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제5대왕인 파사이사금에서 비롯된 박씨왕족 파사왕계 가문은 아도갈문왕(참시선인旵始仙人), 물품파진찬(물계자), 박제상, 백결선생 등 신라 상고기를 대표하는 선가들을 집중적으로 배출한 신라의 대표적인 선도 장로 가문이었다. 신라건국의 주체로서 박씨왕족에게는 국가 보위保衛에 관한 책임이 부여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이후 박씨왕족을 변경 요새지에 파견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그 선상에서 2세기말~3세기초 무렵 파사왕계의 물품파진찬은 대가야對伽倻 요새지인 삽량주지역으로 이거해가게 되었다.

박제상은 선대 물품 이래 오랜 세거지였던 삽량주에서 태어나 학업과 출사를 위해 왕경으로 이주하게 된다. 왕경으로 이주한 박제상은 박씨왕족의 핵심 성원이자 김씨왕실의 지친으로서 내물 후반기 정국에 출사하였다. 당시 신라의 대고구려對高句麗 종속 구도 하에서 고구려‧신라 대對 백제‧왜‧가야 간의 전쟁이 빈발하였는데 그 와중에 박제상은 삽량주간에 배임되었다. 선조 물품이 삽량주간에 배임된 전례에 의한 것으로 그에게는 가야‧왜 연합세력의 연결을 차단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박제상은 신라가 대고구려 종속 및 백제‧왜‧가야의 공격에서 벗어나 자립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라의 대고구려 종속 정도는 더욱 심화되어 급기야 고구려의 개입으로 내물왕이 제거되고 실성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박제상은 신라 국가선도의 담지 세력인 박씨족의 핵심 성원으로서 실성의 대고구려 종속 노선에 반발, 삽량주간에서 물러나 실성 치세기 내내 삽량주에 은거하게 된다.

박제상의 삽량주 은거 생활의 중심은 별서別墅 징심헌澄心軒으로 여기에서 조부 이래의 가풍인 선도를 연마, 방대한 규모의 선도서『징심록』(15지)를 편찬하였다. 『징심록』은 삽량주 은거기 동안 침잠하여 선도를 배양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아쉽게도『징심록』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영해박씨 가문에서 전하고 있는『연의』를 통해『징심록』을 조명해보게 된다.『연의』는『징심록』원본을 전수‧연구해오던 영해박씨 시중공파侍中公派 문천文川 문중의 박재익朴載益이 광복 이후의 혼란 속에서『징심록』원본을 분실한 후 1953년 그간 진행해오던『징심록』연구에 의거,『징심록』중 일부를 복원해 낸『징심록』의 부분 복원본이다.

『연의』는『징심록』의 부분 복원본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징심록』15지 중의 제1지로 한국선도의 존재론 및 역사인식의 요체를 담고 있는「부도지符都誌」, 또 선초의 문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쓴『징심록』해제서인「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가 실려 있어『징심록』연구에 가장 핵심적인 자료가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연의』를 통해『징심록』의 대략적인 편찬 배경, 체제, 성격, 전승과정, 내용 등을 살펴보게 되었다.

『연의』에 의하면『징심록』은 총 3교 15지(상교 5지, 중교 5지, 하교 5지) 체제로 신라초 책자로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상교 5지는「부도지符都誌」·「음신지音信誌」·「역시지曆時誌」·「천웅지天雄誌」·「성신지星辰誌」, 중교 5지는「사해지四海誌」·「계불지禊祓誌」·「물명지物名誌」·「가악지歌樂誌」·「의약지醫藥誌」, 하교 5지는「농상지農桑誌」·「도인지陶人誌」(나머지 3지는 미상)이며 여기에 박제상의 아들인 백결 선생의「금척지金尺誌」및 김시습의「징심록추기」가 별록으로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15지의 제목만을 보더라도 한국선도의 제분야가 망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류의 책자를 편찬하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편자의 높은 선가적 식견이 요구되어졌을 것이다. 박제상은 신라의 핵심적인 선도 가문이었던 박씨왕족 파사왕계의 적통으로서 선도 장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신라의 선도 전통에 폭넓은 식견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박제상에 대한 ‘증각자證覺者’, 또는 ‘연리가硏理家’라는 평은 이러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또한 박제상은 15지에 이르는 방대한 체제의 저술을 위하여 수많은 책자와 자료들을 참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박제상의 집안 자체가 신라의 대표적인 선도 가문으로서 적지 않은 가장서家藏書를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저술의 규모나 내용 등으로 미루어 일가문의 가장서를 정리한 차원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징심록』열람후「징심록추기」를 쓴 바 있던 김시습은『징심록』에 대해 ‘내용이 비단 한 문중에 전해진 것만으로 볼 수 없고, 박제상이 보문전寶文殿 이찬伊飡으로 재직하던 10년 사이에 반드시 그 상세한 것을 얻었을 것’으로 평한 바 있다. 박제상은 박씨왕족의 핵심 성원이었기에 왕실 소장 자료들에도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특히 27세 되던 해에 왕실도서관 겸 문한기구인 보문전 이찬직을 역임하였던 적이 있는데, 이때에 왕실 소장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열람할 기회를 가졌고 또 이것이『징심록』에 반영된 것으로 본 것이다. 김시습은 또한 박제상이 접한 자료들이 신라 개국 이후의 것들이 아니라 더 이전의 오랜 시기부터 전해진 것으로도 보았다.

요컨대 김시습은 선도를 입국이념으로 하고 있던 신라왕실에서 선도 전통을 왕실 차원에서 정리해오고 있었고 이것이 박제상의『징심록』에 반영된 것으로 보았다. 당시 신라사회에서 선도가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나 그 주도 세력의 일원이었던 박제상의 위상 등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경청해볼 만한 견해이다.
상기한 바『징심록』15지의 제목을 통해『징심록』이 당시 신라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선도의 제분야를 망라한 선도 총서류 계통의 책자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책자의 성향에 관해서는『연의』중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징심록』의 일이 멀리는 太古에 관계하고 넓게는 우주의 일에 관여하여 그 광대함은 실로 말할 수가 없으며 우리 동방 創都의 역사와 夏土(중국: 필자주) 變異의 기록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숙연하게 한다. 통칭 그윽한 의미(奧義)가 仙道(여기에서는 韓國仙道가 아닌 中國道敎의 의미로 사용됨. 『연의』에서는 한국선도를 주로 ‘天雄道’로 지칭함 : 필자주)나 佛法과 비슷하나 같지 아니하다. 당시 신라에는 잠시도 仙·儒·佛이 침투해오지 않았으니 이는 古史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 그 神市 往來의 說과 有戶氏 傳敎의 일이 진실이니 고금천하의 모든 法이 모두 여기에서 나와 잘못 전해져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다름이 儒佛의 세계에 용납되지 아니하며, 또 帝王의 영토에서 배척당한 것이 당연하다.

먼저『징심록』의 내용이 ‘우주론에서부터 태고사太古史, 나아가 동방의 창도사創都史’를 망라한 방대한 규모이며 그윽한 의미(오의奧義)는 중국도교나 불교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고 하였다. 이는『징심록』이 한국의 선도사상 및 이러한 선도사상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던 한국 상고사를 다룬 책자로서 특히 중국도교나 불교와 계통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금천하의 모든 법이 여기에서 나와 잘못 전해졌으며, 특히 하토夏土(중국)에 이르러 크게 변이되었다(하토변이夏土變異)’고 보았으니 한국선도가 중국도교나 불교와 계통을 달리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사상적인 원류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한국선도에서 여러 사상들이 분파되어 갔던 과정에 대해서는 ‘신시神市 왕래往來의 설說’ 및 ‘유호씨有戶氏 전교傳敎의 일’로써 설명하고 있다. ‘신시 왕래의 설’의 경우,『삼국유사』를 위시한 많은 사서들에서 ‘신시’는 ‘고조선 이전 환웅씨의 시대’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특히『연의』에서는 ‘환웅씨가 처음으로 배를 타고 사해四海를 순방하여 궁실宮室‧주거舟車‧화식火食 등을 가르쳤으며 돌아와서는 언어와 문자를 익히고 역수曆數‧의약醫藥‧천문天文‧지리地理 등을 정하여 가르치니 이때부터 학문하는 풍조가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러할 때 ‘신시 왕래의 설’이란 신시 환웅시대의 문명과 선도사상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신시의 선도사상을 원류로 하는 많은 사상과 학문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음 ‘유호씨 전교의 일’의 경우,『연의』에서는 고조선초 중원의 요堯가 고조선의 선도에 반하는 이론을 세워 반란을 도모하자 단군 왕검은 요를 다스리기 위해 유호씨를 파견했다고 하였다. 요는 유호씨 일행을 맞아 황하가에 살게 하였는데 유호씨는 상황을 관찰하고 여러 번 거처를 옮겨가면서 요‧순舜‧우禹‧계啓로 이어지는 중원의 패자들을 막고 교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먼저 자신의 아들 유순有舜이 요에 협조하자 순을 벌하였으며, 다시 우가 고조선의 선도에 반하는 정책을 펴고 유호씨를 공격해오자 이를 막고 선도로써 교화하였다. 다시 우의 아들 계가 대군을 이끌고 유호씨를 공격해오자 중원 지역은 교화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서남지역을 가르치기 위해 무리를 이끌고 떠나갔다고 했다.
『연의』외에 중국측 기록에서도 계와 유호씨간의 전쟁 및 유호씨의 출자出自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서경書經』·『사기史記』등에서는 유호씨有戶氏를 유호씨有扈氏로 표기하는데, ‘순대舜代의 삼묘三苗, 하대夏代의 관호觀扈, 은대殷代의 선비姺邳, 주대周代의 서국徐國·엄국奄國 등과 같은 계통으로 특히 계의 즉위에 유호씨가 불만하자 계가 감甘 땅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 유호씨를 징벌하였다. 유호씨를 징벌한 후에야 비로소 주변국이 진정되었다’고 하였다.
삼묘, 관호, 선비, 서, 엄 등은 중원의 패자였던 요‧순‧우·하‧은‧주에 대항한 동이東夷 계열의 종족 또는 나라들인데 유호씨 또한 이들과 같은 계열로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기한바『연의』및 중국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유호씨 전교의 일’이란 고조선초 무렵 고조선을 중심으로 한 선도문화권에서 중원 일대가 이탈되어간 사실을 의미한다.

종합해보자면, ‘신시 왕래의 설’ 및 ‘유호씨 전교의 일’이란 신시 환웅시대의 선도사상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선도를 원류로 하는 여러 사상들이 갈라져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고조선초 무렵이 되자 신시 이래의 선도문화권에서 중원 일대가 떨어져 나가면서 선도가 변이되었다는 의미이다.

『연의』에서는 또한 고조선초 선도문화권에서 중원지역이 이탈된 이후 이곳에서 삼교(중국도교‧유교‧불교)가 성행하여 오히려 한반도 일대로까지 밀려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징심록』이 편찬되었던 신라초 사회에는 삼교가 아직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보았으니 이는『징심록』이 삼교와 상관이 없는 전형적인 선도서라는 입장이었다. 이렇듯『징심록』은 전형적인 선도서였기에 중원으로부터 불·유를 도입한 후대 왕조에 의해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하였다.

이처럼『징심록』이 중국 삼교와 입론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불·유에 의거하였던 후대 왕조에 이르러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음이 지적되었는데,『연의』에서는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박제상의 후손들이『징심록』을 공개하지 않고 극히 조심스럽게 전수해가게 되었다고 했다. 
 

 

 
정경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