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 역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해가 4월 10일(월) 고국산천으로 봉환됐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에서 주인공 고애신(역 김태리)의 마지막 대사 “독립된 조국에서 다시 봅시다(see you again)”가 황기환 지사 순국 100년 만에 실현됐다.

국가보훈처는 현지 추모식 등의 일정을 진행한 뒤,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모시고 4월 9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을 출발, 10일(월) 오전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 역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해가 4월 10일(월) 고국산천으로 봉환됐다. 이미지 국가보훈처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 초이’ 역의 실존 인물인 황기환 애국지사(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의 유해가 4월 10일(월) 고국산천으로 봉환됐다. 이미지 국가보훈처

 

박민식 국가보훈처장은 인천공항 들어온 여객기에서 하기(下旗)되는 유해를 직접 영접한 뒤 영정을 들고 운구에 나섰다. 황기환 지사의 유해를 실은 운구 차량이 대전현충원에 도착한 후 국가보훈처는 대전현충원 현충탑 앞에서 유해 봉환식을 거행했다.

봉환식에서 후손이 없어 무적(無籍)으로 남아있던 황기환 지사의 가족관계 등록이 헌정됐다.

황기환 지사는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 제정(1912년) 이전 독립운동을 위해 국외로 이주하여 대한민국의 공적서류상 적(籍)을 한 번도 갖지 못했지만, 국가보훈처가 이번에 가족관계 등록을 창설하여 완전한 대한국인(大韓國人)이 되었다.

특히, 등록기준지는 황기환 지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관으로 머나먼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점을 고려하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통일로 279-24)’으로 부여했다.

황기환 지사의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등록기준지를 비롯해 성명과 성별, 그리고 최근 국가보훈처가 발굴한 제1차 세계대전 미군 참전자 등록 카드에 명시된 출생연월일(1886년 4월 4일)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로써,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윤동주 시인, 송몽규 지사 등 167명에 대해 가족관계 등록을 창설한 데 이어, 올해 2월 제104주년 3·1절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32명의 가족관계 등록을 추가로 창설했다.

이날 봉환된 황기환 지사 유해는 독립유공자 7묘역에서 안장됐다.

황기환 지사의 유해 봉환을 위해 국가보훈처는 2019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족보나 유족을 확인할 수 있는 공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법원의 승인을 받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국가보훈처와 뉴욕총영사관의 적극적인 설득과 노력을 통해 황 지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 측과 올해 1월 31일(현지시간) 파묘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10년여 만에 유해봉환이 이루어졌다.

1886년 4월 4일 평남 순천에서 태어난 황기환 지사는 1904년, 19세가 되던 해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로 증기선(GAELIC호)을 타고 입항했다.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활동하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가 주도하여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이다. 1906년 6월까지 레드랜드 지회의 부회장을 맡았고, 1909년까지 지방회원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8년 5월 18일 미군에 자원입대한 뒤 전쟁에 참전하여 유럽전선에서 활약했다. 소대장으로 중상자 구호를 담당하며 독일 베를린에 입성한 부대를 이끌었다.

황 지사는 종전(1918년 11월 11일) 이후에도 유럽에 남아 거주했으며, 1919년 6월 파리로 이동해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파리에 온 구미주차한국위원회 원지역 대표 김규식을 도와 대표단 사무를 협조하고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독립 선전 활동을 벌였다.‘통신전(通信箋, 유럽내 각 언론기관과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 및 저명인사 등에게 송부하기 위해 만든 안내문)’을 발행하여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황 지사는 1919년 8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맡게 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자 파리위원부의 실질적인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침략과 통치 실상을 널리 알렸고 1919년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문제를 보고했다.

파리에서 1919년 8월 23일자 프랑스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8월 25일자 <뉴욕 헤럴드>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한국에 자치권을 부여하겠다’는 일본의 <로이터 통신>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뉴욕 헤럴드> 인터뷰에서 “일본이 문명화된 세계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이고, 그 계획은 분명 실패할 것이며 한국인들은 절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이 한국을 일본의 일부로 고집하는 한 극동에서의 평화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황 지사는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며,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의 완전한 독립”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황기환 지사의 <뉴욕 헤럴드> 인터뷰 기사는 <라 파트리>, <라 리브르 파롤>, <봉수아르> 등 프랑스 현지 언론을 통해 곧바로 재인용되며 확산,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1월 프랑스 파리에 주재하는 한국선전단 선전국장으로 불문 잡지를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는 한편, 파리대학 우락 교수를 초청하여 인권옹호회를 조직하고 지리학회장에서 「원동 韓·中 和平이 受하는 압박」이란 문제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언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황 지사는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해 10월 영국의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Mackenzie)와 협의하여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영국의 국회의원·학자·신문기자 등 60여 명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열변을 토해 영국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이끌어냈다. 한국친구회는 한국의 독립 사업을 원조하며, 한국 안에서 당하는 일본의 압박과 학정을 항의하며, 한국의 실정을 선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1920년 12월, 파리위원부 설립 이후부터 추진한 대유럽 외교활동을 소개·정리한‘구주의 우리사업’ 간행에도 참여했다.

황기환 지사는 1921년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대영제국 식민지 수상회의에 참석한 수상들에게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라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일본대사에게도 보냈다. 이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수탈에 대한 실상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승인을 요구했으며, ‘일영동맹(日英同盟)반대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또한, 1921년 일본 히로히토 왕세자가 프랑스 방문 시, 조선인이 암살을 계획한다는 소문에 파리에 있는 조선인들이 감시를 받게 되자 황기환 지사는 그해 6월 30일자 미국 언론 <시카고 트리뷴>을 통해 “조선의 국가적 신용도를 떨어뜨리려는 일본의 계략”이라고 역설하며 한국인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1921년 8월경 이승만의 요청으로 워싱턴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으며,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열린 워싱턴회의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하와이에 파견되어 민찬호와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적극 모집했다.

이후 뉴욕과 런던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3년 4월 17일 심장병으로 미국 뉴욕에서 순국하여 뉴욕 마운트 올리벳 묘지에 안장되었다.

1923년 10월 10일 ‘레 카이에’ 신문은 황기환 지사 부고기사에서 ‘작은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은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은 조국을 해방하기 위한 노력에 그의 모든 정력을 쏟아 인간의 자유와 국제적 정의라는 대의에 영웅처럼 봉사하였다. 극동의 믿음대로 그의 정신이 계속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애정 어린 존경과 조의를 표한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황기환 지사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