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현주,  하루를 피할 거야, 2023,  acrylic and collage on canvas, 72.7×60.6cm. 사진 정윤영
남현주, 하루를 피할 거야, 2023, acrylic and collage on canvas, 72.7×60.6cm. 사진 정윤영

동국대학교 서양화 전공 졸업반 학생 6명의 작품을 선보이는 《선명하지 않아도》 를 11월 1일부터 서울 삼청동 갤러리 민정에서 연다. 전시작가는 남현주, 변윤주, 이건희, 이승미, 정다겸, 최은진.

이 전시는 제도권 미술계 진입이 어려운 초짜 예술가들의 창작 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자리이다. 순수예술을 전공한 학생들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고달픈 현실 속 불투명한 미래에 대해 더 큰 불안감을 느낀다. 그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배이자 스승인 정윤영(36) 작가는 미술 현장의 제도적 문턱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변윤주, Pause, 2023,  oil pastel, oil, watercolor on canvas, 27.3x22cm. 사진 정윤영
변윤주, Pause, 2023, oil pastel, oil, watercolor on canvas, 27.3x22cm. 사진 정윤영

매년 평균적으로 1만 명이 넘는 학생이 미술대학에 입학하지만 순수한 열정 하나만으로 예술 활동을 지속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너무나 많다. 이처럼 녹록치않은 현실 앞에서 순수 미술 전공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나는 재능보다는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창작에 관한 의지를 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몇 해 전부터 미술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을 지도해 온 정윤영 작가는 누구보다 이 같은 문제를 깊이 고민해 왔다. 특히 그는 교육 현장에서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이 느끼고 있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불안감과 무기력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한다. 이들은 졸업한다고 해도 화려한 전시 경력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미술 현장에 진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하찮은 전시회라도 작품을 출품할 기회가 생기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미술계 관계자는 풋내기 창작자들을 외면한다. 이 같은 현실적이고 구조적인 한계를 아는 정윤영 작가가 나선 것이다.

이건희, 더 더 디저트 연작, 2023,  oil on canvas, 162.2×130.3cm. 사진 정윤영
이건희, 더 더 디저트 연작, 2023, oil on canvas, 162.2×130.3cm. 사진 정윤영

정윤영 작가는 미술이라는 전공 분야와 연계된 최소한의 상업적 토대를 마련하고 창작 활동에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실질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도록 시도하는 것이 미술 교육 현장에 있는 교육자로서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여러 구조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예술 활동을 해 보겠다며 의욕을 보이는 학생들의 뜻을 모아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 이번 전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신진 작가들의 독립적이고 뚜렷한 개성을 지닌 순수 회화 작품들을 직접 발굴하여 대중에 선보이고 작품 판매로까지 이어지는 산실로 키우겠다는 작지만 의미 있는 첫 시도이다.

정다겸, Bathtub of waiting, 2023,  oil on canvas, 162.2x130.3cm. 사진 정윤영
정다겸, Bathtub of waiting, 2023, oil on canvas, 162.2x130.3cm. 사진 정윤영

이번 전시에 참여한 학생들은 이와 관련해 개인적인 생각을 전했다.

“너 졸업하고 뭐 해 먹고 살 거야? 요즘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에요. 학부 졸업장만으로 번듯한 취업이 보장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것 같아요. 나름대로 열심히 4년의 학교생활을 보냈지만, 4학년 졸업을 코앞에 둔 지금은 주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예비 창작자가 됐어요. 다른 전공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취업 준비나 스펙 쌓기에 최선을 다하는데, 순수 예술가를 꿈꾸는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허황된 소리나 하고 있는 것 같아 상대적으로 많이 위축됐어요. 하지만 좀 두렵고 불안해도 우리는 아직 젊잖아요. <선명하지 않아도>라는 전시 타이틀처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은 결국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을 품은 것이라 생각해요.” - 남현주(24)

이승미,  몽리지기, 2023, oil on canvas,  116.8x91.0cm. 사진 정윤영
이승미, 몽리지기, 2023, oil on canvas, 116.8x91.0cm. 사진 정윤영

“저는 코로나 학번으로 대학을 입학해 수년간 학교라는 공간에 머물 기회조차 없었어요. 모든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으니까요. 학교에 정 붙이기 힘드니 자연스레 바깥으로 돌면서 미술과는 관련 없는 이런저런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듭하게 됐죠. 그리고 다시 코로나 완화로 학교 실기실로 돌아오게 되면서 ‘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그림 그리기였지.’라고 새삼 깨닫게 됐어요. 당연히 열심히 그린 작품들을 전시장에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저에게 생기지는 않았어요. 최근에는 컨테이너 박스에서 진행되는 외부 전시 작품을 설치하며 열악한 조건에 조금 힘들었는데, 감히 생각지도 않았던 갤러리 전시에 참여할 수 있어 무척 기뻐요.” - 변윤주(22)

최은진,  비가 내리고 푸르러진, 2023, oil on canvas, 116.7×91cm. 사진 정윤영
최은진, 비가 내리고 푸르러진, 2023, oil on canvas, 116.7×91cm. 사진 정윤영

“막연하기는 해도 미대 졸업하면 예술 관련 활동을 하면서 살게 될 거라 짐작만 했어요. 그림 그리는 걸 너무 좋아했어서 창작은 저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저라는 사람을 쓸모 있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순수한 창작물만 갖고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에 방황을 많이 했어요. 어떤 미술 관계자에게 어떻게 내 작업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는 것인지, 전시장에 작품 설치와 운송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전시 홍보는 어떻게 하는지, 작품이 판매되면 갤러리와 어떤 비율로 수익을 나눠 갖는지, 전시 계약서는 어떻게 작성하는지, 정말 모르는 것투성이였죠. 이번 전시는 정말 알고 싶었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방법을 몰라 주저하던 예비 창작자인 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 이승미(24)

동국대학교 서양화전공 실기실에서 그룹전 출품작에 관해 수업 중인 정윤영 작가(왼쪽부터), 이승미, 이건희 학생. 사진 정윤영
동국대학교 서양화전공 실기실에서 그룹전 출품작에 관해 수업 중인 정윤영 작가(왼쪽부터), 이승미, 이건희 학생. 사진 정윤영

정윤영 작가는 “이번 전시는 예술이 지닌 진솔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작가와 미술관, 학교가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변화의 의지가 담겨 있다. 매년 연말 미술대학 교내에 있는 전시 공간에서 학생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마는 형식적인 졸업 전시회와는 차별화되는 점이다”라며“비용을 지불하고 전시 공간을 계약하는 대관 전시가 아닌 대학 내 전공 수업을 통해 만난 학생과 스승이 뜻을 모아 전시 준비의 전 단계를 함께 추진한 ‘기획 전시’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고 말했다.

그룹전이 개최될 갤러리 민정에서 (왼쪽부터) 변윤주 학생, 최은진 학생, 이건희 학생, 정윤영 작가, 정다겸 학생, 이승미 학생, 남현주 학생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정윤영
그룹전이 개최될 갤러리 민정에서 (왼쪽부터) 변윤주 학생, 최은진 학생, 이건희 학생, 정윤영 작가, 정다겸 학생, 이승미 학생, 남현주 학생이 포즈를 취했다. 사진 정윤영

동국대학교 미술학부 졸업생 6명의 작품전《선명하지 않아도》는 11월 5일까지 갤러리민정(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90-2)에서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