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터졌을 때 내 나이 20살도 안 되던 때였지. 처음 전쟁이 났을 때는 전쟁이 뭔지도 몰랐어. 그래도 내가 사는 고향만큼은 내 손으로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지. 나이도 어리고 배운 건 없었어도 그 마음 하나만큼은 투철했어. 그 마음이 나라에 대한 사랑 아니겠어?"

세월의 흐름에 희끗희끗해진 머릿결만큼 옛날 기억도 희미해졌을 법 한데 그의 이야기는 막힘이 없다. 어렵고 고된 시간이었기에 뇌리에 더 강하게 남아있는 것일까. 빛바랜 소싯적 이야기라지만 술술 풀리는 맛에 60여 년 전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히 들린다.

5일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 성길원 옹(83)을 만나기 위해 서울 구로구 개봉동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다. 현충일을 맞는 오늘의 비(非)전쟁세대,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나라를 지켜 낸 이들의 노고를 들려주고 싶어서였다.

▲ 한국전쟁 겪은 성길원 옹(83)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바로 군대 가서 싸우지는 못했어. 19살이라 징병 대상이 아니었거든. 그다음 해 군대 들어갈 때까지 마을에 남아 의병 경찰로 인민군 무장공비와 싸웠지. 매일 밤 총을 들고 보초를 섰는데, 의외로 죽을 만큼 무섭지는 않았어. 적을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었던 것 같아."

성 옹은 그 시절 전쟁으로 집에 붙어있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전시(戰時) 상황이다 보니 나라에서 젊은 사람들을 불러다 훈련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당연히 집안일은 거들지 못했다. 늙은 아버지에게 힘든 농사도 다 맡겨야만 했다.

이듬해 그는 바로 군대에 소집되었다.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중 퇴소 며칠을 앞두고 몸에 탈이 났다. 복막염으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한 어머니를 고향에 남겨 두고 온 것이 못내 가슴에 걸렸다. 걱정으로 제대로 먹지도 잘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오늘내일할 만큼 굉장히 많이 편찮으셨어. 하지만 그렇다고 군에 안 갈 수가 있나? 내 개인 사정이야 어찌 됐던 우선 나랏일을 먼저 따라야지. 효도 중요하지만 효 때문에 충을 거스를 수는 없지 않아? 그런 마음으로는 아무도 나라 못 지켜."

성 옹은 병으로 의무대에 입원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곳에서 근무하게 됐다. 의무대는 늘 부상병으로 붐볐다. 전쟁에서 다친 병사들이 하루에도 수십 명씩 군 병원으로 실려왔다. 폭탄이 터져 팔, 다리가 잘린 사람, 파편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 된 사람 등 병실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그는 지금도 그때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타깝다고 한다. 국가를 위해 목숨 던진 일은 자랑스럽지만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이 짠하단다. 지금은 그럴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며 허허 웃는다.

"요즘은 군대 안 가려고 하는 젊은이가 옛날보다 많이 늘어난 것 같아. 그래도 군대는 다녀와야 해. 여기가 내 나라 내 땅인데,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우리 집을 지켜줘? 의무적으로라도 다녀오는 게 중요하다고."

성 옹은 요즘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옛날 사람에 비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희박해졌다고는 하지만, 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다 자기 나라 잘되길 바라지 않겠느냐"며 "그게 나라 사랑의 시작이고 충의 뿌리"라고 했다.
 

 [기사 바로가기 클릭]

▶ [현충일 기획시리즈] 1편 "충(忠)을 기리는 날은 새 생명을 심는 가장 좋은 날로"

▶ [현충일 기획시리즈] 2편 "현충원에서 민족과 나라의 충심을 느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