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브라질 월드컵이 다가온다. 대표팀 공식 서포터 ‘붉은악마’도 응원전을 준비하고 있다. 온 국민이 <Again 2002한일월드컵>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때만큼 국운(國運)이 숭상하던 때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잊은 것이 있었다. 국운을 국혼(國魂)으로 승화하기 위해 국학원이 창립한 해도 2002년이었다. 또한 2년 뒤에는 홍익정신의 전당, 국학원 건물이 완공됐다.

국학원 창립 12주년이자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타임머신’을 탔다. 이어 설립 스토리를 소개한다.

▲ 충남 천안시 목천읍 지산리에 세운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국학원 전경(사진=국학원)

전국에서 몰려든 국학원 인파

2004년 6월 5일, 국학원은 전국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들이 로비에 나타나자 가이드가 전시관으로 안내했다. 1층은 <홍익인간 이화세계관>이다. 마고시대부터 단군시대까지 한민족의 찬란한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지하 1층에는 <고구려문화 기획전>이 마련됐다. 국학원은 2003년 12월 중국이 유네스코에 고구려유물을 자국의 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100만 국민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1월 이코모스는 북한 내 고구려 유적을 중국 영토에 있는 유적과 함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하도록 권고키로 결정했다. 역사적인 쾌거였다. 언론들이 앞 다퉈 ‘국학원’을 보도했다.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제 1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인간사랑 지구사랑>관이다. 국학의 현대화이자 과학화를 소개했다.

선묵화와 휘호가 빚어낸 ‘설립 메시지’

개원식은 4층에서 열렸다. 피리소리가 들렸다. 이어 징소리가 나더니 무용수가 나왔다. 양 손에 꽃을 들고 춤사위를 펼쳤다. 무대가 바뀌자 선묵화의 대가인 범주 스님이 등장했다. 스님은 어른 키만 한 붓을 가져왔다. 그는 흰 천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혼신을 다했다.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스님이 자리에 앉고 설립자 이승헌 총장(글로벌사이버대학교)이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한민족의 탄생이여, 지구경영을 위하여>라는 휘호를 썼다. 스님이 그린 삼족오와 좌우청룡은 설립자 메시지과 함께 승천하고 있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감격스러운 눈물로 박수를 보냈다. 국학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꿈’이 이뤄지기까지

▲ 설립 메시지
이 총장은 1994년 천안에서 운명의 장소를 발견했다.

“그 터를 처음 방문하던 날은 눈발이 날리는 차가운 겨울이었다. 차가 드나들 길조차 닦여 있지 않은 산길을 걸어 올라가 눈앞에 맞닥뜨린 곳은 폐허가 되어버린 양계장 터였다. 그곳에 나의 꿈을 심기로 했다.”

그러나 국학원 설립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국학은 나라의 학문이다. 민족의 정신을 잃지 않은 정통성 있는 정부라면, 국학원 설립은 당연히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은커녕 민간단체의 지원을 받기도 어려웠다.”

10년이 걸렸다. 막대한 자금이 들어갔다. 공사비를 감당하느라 이 총장의 사재까지 털었으나 턱도 없이 모자랐다. 자금난을 해결하지 못해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도 있었다.

하지만 이 총장은 “그 시간 동안 나를 믿고 따라준 제자들과 국학 회원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국학원 건립은 불가능한 일이었다”라며 “그들의 피땀 어린 의지와 신념이 없었다면 오늘의 국학원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신을 바르게 알리고 부활시키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신념으로 나는 국학원 완공에 총력을 기울였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