블록처럼 서 있었다. 가장 오른쪽 건물 안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안중근’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그곳이 안중근의사기념관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몇 년 전에 신축한 기념관은 열두 개의 박스형 건물이 언뜻 독립된 공간으로 보이나 내부로는 모두 통하게 되어있는 구조로 안중근 의사가 1909년 결성했던 열두 명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상징한다고 했다.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살짝 경사진 그 길은 건물을 끼고 휘돌아져 있었다. 누구의 솜씨였을까. 나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겼다. 높은 벽면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검은 대리석에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고 안중근 의사를, 나라사랑을, 독립의 순간을 되새겨보라는 뜻인가. 마치 그 길이 100년의 시간을 끌어당기듯 나를 안중근 의사 앞으로 향하게 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중앙 홀에 흰 한복차림의 안중근 의사 좌상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뒤로는 혈서로 쓴 ‘대한독립’이라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그 앞에서 묵례했다. 절로 숙연해졌다.  
 
관람순서에 따라 1층으로 올라갔다. 독립운동에 관해 학교에서 배우긴 했으나 사실은 자세하게 몰랐다. 그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독립운동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나는 메모를 하면서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그는 교육운동에 힘쓴 지식인이자, 의병부대의 지휘자이자, 신앙심이 깊은 천주교도였다.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 절로 호기심이 생겼다.
 
제1전시실은 상징의 공간으로 안중근 사진, 부조, 전언 등이 있었다. 그 당시 국내외적으로 급격히 변화하는 정세를 연도별로 정리해놓아서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가 빼앗긴 부분에서는 한참 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항일 독립운동 명문가의 가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만약에 ‘나’라면 어땠을까. 당당하게 조국을 위해서 기꺼이 내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제2전시실은 청년 안중근의 국내외 활동을 안내하고 있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비록 전시용이었지만 잘린 손가락을 보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안중근 의사의 강한 독립의지가 100년 전의 일이지만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제3전시실은 서른 살 청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았다. 법정투쟁과 옥중에서 남긴 글을 보면 그는 의연한 태도로 있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사형수 신분이 아니었던가. 그 암담한 현실 앞에서 동양평화사상을 주장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하얼빈의거를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 유지에 있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도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으로 아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도 자살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일본법정은 1910년 2월 14일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전시관을 거의 돌아 나올 무렵이었다. 시뮬레이션 동영상이 켜졌다. 안중근 의사가 빌렘 신부와 두 동생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엄숙한 당부를 성우의 목소리로 전해 듣는데, 실제 상황처럼 나도 덩달아 비장해졌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독립을 향한 강한 집념과 나라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 투사의 면모에 나는 압도당했다. 그런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당당하게 죽을 것을 당부했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일화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웠다. 투사의 어머니이기 전에 한 아들을 둔 어머니 아니던가. 옥중면회를 가면 혹여 마음이 흔들릴까봐 한 번도 찾지 않았다던 그 어머니, 항소를 하지 말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라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져 왔다.
 
출구 쪽으로 향했다. 사방이 훤해지면서 남산 아래 서울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건물 한 동이 사방 유리로 되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부로 투영되어 눈이 부셨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하얀 햇살이 내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었다. 너무 밝았던 그 공간이 더 없이 평화롭게 느껴졌다. 고요하고 차분한 공간, 따각 따각 내딛는 내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지던 유리 상자 같은 공간, 안중근 의사가 그렇게 원하던 조국의 모습이 보이는 공간, 그 공간은 다름 아닌 바로 안중근 의사였다. 건축을 할 때 상징적인 의미로 동의단지회 12명을 나타내기 위해 12동의 건물을 세웠다고 했다. 그 중 맨 마지막에 한 동은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 위해 전면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었다고 했다. 설명이 없어서 건축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상상해 보았다.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열려있는 곳,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아도 조국의 수도 서울이 사각유리건물 안에 다 들어온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안중근 건물을 관통하고 있는 계단을 따라 타임머신을 타 듯 천천히 100년 전의 안중근을 만나고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려오니 다시 중앙 홀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좌상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면회를 일부러 한 번도 안 간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구겨진 주름 없이 풀 먹인 손수 지어준 한복,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놓은 손, 그리고 선한 얼굴에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 저 모습이 바로 사형이 집행되기 전의 표정이라 했던가. 무엇을 그리 아프게 바라보았을까. 간절한 눈빛 같기도 했다가 무심한 척 다 내려놓은 편안한 표정 같기도 했다가 신념에 가득 찬 그의 날선 정신 같기도 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흰 한복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색이며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가 보낸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형장으로 향했을 안중근 의사를 떠올리자니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올라와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의 국학인 ‘홍익인간’, 즉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다’라는 정신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조국과 동양의 평화를 주장한 진정한 홍익인간이다. 지금 우리 후손들도 동양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한다. 그가 주장한 평화사상을 우리가 이어가야 함이 당연하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다. 분단과 분열, 분쟁의 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부르짖었던 평화사상에 집중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앗아간 이토 히로부미를 겨냥한 것처럼 이제 우리가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 할 때이다. 가깝게는 북한 인권과 멀게는 분쟁지역에서 고통 받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겠다. 아직은 학생 신분이라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는 없지만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 할 생각이다. 
 
기념관을 나와 남산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다시 안중근 의사로 명명된 유리건물을 바라봤다. 겨울나무와 새와 푸른 하늘이 가득 차 있는 안중근 기념관. 그는 그렇게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있었다.
 
▲ 벤자민인성영재학교 2기 이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