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권쾌복 선생. [사진제공=국가보훈처]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권쾌복 선생. [사진제공=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권쾌복(1921~2009)·배학보(1920~1992)·유흥수(1921~2016) 선생을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권쾌복·배학보·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교 내의 비밀결사인 ‘다혁당 (茶革黨) 사건’의 주요 인물들이다.

다혁당은 항일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해 대구사범학교 전 학년이 참여하는 단체를 만들기 위해 결성됐지만, 5개월 만에 일제에 발각되어 본격적인 활동은 하지도 못하고 와해 됐다.

세 명의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어려운 가정 형편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모습에 매료되어 1937년 4월에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로 입학했다.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배학보 선생. [사진제공=국가보훈처]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배학보 선생. [사진제공=국가보훈처]

 

그러나 민족차별 교육이 자행되던 학교에서 1939년 학생들의 노동력 강제동원과 일본과 조선학생의 마찰로 빚어진 왜관사건으로 많은 대구사범학교 조선인 학생들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드는 원인이 됐다.

세 명의 선생은 왜관사건 이후 조선 역사와 문학 관련 서적, 잡지 등을 읽고 시국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인 ‘백의단’을 결성했으며, 이는 나중에 다혁당으로 발전했다.

1940년에 감시와 통제가 심해지고, 그해 11월 23일 유흥수 선생은 독서회 참가자들과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나 독립할 것을 목표로 하는 비밀결사인 ‘문예부(文藝部)’를 결성했고, 학생(學生) 이라는 잡지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또한 다가올 독립에 대비할 목적으로 학문 분야를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또 하나의 비밀결사인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41년 2월 중순 유흥수 선생은 권쾌복 선생과 배학보 선생 등을 만나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통합된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또한 다혁당은 조직을 교내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타교생 및 일반 사회인까지도 포섭대상으로 하였다. 따라서 결사의 명칭도 당(黨)이라 했으며, 조직으로는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 문예, 예술, 운동부 4개 부서를 두고 기존의 활동을 계승했다. 특히 문예부 산하에 문예창작부와 연구부를 두었는데, 이전의 ‘문예부’와 ‘연구회’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유흥수 선생. [사진제공=국가보훈처]
2021년 2월의 독립운동가 유흥수 선생. [사진제공=국가보훈처]

 다혁당은 당원의 비밀엄수 및 절대복종·주2회 회합과 하급생지도 등을 당규약으로 정하고, 1941년 3월부터 동년 5월까지 세차례 모임을 갖고 당의 활동상황과 조직확대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교내 연습과 학생(주로 일본인)과 심상과 학생(대부분 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철폐시키는 방안도 토의하였다.

권쾌복 선생은 당수를 맡았으며, 배학보 선생은 부당수를 맡고, 유흥수 선생은 문예부 산하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았다. 이렇게 통합되어 활발한 활동을 준비하던 다혁당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하던 정현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한 내용이 발각되어 1941년 7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수사과정에서 다혁당 활동이 발각되어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일제 경찰에 와해됐다. 이후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어 1941년 12월에 35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 시기 비밀결사 사건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이로 인하여 권쾌복 선생도 일경에 붙잡혔으며 그후 2년여동안 미결수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다혁당 사건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항일운동이 침체된 시기에 벌어진 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운동이자 민족운동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쾌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배학보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유흥수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