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선량한 시민보다는 장로교 신도로 만들려고 하는군."
가깝게 지내던 목사가 가끔 친구로서 찾아와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일요일 예배에 참석했던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실망하였다. 목사는 주로 신학적인 논쟁이나 교파의 교리를 설명하는 데 설교를 집중했다. 그 설교가 아주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게 느껴졌고 유익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몇 번 더 교회에 나갔다. 목사의 설교는 다 좋은 말이었지만 벤자민이 기대했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거기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벤자민은 다시는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가지 않았다.

미국의 국부(國父)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정임 옮김, 한문화 간, 2015)을 읽을 때마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건너간 영국 청교도들의 경건한 분위기가 압도하는 사회에서 독실한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장로교의 경건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사람이 개신교에 보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벤자민이 그렇다고 종교적 원칙을 모두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에 세상을 창조했고 그의 섭리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 하나님이 가장 만족스러워 하는 봉사는 타인에게 선을 행하는 것, 인간의 영혼은 불명하며 모든 죄악은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 덕행은 살아서가 아니라면 죽어서라도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는 것 등을 믿었다. 벤자민은 이러한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지에서 벤자민은 모든 종교를 존중했다. 당시 종교가 모두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존중의 정도가 다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벤자민은 아무리 나쁜 종교라도 좋은 점은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종교를 존중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해칠 만한 논쟁을 피했다. 벤자민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여러 종파가 자신들 믿음만이 진리이고 자신들과 다르면 모두 틀렸다고 우기는 일이 많았다. 벤자민은 그들은 안개 속을 걷는 사람과 같다고 보았다. 안개 속에서는 주위만 밝아 보일뿐 자신의 앞이나 뒤, 양 옆에 있는 사람은 모두 안개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도 안개에 싸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벤자민의 이런 태도는 그 가족사를 보면 독특하다. 벤자민의 조상은 일찍이 종교 개혁 운동에 가담하여 메리여왕 치세(1543~1567)동안 청교도로 일관했다. 벤자민의 아버지 조사이어 프랭클린 또한 독실한 청교도였다. 찰스 2세의 치세가 끝날 무렵 비국교도에 대한 박해와 개종 회유에 조사이어 가족 모두 영국 국교도가 되었는데 형 벤자민-벤자민 프랭클린의 이름은 여기서 따왔다-과 조사이어는 일생동안 개종하지 않았다. 훗날 조사이어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로 떠나 뉴잉글랜드에 정착했다.
아버지 조사이어는 아들 벤자민이 목사가 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교회에 십일조를 헌납하듯 아들 하나를 바치고 싶어 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벤자민을 라틴어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학비 부담이 버거워 아버지는 1년이 지나 학교를 그만두게 한다. 벤자민은 열두 살의 나이에 집을 떠나 형의 인쇄소에서 견습공 생활을 하면서 목사의 길과는 완전히 멀어졌다.


아버지와 떨어져 생활하면서 벤자민은 경건한 종교적 생활에서도 멀어졌다. 이 무렵 벤자민은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혼자 남아 공부를 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는 아버지 밑에 있을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벤자민도 교회에 나가는 것을 의무로 여기고 있었지만,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한 벤자민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글을 썼다. 인쇄소에서 받은 돈으로 식비를 줄여가며 책을 구입했다. 책방의 견습 직원과 친구가 되어 책을 빌려 밤새 읽고 아침 일찍 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공부하여 열다섯 살쯤 되었을 때 여러 교리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를 논한 많은 책을 읽으면서 성서(聖書) 자체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때 접한 몇 권의 책을 읽고 벤자민은 철저한 이신론자(理神論者)가 되었다. 이신론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긴 했지만 관여는 하지 않고 우주는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사상이다. 벤자민은 이신론을 반박하는 책을 읽고 오히려 이신론에 끌렸다. 인용된 이신론자들의 주장이 그 반론보다 훨씬 더 그럴듯해 보였던 것이다. 이제 벤자민에게 성서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행동을 성서에서 금지한다고 해서 그것이 악한 행동이 아니며, 성서에서 명한다고 해서 선한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리 중 신의 영원한 뜻, 선민사상, 영원한 벌(罰) 같은 것은 믿지도 않았다.
 

그는 20세에 인격완성을 위한 13가지 덕목을 특정 종파의 교리를 넣지 않았다.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이 덕목을 활용해서 큰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책으로 출판했을 때 어떤 종파의 사람이든 책의 내용에 편견을 갖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적어도 독실한 청교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열린 자세로 살아간 벤자민은 신문 발행인, 저술가, 과학자, 정치가, 외교관으로 다방면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정 교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거의 모든 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벤자민을 ‘미국의 르네상스인’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