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관심 속에 파트1을 마친 MBC 드라마 '연인' 포스터. 사진 공식홈페이지.
뜨거운 관심 속에 파트1을 마친 MBC 드라마 '연인' 포스터. 사진 공식홈페이지.

“전하께선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대번에 드러나시며 한쪽으로 치우치는 사심을 떨쳐버리지 못할뿐더러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습관을 다스리지도 못하시오니 어찌 큰일을 이룰 수 있겠나이까. 간관들이 사직하는 이유를 의심하기보다 오직 스스로 돌아보고 되새겨 옳은 길, 바른길로 나아가소서”

최근 뜨거운 관심과 아쉬움 속에 파트1을 마무리한 MBC 드라마 ‘연인’ 중 8화에서 홍문관 수찬 남연준(이학주 분)이 조선 16대 왕 인조의 면전에 올린 간언이다. 병자호란 이후 대신들이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는 일이 잦자 인조가 “오랑캐에 허리를 굽힌 임금(조정)이라고 업신여긴다”라고 하는 데 대한 연준의 답이다.

임금이 성군이 되도록 충성을 다하겠다는 유교 이상주의자 연준의 간언을 괘씸하게 여긴 인조(김종태 분)는 결국 그를 곤란에 빠뜨리고 대불경죄를 물어 유배 보내고 가산을 몰수하려 했다.

실제 이 간언은 《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 8권〉, 인조 3년 2월 16일 지평 김육이 아뢴 것이다. 김육의 표현 그대로면 인조는 참으로 편협하고 옹졸한 리더인 셈이다.

영화 '남한산성' 속 인조(박해일 분). 사진 영화 홈페이지 포토.
영화 '남한산성' 속 인조(박해일 분). 사진 영화 홈페이지 포토.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 역을 배우 박해일이 맡아 비참한 상황에서도 망해가는 명나라에 대한 의리에 얽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성품을 잘 보여주었다.

인조(박해일 분): “군사들을 먹일 식량은 얼마나 남아 있느냐?”
신하: “아껴서 먹으면 한달치 정도인데 먹이는 양을 좀 더 줄이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이옵니다. 허나 얼마나 더 아끼고 버텨야 하는 것인지 신은 그것이 더 걱정이옵니다”
인조: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말아라”
신하: “그러면 하루에 얼마를 먹여야 할는지”
인조: “내가 너에게 그런 것까지 일러주랴?”

성리학이 말하는 성군聖君으로서의 덕망을 갖고 싶으나 현실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참으로 답답한 리더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만큼이나 K드라마, K영화에서 많이 다룬 소재가 바로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야기이다. 최근 드라마가 ‘연인’이고 최근 영화가 ‘올빼미(감독 안태진)’이다.

드라마 ‘연인’ 파트1은 병자호란 전후부터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빈, 봉림대군 내외가 청에 볼모로 가 있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상황까지 다루었다. 영화 ‘올빼미’는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 배후가 바로 아버지인 인조라는 전제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먼저 드라마 ‘연인’ 10화에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을 볼 수 있다. 청의 용골대가 세자에게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 용을 수 놓아 만든 붉은 색의 관복)을 권했다는 이야기에 인조는 분노한다.

청에 호의적인 소현세자(김무준 분)를 왕에 앉히고 대신 자신을 청으로 끌고 가 볼모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괜한 망상은 아니다. 고려 시대 원元에서 아버지 충숙왕과 아들 충혜왕을 교대로 볼모로 잡고 고려의 왕위를 교체한 역사기록이 있다.

결국, 드라마에서는 부자 관계를 분열시키려는 용골대의 음모를 눈치챈 주인공 이장현(남궁민 분)의 기지로 허름한 옷을 입은 소현세자를 인조가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이를 통해 인조가 청에서 신망을 얻고 후일 백성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세자를 얼마나 경계했는지 알 수 있다.

청은 소현세자가 머문 심양관의 살림을 스스로 해결하라며 황무지 20만 평을 주었다. 세자와 세자빈 강빈은 이를 기반으로 조선과 청의 무역을 중계해 청에 잡혀 온 조선인 포로를 석방시켜 고국에 보냈기 때문에 민심은 세자의 편이었다.

영화 '올빼미'에서 인조(유해진 분) 스틸컷. 사진 영화 올빼미 홈페이지 포토.
영화 '올빼미'에서 인조(유해진 분) 스틸컷. 사진 영화 올빼미 홈페이지 포토.

영화 ‘올빼미’에서 소현세자의 독살을 눈치 챈 맹인 침술사 천경수(류준열 분)가 강빈과 함께 인조(유해진 분)에게 사실을 알리자 인조는 오히려 “침을 흘리고 와?”라며 배후가 자신임을 드러냈다. 〈인조실록 46권〉인조 23년(1645) 4월 23일에 이 사건의 모티브가 된 기록이 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인조)도 알지 못하였다.”

인조가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으나, 어의를 이형익(최무성 분)으로 바꾼 것도, 침술을 허락한 것도 인조 자신이다. 영화에서는 세자 살해에 분노해 궁으로 쳐들어 온 최대감(조성하 분)에게 “풍을 맞은 자신이 얼마나 살겠는가?”라고 비굴한 모습으로 설득해 다음 왕위를 봉림대군에게 물려주겠다며, 왕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귀향보내 죽게 만든다.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1647) 5월 13일에는 “소현 세자의 세 아들인 이석철, 이석린, 이석견을 제주에 유배하였다. (중략)당시 석철은 12세, 석린은 8세, 석견은 4세였다”고 기록되었다.

인조가 지시한 독살이 아니라 해도 인조와 소현세자의 갈등은 분명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능양군이었던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연산군 이후 반정으로 오른 중종이 반정공신들에 의해 등떠밀려 왕위에 오른 것과 달리 인조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 전국을 다니며 사림을 설득했다.

명이 이미 기울고 청이 승기를 잡은 국제정세를 파악해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조선의 근간인 성리학에서 말하는 군신의 의리, 즉, 명을 임금으로 조선을 신하로 여기는 중화질서를 명분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를 증명할 유적으로는 담양 10정자의 하나인 명옥헌에 걸린 ‘삼고三顧’라는 현판이다. 능양군 시절 광해군을 축출하고자 동조 세력을 전국을 다니며 모았고, 담양에 칩거한 오희도를 세 번 찾아가 설득한 사실을 유비가 제갈공명을 세 번 찾은 삼고초려에 빗댄 현판이다.

그런데 인조는 즉위 다음해인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해 공주 공산성으로 몽진을 갔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 갇혔다가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무릎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하는 치욕을 겪었다.

자신이 세운 왕위의 정당성이 무너진 것이다. 아울러 왕위에 올랐는데 그를 위협하는 난과 전쟁이 3차례나 있었고 그때마다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백성들에게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있다고 설득할 명분조차 잃은 것과도 같았을 것이다.

조선 16대 왕 인조의 행보에서 민심을 잃은 리더의 조급하고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