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은 창경원이었다. 사직단은 사직공원이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고 벌어진 일이다. 한민족의 얼이 깃든 문화유산이 동물원이자 공원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른바 일제에 의한 ‘민족혼 말살’ 정책이었다.

문화재보호재단 예올(이사장 김영명)은 26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사직단, 이대로 좋은가?-사직단 복원과 활용을 위한 제안’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사직단은 어떤 곳인가? 다시 복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 문화재보호재단 예올(이사장 김영명)은 26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사직단, 이대로 좋은가?-사직단 복원과 활용을 위한 제안’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사진은 종합토론 하는 모습.

환구단 제례는 천자만, 사직단 제례는 ‘누구나’

먼저 사직단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김문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사직단 제례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발표했다.

"사직단 제례는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올리는 제사이다. 사람은 땅이 아니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길러질 수 없다. 따라서 나라를 세우면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을 세워 백성을 살게 하고 길러주는 공덕에 보답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직단 제례와 환구단 제례의 차이점이다.

"하늘의 상제(上帝)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환구단 제례는 천자만 거행할 수 있지만, 사직단 제례는 천자와 제후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도 정해진 규모와 형식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사직단은 백제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서 사직단을 세웠고, 고려는 개성 안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제례 제도를 정비했다. 조선시대에 사직단 제례는 국가제례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국조오례의』에서 국가 제사의 서열은 종묘보다 사직이 먼저였다. 그러니깐 사직, 종묘, 영녕전의 순서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탄생하고 환구단이 설치되면서 서열이 바뀐다. 환구단, 종묘, 영녕전, 사직의 순서로 조정된다.

▲ 서울 사직단이다. 이곳에서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다.(제공=예올)

사직단의 수난시대…공원에서 문화, 체육 시설로

그렇다면 언제부터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바뀌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 전봉희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근 현대사를 통해 본 사직단 변화과정과 평가, 복원의 당위성"에서 1920년대라고 밝혔다.

"사직단 일원의 경관에 큰 변화가 크게 생긴 것은 1920년대 시작된 공원화 계획에 의한 것이다. 1921년 경성부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직단 부지를 차입하여 사직단을 헐고 운동장이 들어선 공원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23년 사직단 공원이 개장됐다. 이 과정에서 공원 설비공사가 진행됐다. 1923년 7월의 대납량대 설치, 1924년 5월의 공원 주위 도로 확장, 1924년 11월 공원 내 산책로와 벤치 설치 등이 그것이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사직공원은 인왕산과 연계된 녹지공원이자 사회복지활동의 장소, 문화유산을 갖춘 공원으로 인식됐다는 것이 전 교수의 주장이다. 해방 이후 사직단은 도시개조사업으로 또 한 번 수난을 겪는다.

“사직단 일원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김현옥 시장 재임(1966-70)할 때에 벌인 일련의 도시개조 사업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67년에 사직터널이 개통되었고, 사직공원과 독립문간의 도로가 확장되며 사직단 정문의 위치가 이전되었다.”

이어 1968년 25m×50m 국제 규격의 사직파라다이스수영장이 개장됐다. 파고다 공원 뒤에 있던 종로도서관이 사직공원 내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했다. 같은 해 사직단 서쪽에는 단군전과 사직단기념관이 새로 건립됐다. 1969년에는 율곡 이이(李珥) 선생상이 설치되고 사직파출소가 건립됐다. 1970년에는 신사임당 동상도 설치되는 등 체육·문화·교통·안보·종교시설 등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 문화재보호재단 예올(이사장 김영명)은 26일 서울역사박물관 대강당에서 ‘사직단, 이대로 좋은가?-사직단 복원과 활용을 위한 제안’을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다. 사진은 종합토론 하는 모습.

사직단 복원 이후가 더 중요하다

지난 13일 국회에 ‘사직단 복원 촉구 결의안’이 제출됐다. 내년도에는 정부예산에 사직단 복원을 위한 종합정비계획 예산이 책정됐다. 이는 서울시, 종로구청, 문화재청, 예올 등이 30년 동안 추진해온 결과다. 하지만 낙관은 이르다.

조경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복원의 여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시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광화문 광장 등 중요한 도시프로젝트는 구상이 마련된 후 시민의식이 바뀌면서 사업이 시행되는 데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라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사직단 회복을 위한 도시적 기획과 전략’에서 민관이 함께하는 ‘사직단 복원 추진협의회’를 제안했다.

현재 사직단에서 인왕산 능선에 이르는 범위에는 체육시설, 율곡이이·신사임당 동상, 대한민국 어머니 헌장비, 종로도서관, 단군성전, 경로당, 국궁전수관, 황학정 등이 있다. 이들 시설은 각기 다른 주체들이 맡고 있다. 따라서 각 주체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추진협의회를 민간이 주도한다면 복원의 필요성을 대국민에게 홍보하고 기금(중기복원계획에 따른 소요예산 130억 원)도 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1년에 1~2회 제례의식만 거행하는 공간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활용하자는 주장도 관심을 끈다.

"사직단이 복원되면서 사직대제의 재현을 위해서 사직제악 등과 같은 악무의 복원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사직단 일대의 공간을 국악, 한국무용의 공연장 및 한국복식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로 활용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검토해야 한다.”

주민의 불편과 경제성을 고려해야

한편 종합토론에서는 사직단 복원이 진행되면서 들어갈 막대한 예산과 인접 주민들의 불편 등이 지적됐다.

임희진 서울연구원 도시공간연구실장은 “각 시설의 관리주체가 다르고 대민시설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편과 민원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라며 “기존 점유시설들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터가 가진 의미를 부각시키고 경계를 표시해서 영역성을 알리고 시민과 전문가의 공감대를 끌어내어 단계적으로 회복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임 실장은 관련 부서들을 공론에 끌어내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밝혔다.

홍찬식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사직단 복원은 장소가 도심에 있는 만큼 부동산 가격을 감안하면 상당한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풍납토성 복원 사업의 경우 1997년 발굴 사업이 이뤄지고 김대중 정부 때 이미 복원을 결정했으나 지지부진하다. 엄청난 규모의 예산 탓”이라고 말했다.

홍 위원은 경복궁 서촌 등 대표적인 관광자원과 연계해 경제성을 이끌어낼 방안을 모색해야한다고 지적했다.

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교수는 “20세기의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 나아가 현재 흉물이라고 할 수 있는 공공시설을 애용하는 인접 지역의 주민 욕구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