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 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동요처럼 불리는 가요 '산 너머 남촌에는' 의 가사이다.

우리 말 중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있다. 이와 유사한‘갈수록 태산’이라는 속담도 있다. 산을 하나 어렵게 넘어갔는데 넘어야 할 산이 앞에 또 있다는 의미로, 어려운 일이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연속해서 닥쳐온다는 뜻이다.

위에 ‘너머’와 ‘넘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둘을 곧잘 혼용해서 쓰고 있다.‘너머’는 어떤 물체나 경계의 저

▲ 민성욱 박사
쪽, 즉 공간을 말하고 ‘넘어’는 ‘산을 넘어 간다’처럼 동작을 나타낸다.

겨울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요즈음, 봄바람이 간절하다. 우리는 항상 남쪽으로부터 봄소식을 기다린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남쪽은 어디인가? 애국가 가사 중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에서 남산은 어디인가? 남산은 대개 우리 민족의 앞산을 말한다. 남향집을 생각해 보면 우리네 집에서 내다 본 산은 앞산이고 그것은 분명 남산이었을 것이다.

시인 김동환이 쓰고 가수 박재란이 불렀던 우리 가요, 마치 동요 같기도 하고 민요 같기도 한 '산 너머 남촌에는' 이라는 가요에는 우리 민족의 서정적 자아가 내재되어 있다.

시인 김동환, 그는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시세계는 여전히 민족의 서정적 자아를 대변하고 있다. 그 시세계의 커다란 맥을 형성하는 일련의 민요시들 가운데 '산 너머 남촌에는' 은 따사로운 자연과 순박한 인정을 노래한 것으로 곡을 붙여 널리 불리고 있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산 너머 남촌은 동경하는 공간을 말한다. 봄바람은 그리운 사람, 사랑 그리고 희망을 의미한다. 항상 우리에겐 희망이 마파람과 같이 남쪽에서 불어온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우리네 조상들은 그렇게 살아 왔던 것이다.

때로는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또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는, 더 큰 그리움이 일렁이다가 쌓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서기 전 2333년 국조 단군왕검께서 나라를 여시고 난 후 지금의 요서지역인 내몽고자치구 적봉 인근에서 출발하여 남쪽인 능하지역으로 내려왔다가 단군조선 폐관이후로 다시 동남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렇게 이동은 그 이후로 계속 되었고, 기자조선과 위만국의 영향으로 또 한번 이동하게 되었으며, 위만국이 한무제에 의해 무너지고 그 자리에 한군현이 설치되자 다시 이동을 하게 되어 지금의 한반도 지역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나라들과 민족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우리 민족은 민족이 형성된 이래로 남쪽으로 이동해 왔었고, 지금의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다. 방위로 보면 북쪽은 민족의 시원지라고 할 수 있으며 민족 이동의 출발점이 된다. 남쪽은 이러한 이동의 귀결지이며, 나아가 원형에 대한 회귀를 뜻하기도 한다. 역사는 북쪽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흘러왔지만 정신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남쪽에서 더 강렬하게 귀소본능을 자극하였고 그 원형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남겨진 것들이 많다. 그렇게 남겨진 것들이 고유한 정신문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리 잡은 삼한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남쪽에 존재했었다. 고대로부터 현대로 넘어오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한성백제 500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2000여 년의 ‘도읍지 역사’를 간직한 장소다. 역사를 통해 서울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서울이 어떻게 태어났고 변화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맞이할 미래의 서울 모습은 어떠할지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복원과 개발을 통해 변화한 청계천의 역사는 서울의 역사와 그 맥을 함께 한다고 할 수 있다. 청계천은 한양의 중심을 흐르던 물길이었다.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소위 한양의 내사산을 잇는 도성 안쪽에서 가장 낮은 부분이 청계천 물길이었다. 서울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통칭해서 내사산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사산에서 한양 안쪽으로 흐르는 작은 물길은 모두 청계천으로 모여 들어 동쪽으로 흐르다가 중랑천을 만나 한강으로 합쳐져 서해로 흘러간다.

특히 청계천은 조선시대 한양의 남쪽과 북쪽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청계천의 북쪽을 북촌이라 하고, 남쪽을 남촌이라고 하였다. 당시 남촌과 북촌의 생활수준은 많이 차이가 났다. 북쪽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권세가와 부자들이 자리했고, 남산 북쪽 기슭인 청계천 남쪽은 상대적으로 형편이 못한 사람들이 주로 살았다. 대일항쟁기 때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남쪽은 명동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주로 살면서 선진문명이 들어와 화려하게 개발되었지만 북쪽은 상대적으로 도시발전이 뒤쳐지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한강을 경계로 그 남쪽을 강남이라고 하고 그 북쪽을 강북이라고 하듯 이렇게 서울의 외연을 확장해 왔다.

대일항쟁기부터 복개계획이 있던 청계천은 1958년부터 순차적으로 복개하여 1977년 마장동철교까지 완전히 덮혀졌다. 그 위로 삼일고가도로가 건설되어 근대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다가 2003년 7월부터 복원되기 시작하여 2005년 10월,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도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남촌의 봄바람에서 느껴지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우리 역사 속에서 존재해 왔듯이 요즈음 우리 역사 속 봄소식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