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한征韓의 1차 목표로 삼은 강화도를 침범한 일본 해군의 운양호와 함장 井上良馨

사무라이시대의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한 일본의 새로운 군대가 한반도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안 의사가 세상에 태어난 해인 1879년을 4년 앞선 1875년이었다.
 
그해 9월에 가고시마 출신의 이노우에 요시가(정상양형井上良馨)가 일본의 최정예함인 운양호雲揚號와 춘일호春日號, 제2정묘함第2丁卯艦을 이끌고 강화도의 초지진草芝鎭에 접근해서 이 진지를 격파하고 이어서 영종도永宗島에 포격을 가하였다.

운양호 침입사건은 깊은 잠에 빠져있던 조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평민 출신의 병사로 편성된 일본군은 프랑스나 미국 양이들처럼 스스로 물러가는 무리가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요구를 하면서 정한론의 마각馬脚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강화도 침범 후에 조선 조정을 대포와 군대로 협박하면서 민활하게 움직여 1876년 2월에 전문 12조로 된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를 채결하였다. 이 조약이 지금까지 강화도조약이니, 병자수호조약이니 하는 이름으로 알려져 내려오고 있는데, 조선은 이 조약에 따라 무역항으로 쓰던 부산 이외에 원산, 인천 2개 항구를 1879년 6월에 개항했고, 이듬해 12월에 하나부사(화방의질花房義質)가 서대문 밖 청수관에 일본 공사관을 개설하고 초대 조선국 주차駐箚 변리공사로 부임했다. 
 

▲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 다이가 훈련시킨 왕궁 시위대. 왕궁경호를 담당하였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때 경복궁을 침범한 일본군에게 괴멸 당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 정부에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게 하여 일본식으로 훈련시켰다. 정부는 이들 신식군대를 구식군대와 차별해서 대우했다.
 
자존심이 상하고 분통이 터진 구식 군대가 가만히 당할 리만은 없었다. 구식군대의 어리석은 폭동-임오군란-이 이렇게 하여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임오군란으로 여러 명의 일본인이 살해당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일본은 이번 기회에 일본군이 대한제국에 합법적으로 주둔하는 구실을 만들어 내었다.
대한제국에 겁을 주어 제물포조약을 체결했고, 그해 8월에 1천2백 명의 일본군이 한성에 입성했다. 그들이 운양호로 함포외교를 시작하면서 의도했던 그대로 대한제국의 백성과 정부가 별 생각 없이 말려들어간 결과였다.

대한제국에 개화파가 일본을 등에 업고 유신을 해 보자고 나선 것이 바로 그때였다. 개화파의 주장인즉 대한제국이 그대로 앉아서 당하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 같으니까 나라를 개혁시켜 일본처럼 열강에 들어가야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 1883년 인천항 개항 후에 제물포에 들어선 일본인 거리

김옥균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1884년 11월, 개화파는 우정국 낙성식에서 쿠데타의 신호탄을 올렸다. 그러나 그들은 정한론의 마각을 감추고 있는 일본에게 이용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일본군과 청국군의 싸움이 되어, 개화파를 지원하던 일본군이 수구파를 지원하던 청군을 깔보고 대비했다가, 우세한 청국군과 친청파 관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여 개화파의 삼일천하는 막을 내렸다. 이 갑신정변으로 일본은 40명의 사망자를 내었다. 지든 이기든 일본의 뜻대로 된 것이었다. 정한론은 좀 더 깊숙이 몸통을 한반도에 밀어 넣었다. 일본군은 육군 2개 대대병력과 군함 7척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일본의 선동과 모략의 책략은 주효하여 조선에서 이러한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백성은 일제의 상인들 농간으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고, 탐관오리들은 들끓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4년 4월 28일 전북 백산白山에서 동학군이 일어났다. 그들은 파죽지세로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여 승리하고 5월 31일 전주성에 입성하였다. 
 
6월 3일 대한제국정부는 청의 원세계에게 청병서請兵書를 보내어, 원군援軍을 요청하였다. 청국정부는 이 요청서를 받고 나서 일본정부에 통보하고, 7일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 청일전쟁 때 출동한 청국군대

일본은 이때를 청국과 싸워 이겨야 할 때라고 판단하고, 동학군 토벌과 아무 상관이 없는 해군과 육전대 병력 420명을 6월 11일 한성에 입성토록 했다.

동학군은 이미 일본군이 출동한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10일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11일 전주성을 철수하여 해산한 뒤였다. 19일 서울에서 파견한 경군京軍도 전주성을 철수하였다.
 
일본은 1개 혼성여단 전 병력을 한성과 그 주변에 주둔시켰다. 7월 18일 조선정부에 다음과 같이 요구해 왔다. 22일까지 회담을 요구하는 문서였다.

 1. 일본에서 부산 간에 군용선을 가설한다.
 2.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군의 병영을 건설하라.
 3. 청군을 조속히 철수시켜라.
 4. 대,청 간에 독립저촉조약을 폐기하라.

황제폐하 이하 모든 대신이 할 말을 잃었다. 대한국정부는 회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의 승낙일 수 있었고, 항의일 수도 있었다. 일본정부에서 보면 승낙이고 대한국 정부에서 보면 항의였다.  

7월 24일 21연대가 경복궁을 포위했다. 궁성을 수비중인 경군 평양병이 담을 넘어오는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전투는 불이 붙었다. 궁성수비군은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열세였다. 결과는 평양병 56명이 사살되었고, 황제는 감금되었고, 대포 30문, 기관포 8문, 신식소총 2,000정, 화승총, 군마 등을 탈취당했다. 
 

▲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인천을 통하여 서울로 들어오고 있다

이때, 대궐에서는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공사와 내통하면서 대원군을 옹립하겠다는 무리들이 나타나서 경군의 전투를 방해한 것이었다. 김가진, 안경수, 정운봉 이런 자들이었다. 그들의 뒤에서 오가모도 류노스케라는 일본육군 대위 출신의 낭인이 첩자 노릇을 하며 이들 편에 붙어 있었다. 이자가 후에 민 황후를 시해하였다.
 
그들은 일군이 대궐을 점령하자, 황제와 황태자를 외딴 방에 가두고, 저희끼리 모여서 갑오개혁을 시작하였다. 누구를 위한 개혁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일본의 속셈을 눈치 채지 못한 청군 4,165명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청국군은 그들이 싸워야 할 상대가 이미 해산하여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동학군이 아니라 일본군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였다. 청국군은 대한국의 종주국의 위신과 체면을 지켜야 하였다. 일본군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준비에 들어가야 하였다. 23, 24 양일에 걸쳐 청국군은 4,165명 중에서 3,500명을 차출하여 섭사성을 지휘관으로 하여 성환의 월봉산에 보냈고, 나머지 1,500명이 공주를 지키게 하였다.
 
25일 10시에 일본군 혼성여단은 한성에 약간의 경비병력을 남기고 아산으로 출동하였다. 일본공사관은 용산, 노량진, 동작나루에서 헌병과 순사를 풀어 닥치는 대로 우마를 압수해 갔다. 병참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청국군이 일본군과 만난 곳이 성환 북쪽에 있는 소사였다. 하인의 시중을 받아가며 싸워야 하는 청국군과 평민으로 편성된 일본군의 싸움이었다. 

▲ 해산당한 대한군 훈련대. 일본공사관 무관 남뢰楠瀬 육군 중좌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10月8日 당일에 새 군복을 지급받았다.

이 전투에서 청국군은 패하여 홍성, 강원도를 거쳐 평양으로 도망쳤다. 한편 아산의 풍도에서도 일본해군이 청국해군을 수장시켜버렸다. 청국과 일본의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이어서 평양, 요동 등지에서 벌인 전투에서도 승리하여, 1895년 4월에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청국은 대한국의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하였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였다. 청국은 대한국을 넘보지 못할 지위로 전락하였다. 그 결과 대한국에서는 친청파가 실각하고 친일파가 조정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본에 압력을 가하여 청국에서 빼앗은 대만과 팽호도를 돌려주게 하였다. 대한제국의 조정은 크게 흔들렸다. 일본보다 더 센 러시아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친일파가 몰락하고 친러파가 득세하였다. 친러파는 조정에서 친일파를 영원히 제거하기 위하여 어리석고도 기발한 결정을 내렸다.
 
친일군대인 훈련대를 해산하고 궁내부대신에 민영준을 임명하였다. 정부는 이 결정을 통보하기 위하여 군부대신 안경수를 일본공사관에 보냈다. 그날이 8월 19일, 군대해산 날짜는 1895년 8월 20일이었다. 이리하여 민 황후 시해사건이 터지게 되는 것인데, 이 해의 사건을 을미사건이라 하였다.

훈련대의 2대대장이 그의 부대를 이끌고 시해사건에 가담하고, 미우라(三浦 梧樓) 공사의 지휘 하에 일본군 대위 출신의 오카모도와 외무성 소속의 하기와라(萩原秀次郞)가 궁성으로 침입하는 낭인 패거리를 지휘했다. 낭인 패거리를 모아 준 자는 일본인 건달로 한성에 와서 한성신보를 발행하고 있는 아다치(安達謙藏)이라는 자였다. 일본군은 후비보병後備步兵 제18대대가 미야하라 대대장의 지휘 하에 대궐을 공격하였다.
 
이때, 대궐을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 다이 장군이 훈련시킨 시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황후는 오카모토의 칼날 아래 쓰러지고, 대원군은 일본군의 비호 하에 다시 권좌로 나왔다.(계속)

 

▲ 소설가 노중평

 
1985년 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에 단편소설 <정선아리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천지신명>, <사라진 역사 1만년>, <마고의 세계> 등 30여 권을 저술했다. 국가로부터 옥조근정훈장, 근정포장, 대통령 표창장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문인협회원, 한민족단체연합 공동고문, 한민족원로회원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