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만화박물관을 찾은 것은 ‘지지 않는 꽃 - 앙코르 전’을 보기 위해서다. 전시작품은 프랑스 앙굴렘에서 열린 국제 만화축제(1월 30일-2월 2일)에서 선보인 우리작가들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다.

모두 24점, 100컷이나 되는 작품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참상을 만화로 풀어낸 한(恨) 많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다. 차분히 가라앉아있는 전시장 관람객들은 말을 잊었다. 어디선가 가끔 젖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작품 앞에서 돌부처 마냥 표정이 굳어 있는 70대 할아버지도 침울했다. 사연이 있는 것 같이 보였으나 아는 척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지우고 싶은 상처를 건드릴까 조심스러웠다.

작품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절망, 고통, 그리움, 잔악성, 조직적인 성 폭행 등 말하지 않고 말했고, 그리지 않고 가슴으로 말했다. 「14세 소녀의 봄」, 「지지 않는 꽃」, 「끝나지 않는 길」,「70년 동안의 악몽」, 「비밀」, 「나비의 노래」, 「그래도 희망」…….

작품 「오리발 니뽄도」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일본군 군홧발에 짓밟힌 10대 소녀들은 진저리쳤다. 독사처럼 대가리를 쳐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승냥이들 앞에서 조선의 소녀들은 더 이상 버티질 못했다. 항복했던 패자는 막말을 하고 ‘가까운 이웃’의 할머니 가슴에 피맺힌 멍은 여전히 삭혀지지 않고 있다.

파리 현지 국제 만화전시회에 앞서 프랑크 볼드 조직위원장은 위안부 문제는 그동안 감춰온 역사를 알리는 것일 뿐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고 밝혔으나 탈을 쓴 이웃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위안부의 강제동원은 없었다, 한국작품전시를 중지하라, 심지어 일본은 앞으로 국제 만화축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도 협박했단다. 일본은 이미 프랑스 만화시장을 30% 이상 점령하고 있어 발언권이 강하다고 했다. 역사를 훔치고도 뻔뻔스러운 또 다른 이웃의 얼굴이 떠올랐다. 반성문을 쓸 줄 모르는 사람들, 간교하고 교만한 모습이다.

70년대 초 일본에 갔을 때는 그들이 너무 당당해 충격을 받았다. 해외출장이 처음인데다가 간 곳은 서먹한 동경이다. 느끼고 듣고 보는 것마다 서툴렀고 긴장했다. 잘사는 일본이 부러워 나도 모르게 작아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 몸을 움츠리기도 했다.

동경 역 앞길은 도로 공사 중이라 행인들이 이리저리 어수선했다. 고함이 들렸다. 단말마의 비명이다. 살풀이 굿이다. 1인 데모를 하는 패잔병의 얼굴에는 살기가 돌았다. 입고 있는 ‘대일본제국’의 낡은 군복은 추리했으나 가슴에는 광택을 낸 수십 개의 훈장을 매달고 있다. 한쪽에는 긴 총검 끝에 매달린 대형 일장기를, 다른 손 주먹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덴노헤이카(천황폐하)만세, 덴노헤이카 만세’ 행인들의 반응도 두려웠다. 지나치는 이들도 있었으나 손을 흔들어 주거나 박수를 쳐주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진주만을 습격했던 그 날의 ‘영광’을 품고 있는 일본의 숨어있는 얼굴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해방직후 어른들이 걱정했던 말이 있다.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고, 왜놈들은 도망치고 있으나 언젠가는 또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출장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도 일장기만 보면 동경 역 앞에서 외치던 패잔병의 영상이 떠올라 꺼림직 했다. 일본은 먼 나라, 불편한 이웃이다. 주한 일본 대사관이 내걸고 있는 일장기는 여전히 기세를 높이고 있다.

2011년 일본은 지옥이었다. 대지진과 쓰나미, 죽음의 방사능 사고 등 섬나라는 아수라장이 됐다. 가까운 이웃은 자신의 일같이 걱정하고 서둘렀다. 성금도 모으고 구조대를 보냈다. 언론도 흥분했다. 재해현장을 중계하고 모금운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돌아온 화답은 ‘역사 지우기’ 였다. 다시 본색을 들어낸 것이다. 독도는 일본 땅이다. 새 학기부터 공급키로 한 11가지 교과서 내용을 개편키로 했다. 뿌리부터 진실을 바꾸겠다는 치밀한 계교다.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이름)는 원래 일본의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고 되풀이 했다. 가미가제의 후예들은 섬사람의 기질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의 토종견인 ‘유메’는 야성이 강하고 공격적이라고 했다. 냄새를 잘 맡고 교활해 먹이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우선 꼬리를 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는 언제인가 미국 부시 대통령 앞에서 재롱을 피웠단다. “글로리, 글로리 할렐루야…….” 속셈은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얼굴은 역시 그랬다.

지난연말 야스쿠니 신사(情國神社)를 참배했던 아베 일본 총리는 돌격명령을 내렸다. 또 니뽄도를 휘두르고 역사 바꾸기에 앞장서고 있다. ‘위안부를 동원하지 않았다.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지원하자, 독도는 일본이 지켜야 할 땅이다.’ 이제는 언론까지 동원하고 있다. NHK일본 방송은 자칭 공정한 보도의 상징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나 최근 회장 자리를 하사받은 인물은 또 망언했다. 전쟁터에서는 항상 위안부가 있었다고 했다. 총검으로 위협 전쟁터에 끌려간 피해자를 자발적으로 응해 몸을 팔던 거리의 여자들과 똑같다고 억지 부리고 있다. 짐승들은 역사의 흑백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했다.

출장 중에 우연히 일본인들이 자랑하고 있는 가정교육의 원칙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부모들은 자녀들이 사귀고 있는 친구 숫자를 따지고 한국 어머니들은 학교 시험성적을 챙긴다고 했으나, 일본은 이웃을 먼저 걱정하다고 했다. 우월감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자식을 살핀다. 오늘 친구나 선생님을 괴롭히지는 않았느냐고 확인했단다. 일본인의 생활 철학을 화(和)라고 했다. 화는 이웃과의 합(合)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참회록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전 세계를 감동시켰던 빌리 브란트 옛 서독 총리는 70년대 폴란드를 방문했다. 나치 정권은 전쟁 중에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다. 피해당한 나라를 찾은 서독 총리는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반성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질척질척 비가 내렸으나 우산도 쓰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반성문을 쓰고 있는 가해자의 자세를 확인한 피해자들은 가슴을 풀고 점점 용서키로 했다고 전했다. 용기 있는 정치인의 자세에 세계는 박수를 쳤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사람이나 일어난 것은 독일 전체”라는 명언을 남겼다.

앙코르 전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젊은이가 다가왔다. 작품을 돌아본 기분을 듣고 싶단다. 자신은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인터넷 뉴스 기자라고 했다. 나는 앙코르 작품전을 부천에서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순회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특히 분 바르고 역사를 바꾸기 위해 성형수술하고 있는 일본의 얼굴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마디 덧붙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나라에서도 진상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으나 무엇인가 허전하고 답답했다.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워졌다. 평생 노략질하는 나쁜 사람들 난쟁이 이웃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 백승국 전 언론인, 수필가

백승국 전 언론인, 수필가

[문예시조] 등단(2004년), 전) 기업홍보연구소 소장, 연합통신(연합뉴스, YTN 전신) 국장/논설실장, 동양통신 정치/경제/사회부 차장, 대종실업 상임고문, 청탑수필동인회, 한국수필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