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연인' 속 이장현(남궁민 분)과 길채(안은진 분)의 애뜻한 재회. 사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드라마 '연인' 속 이장현(남궁민 분)과 길채(안은진 분)의 애뜻한 재회. 사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오랑캐에게 욕을 당한 길채는?”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중략) 난 이제 당신 곁에 있을 거야.”

지난 4일 방영된 MBC 휴먼 역사멜로 드라마 ‘연인’ 17화 중 조선의 스칼렛 오화라 유길채(안은진 분)가 자신의 정절에 관한 생각을 물었을 때 이장현(남궁민 분)이 한 답이다.

‘연인’ 파트 2에서는 병자호란(음력 1636년 12월~1637년 1월)후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인들, ‘환향녀還鄕女’가 마주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조명하고 있다. 군인이 아닌 일반 백성임에도 끌고 간 피로인(被擄人) 부모와 자식을 구하려 속환금을 들고 많은 조선인이 심양을 찾지만, 오랑캐에게 능욕을 당했을 아내를 찾으러 오는 이가 없다는 게 현실이었다.

길채의 남편 구원무(차승현 분) 또한 심양까지 왔지만, 아내가 노예시장에서 오랑캐에게 팔려 갔다고 하니 그대로 발길을 돌려 조선으로 돌아와 새 아내를 얻었다. 그리고 구사일생 이장현의 도움으로 조선 땅을 밟은 길채를 향해 “심양에서 아무 일이 없었다”는 답을 해주면 지금의 아내와 헤어져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길채는 '환향녀'로 비난받는다. 사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조선으로 돌아온 길채는 '환향녀'로 비난받는다. 사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길채는 고집스럽게도 그 답을 하지 않았다. 동네의 수많은 이들이 “오랑캐에게 정조를 잃었으니 아무 말도 못하는 게 아니냐. 부끄럽게 왜 살아왔느냐? 목숨이 아까워 살아왔으면 조용히 있지 왜 아내 자리를 탐내냐?”고 비난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친구의 죽음에 넋을 놓은 아버지도 잠시 정신이 든 사이 더 이상 비난받지 않게 잠든 딸을 죽이려 했다. 이슬람권의 ‘명예살인’과 같은 행태이다.

결국 이혼을 선택한 길채는 구원무에게 “오랑캐에게 당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니 그걸로 이혼을 요구한다면 거절하겠다. 하지만 나를 구해준 이장현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건 미안하다. 그래서 이혼하는 것”이라며 결코 표피적인 정절 때문이 아님을 전한다. 당당한 길채의 매력이 다시 한번 돋보인 순간이다.

심양에 잡혀있는 포로의 안전 때문에 연인인 길채를 매몰차게 조선으로 돌려보낼 때 이장현은 “길채답게 당당하고 화려하게 살라”고 당부한다. 우리말 ‘아름답게’는 ‘나 답게’라는 뜻이라 하니 아름답게 자신을 잃지 말고 살라는 가슴 아픈 당부였다.

그런데 길채가 당한 일은 조선으로 돌아온 수많은, 아니 당시 대부분 여인이 겪은 일이다. 집안에서 쫓겨나거나 죽음을 강요받았고 공동체를 떠나야 했다. 지금은 노동력이나 기술이 있으면 어느 곳에서도 정착할 수 있으나 끈끈한 공동체 결속이 강한 조선 사회에서는 추방당하면 살아갈 방도가 거의 없었다.

당시 인조는 이러한 비참한 현실에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더 이상 정절에 대해 묻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서울 홍제천 상류. 왼편에 하얀색 보도각 마애불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서울 홍제천 상류. 왼편에 하얀색 보도각 마애불이 있다. 사진 강나리 기자.

그러나 인조의 명령은 백성의 삶 속으로 전해지지 않고 흩어졌다.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외면받은 많은 여인이 목숨을 끊거나 살해당했다. 나라가 힘이 없어 지켜주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들을 비난했다.

이는 현재 범죄 피해자나 그 유족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도 닮아있다. 범죄 피해를 당한 측인데도 피해의 이유를 그들에게서 찾거나 막연히 ‘재수 없는 사람들’이라며 꺼리고 외면하는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 ‘연인’의 이장현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청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기생을 조선에 돌려보낼 때 자신에게 가해질 비난을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갑자기 산적을 만나 일어난 것과 같은 사고'라고 다독인다.

또한, 자신이 ‘몹시 그리워하고 사랑한 연인’ 길채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취한다.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다 끝났소.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는 지고지순한 그의 사랑의 언어이자, 380년 전 고향에 돌아온 그들이 받았어야만 했던 위로의 말이다.

조선에서 재회한 길채와 이장현. 사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조선에서 재회한 길채와 이장현. 사진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 홍제천은 현재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마포구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하천으로, 조선시대 하천 연안에 중국 사신이나 관리가 묵던 ‘홍제원’이 었었기에 ‘홍제원천’이라 불렸다. 또한 하천 본류에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항상 모래 밑으로 스며들어 흐른 까닭에 ‘모래내’라고도 불렸다.

상류 쪽 탕춘대성 인근에는 하얀색 마애보살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홍제천을 바라보고 있고, 홍제천 모래로 칼을 씻었다고 하여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