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에 발간된 최재석(1926~2016) 교수의 저서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이 최근 만권당에서 롯데학술총서로 새로 발간됐다.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은 정식 책 제목 《백제의 야마토왜(大和倭)와 백제 야마토왜의 일본으로로의 변신 과정》을 줄인 것으로 일본 고대국가로서의 야마토왜의 형성·구조·발전·변신과정에 관한 열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재석 지음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표지. 이미지 만권당
최재석 지음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 표지. 이미지 만권당

 

저자는 먼저 “야마토왜는 백제에 의해 건국되고 경영된 직할 영토였다”는 점을 밝혀냈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열대 내 국가 형성사는 북미나 호주처럼 신천지에 집단 이주한 이주민의 개척사로 시작된다. 야마토왜의 역사는 5세기 초 한국에서의 전란을 피해 야마토 지역에 집단 이주한 백제민의 정착·개척사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치적으로 저수지, 수로나 농경지 개척과 같은 사업에 종사했으나, 6세기부터는 백제에서 임명되어 파견된 왕이 중심이 되어 국가형태를 갖추었다. 이로부터 일정 기간 야마토왜의 총독 역할을 하는 백제의 왕자나 고관이 파견되고, 야마토왜의 국가 행정을 관리하기 위해 백제 관인이 교대로 파견되기도 했다. 야마토왜에서 백제의 관위(官位)가 사용되고 백제가 잡은 포로가 야마토왜로 송치되거나 백제의 장군이 기타큐슈(北九州)를 방위한 현상에서도 백제와 야마토왜의 관계를 알 수 있다.

663년 이전 야마토왜가 백제의 직할 영토라는 증거로 관련 내용을 13가지 들고 있다. 1. 일본열도 내 한민족과 원주민의 수나 야마토왜 내 백제인과 원주민의 수는 각각 9:1이고 문화 수준 차이도 컸다. 2.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의 국명을 딴 지명이 일본열도를 뒤덮고 있고, 야마토왜의 왕궁명, 지역명, 사물명에도 ‘백제’라는 명칭이 붙었다. 3. 한반도의 횡혈식석실, 도질토기, U자형 쟁기끝, 마구(馬具) 등이 일본열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오진릉(應神陵), 닌토쿠릉(仁德陵)의 출토품도 한국의 출토품과 흡사하다. 4. 야마토왜의 개척은 백제에서 온 집단 이주민에 의해 시작, 지속되었다. 5. 백제의 관위가 시종 그대로 야마토왜에서 사용되었다. 6. 백제는 야마토왜에 관인 등을 일정 기간 파견해 야마토왜를 경영했으며, 야마토왜의 불교 일체(승려 파견, 사찰 건립, 불상ㆍ불사리 보냄)를 직접 경영했다. 7. 백제는 전쟁 포로를 아먀토왜에 송치해 그 노동력을 이용했다. 8. 백제는 왕자, 왕족을 파견해 야먀토왜의 정무 보고를 받고 통치했다. 9. 야마토왜의 왕이 백제 사인(使人)에게 백제 왕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말했으며, 당시에는 백제는 ‘본국[종주국(宗主國)]으로, 백제 왕을 ‘형(兄)왕’으로 의식했다. 10. 야마토왜의 해외수송 수단은 백제와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다. 11. 왕의 거처는 맨땅에 기둥을 박고 띠로 이은 집인 데 비해 백제가 직영한 객관(客館)과 불사(佛寺)는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운 기와집이다. 12. 백제의 장군이 백제에서 야마토왜로 후퇴해 그곳을 방어했다. 13. 백제 패망 후 이주한 지배층은 백제 관위에 상응하는 관위를 받았다.

저자는 또한 《일본서기》의 이주자에 관한 자료를 분석해 이주민은 거의 전부 한민족임을 확인했다. 이는 ①중국인은 일본에 이주해야 할 이유가 없는 점, ②날씨가 좋으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는 서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근거리에 있다는 점, ③고구려와 신라의 해상수송 능력의 차이, ④나라 시대까지도 일본인들(생물학적으로는 한민족이다)이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었다는 점, ⑤일본 사서(《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萬葉集》) 어느 곳이든 조작되지 않은 부분에는 지금도 한국어 또는 한국식 한자가 남아있다는 점에 의해 뒷받침된다.

저자는 야마토왜를 건설한 사람이 백제 사람이고 백제인이라는 긍지를 갖는 백제인이 일본의 천왕이 되었다며 일본 원주민의 수와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의 수의 비교나 이 양자간의 제반 문화 수준의 차이의 시각에서도 일본 고대 천왕은 일본의 원주민이 아니라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결론은 일본열도 전역을 뒤덮고 있는 한국 국명을 본뜬 수많은 지명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저자는 “일본인(원주민)이 대륙 문화를 수입하거나 도래인의 힘을 빌려 일본 고대국가를 건설했다는 주장은 완전한 주객전도이며 사실의 철저한 은폐”라고 설명한다. “건축, 기직(機織)이나 금속공예는 물론이고 문자도 말도 철제 농기구도 없고 밭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일본에 고대국가(야마토 정권)를 건설하고 고대 사회를 개척한 사람은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한민족(백제인)이며 그것도 일본 원주민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의 한민족이었던 것이다.”

야마토왜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어떠했을까? 저자에 따르면 야마토왜가 백제에 의해 경영되었다 하더라도 야마토왜는 고구려와 신라에도 유학생들 파견했으며, 또 신라에는 수없이 사절을 파견했다. 또 왕실의 교육 담당자와 시의까지도 백제인뿐만 아니라 고구려인, 신라인을 초빙했다. 이 밖에 야먀토왜에는 여러 집단의 고구려인, 신라인이 거주하며 활동했지만, 백제 패망 후 유학생, 사절 등의 해상수송을 신라에 의존한 것이나 신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실에 대한 칙사 대접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야마토왜는 상당 기간 신라에 예속되었을 것으로 저자는 본다.

야마토왜는 백제 패망까지는 궁, 거주지, 사찰, 심지어는 왕의 시신안치소 등의 이름에도 백제라는 것을 표시해 백제 사람에 의해 경영되었다. 그러나 종주국인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지배층이 백제의 관위가 통용되고 백제가 경영하고 있던 야마토왜에 대거 이주하자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호를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만드는 동시에 야마토왜의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거짓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첫째, 야마토왜가 한국 역사보도 더 오래되었고, 둘째 야마토왜는 처음부터 독립국가였으며, 셋째,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세 가지 항목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저자는 소개했다.

이러한 역사 왜곡을 연구한 저자는 일본 고대사학자들의 거의 전부가 메이지(明治)시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사, 특히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이 조작되었다고 그렇게 집요하게 한결같이 주장하는 근본 이유를 더욱 확신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 고대사학자들은 일본 고대사의 진실(야마토왜는 백제에 의해 건국되고 경영된 직할 영토였다)을 은폐하고 허위 고대사(일본사가 한국사보다 오래되고, 일본은 처음부터 독립국가였으며,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를 주장하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조작, 전설일 뿐이라고 왜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 이유와 뿌리를 알려면 이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을 읽어야 한다.

“일본 고대사 및 고대 한일관계사의 진실 은폐는 오늘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일본 고대사는 《일본서기》를 편찬한 720년부터 치더라도 오늘날까지 1,200여 년 동안 줄곧 은폐·왜곡되어 왔으며, 필자의 사견으로는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이 태도는 그대로 계승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진실 은폐의 정도와 왜곡의 정도가 8세기보다 9세기, 19세기보다 20세기에 더 커지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시대 우리가 《백제의 야마토왜와 일본화 과정》를 읽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일본의 역사 은폐·왜곡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