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정용기 선쟁을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독립기념관은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관련 전시회를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에서 1월31일까지 한 달간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충효재 사진 등 7점을 전시한다.2020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관련기관과 개인 등의 추천을 받아 내외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 공적 등을 심층 논의하여 선정한다.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鄭鏞基 1862.12.1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는 시・서・화 삼절(三絶)이자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이름 높지만, 그 삶과 예술의 깊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신위는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ㆍ경수당(警修堂)이다. 자하(紫霞)는 신위가 살던 동네 이름인 동시에 그의 아호(雅號)이다. 그 마을은 경기도 시흥군(始興郡) 자하동(紫霞洞), 즉 현재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부지로 상세하게는 대학교 정문 동쪽 운동장 부근에 있었다. 2008년 8월에 그 자리에 시문표지석(詩文標識石)을 세웠다. 신위는 1799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 잡아 궁궐과 가깝고 도성 내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 북촌. 권세가가 선호하던 북촌이 숨 가쁘게 급변하던 근‧현대 100년의 역사를 열한 가문의 개인 일상과 기억을 통해 돌아보는 특별 전시회가 열린다.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 19일부터 오는 10월 6일까지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특별전을 개최해 1860년부터 1960년까지 개항과 개화, 대일항쟁기와 광복, 한국전쟁을 지나온 백년을 조명한다.북촌 열한 가문은 지난해 서울역사박물관이 북촌 지역조사와 함께 집안과 거주시기, 동네와 가옥형태 등을
네덜란드 출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성직자를 'Sky Pilot'이라고도 하니 중생을 하늘로 인도하는 사명을 받고자 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아를에서의 ‘해바라기’ 연작과 평생 존경했던 밀레의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을 따라 그린 작품에서 보듯 고흐만의 태양이 그의 가슴에서 이글거리고 있다. 그도 모자란 듯 밤하늘의 주먹만 한 별빛도 휘황찬란하게 번쩍인다. 하늘의 빛에 닿아 그의 전 존재가 환하게 물들고 싶은 것이리
루이 14세(1638~1715)는 다섯 살에 등극한다. 실권은 전혀 없이 대신들의 권세에 휘둘리며 자란다. 섭정자인 권력자 푸케의 부패와 학정에 대항하여 봉기한 두 번의 반란에 포로가 되는 등 고초를 겪는다. 왕으로서 수모를 참아가며 가슴속에 살생부를 쌓아간다. 우여곡절 끝에 직접 통치하게 되자 부패한 권세가들을 숙청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한다. 청년기의 20년을 빠짐없이 매일 두 시간씩 춤을 추는 등 사교계에서도 귀족들의 휘어잡는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한다. 내치가 안정되자 전쟁을 일으켜 주변국을 침략하면서 땅을 넓혀 간다. 대개 실속
근세조선이 일본에게 침탈당했을 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을사오적처럼 적극적으로 부역하거나, 깊은 한탄으로 속세를 떠나거나, 단식하거나, 자결하거나 혹은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때 한민족에게 가장 큰 희망을 주신 분 중의 한 분이 홍암(弘巖) 나철(羅喆)선생이다. 나철(1863~1916) 선생은 현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나셨고 본명은 인영으로 대종교 창교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동요처럼 불리는 가요 '산 너머 남촌에는' 의 가사이다.우리 말 중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다. 이와 유사한‘갈수록 태산’이라는 속담도 있다. 산을 하나 어렵게 넘어갔는데 넘어야 할 산이 앞에 또 있다는 의미로, 어려운 일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연속해서 닥쳐온다는 뜻이다.위에
단군(檀君)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고조선, 개천절, 홍익인간 등이 있을 것이다. 기자는 뿌리(Root)가 떠오른다. 이 땅에 5천 년의 뿌리를 내린 한민족의 역사라서 그렇다. 최근 대구에 다녀오면서 2가지의 역사를 만났다. 뿌리를 지키려는 역사와 훼손하려는 역사가 그것이다. 올해 광복 70년이라고 하지만 역사는 회복되지 않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고조선의 새로운 인식을 위하여 8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아하! 그렇구나. 바로 이거야.”“내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역사의 주인공이구나. 마치 그 옛날 단군왕검 할아버지처럼...... 밝고 환한 배달족의 후예이고 천손이며 한민족의 일원이었구나.”그런데 우리 역사인식의 현 주소는 어떤가? 역사 교과서를 펼치면, “이게 뭐야? 우리나라 역사가 자랑스럽기는커녕
광해군이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지 15년. 임금이 인심을 잃었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은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 능양군과 가까운 친속인 무인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이 먼저 대계(大計)를 세우고 동지를 규합하기에 이르렀다. 전 동지(同知) 김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