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한 세상’
언니의 꿈이자 언니가 사람들과 함께 만들고 싶은 유토피아의 콘셉트다. 잘 모르는 철학에 빗대어 말해보자면 언니는 사람의 본성(本性)은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보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가깝다. 고조선의 건국이념이자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철학을 토대로 나아가 ‘이화세계(理化世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 언니는 평화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이자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착하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영화 ‘헝거게임(Hunger Game)’은 쉽지 않았다. 1편 ‘판엠의 불꽃’과 2편 ‘캣칭 파이어’, 이달에 개봉한 3편 ‘모킹제이 part 1’ 모두 힘들게 보았다. 헝거게임은 기본적으로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공포 정치의 한 방편으로 12개 구역에 사는 24명의 10대 소년 소녀들을 모아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 주인공 캣니스는 여동생을 대신해 74회 헝거게임의 조공인으로 자원하게 된다. [화면. 영화 '헝거게임' 1편 판엠의 불꽃]

헝거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안다 할지라도 영화 속에서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고 최후의 1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내내 불편했다. 매년 한 번씩 치러지는 헝거게임이 1편에서 74회, 2편에서 75회로 나오는데, 이미 1세기 가까운 긴 세월을 각 구역을 대표해 나온 10대 소년 소녀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지켜봐 왔다니…. 언니가 가장 꺼리는 ‘배틀로얄’과 같은 설정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책을 통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헝거게임’이 얼마나 놀랍고도 소름 끼치도록 우리가 사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평화주의자인 언니가 헝거게임이 힘들었던 것은 바로 이 게임이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universale, 보편적 전쟁)’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윤리 시간에 달달 외웠던 철학자, ‘홉스’의 철학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헝거게임을 진두지휘하는 독재국가 ‘판엠’이다.

▲ 칸트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는 주인공 캣니스(우)와 홉스에 가까운 입장의 게일 [화면. 영화 '헝거게임' 3편 모킹제이 part 1]

여기서 잠시 판엠의 역사를 살짝 살펴보고 가자. 판엠은 재난과 가뭄, 폭풍, 화재, 육지를 잠식해오는 바닷물 등이 너무나 많은 땅을 집어삼키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야만스러운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에 판엠의 열세한 구역들이 판엠의 모든 것을 가진 캐피톨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전을 일으킨다. 수많은 생명이 죽어갔고 살아남은 이들은 이때를 ‘암흑시대’라 부른다. 마침내 캐피톨이 반란의 대가로 13구역을 전멸시키고 나머지 12구역이 반역협정에 조인하면서 내전이 종식된다. 헝거게임은 암흑시대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반역협정 중 하나다.

17세기 영국 내전의 경험했던 홉스는 정치철학서 《리바이어던 The Leviathan》을 통해 판엠의 ‘헝거게임’에 철학적 깊이를 뒷받침한다.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 14장에서 이에 대해 정리한 조셉 J. 포이 위스콘신대 정치학 철학 조교수는 “질서를 유지할 만큼 강력한 정부 아래 사는 행운을 누려본 사람이라면, 누가 그런 정치적 권위를 갖건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설명한다. 전쟁이나 전염병, 기아로 수많은 생명이 죽는 지옥과 같은 ‘자연상태’보다는, 누가 되었건 지배자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 더 낫다는 것이다.

판엠의 사람들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인간으로서 누릴 모든 주권과 자유를 포기한다. 질서 있는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안정된 삶을 허락받은 것이다. 매년 10대 소년 소녀들을 조공으로 바쳐 헝거게임을 하는 것은 자연상태에서의 삶은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 75회 헝거게임은 지금까지 헝거게임에서 우승한 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펼쳐진다. 12구역의 대표로 75회 헝거게임에 참석한 캣니스. 판엠의 모든 권력과 부를 장악한 캐피톨 사람들은 죽고 죽이고 최후의 1인이 남는 헝거게임을 마치 요즘 우리가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즐겨본다. [화면. 영화 '헝거게임' 2편 캣칭파이어]

결국 헝거게임은 홉스의 주장대로 ‘내가 남의 손에 죽느니 내가 남을 죽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모토로 삼고 진행된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헝거게임에서 주인공 캣니스도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헝거게임을 펼친다. 하지만 점차 ‘목숨을 잃을지언정 인간의 존엄성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는 피타에게 동화된다. 12구역의 모든 이들을 ‘생존본능의 노예’로 치부하는 캐피톨의 권위에 맞서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철학자가 등장한다. 바로 칸트다. 칸트는 모든 사람은 생명만이 아니라 인간적 존엄까지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생존본능이나 명예욕보다 더 고귀한 자신을 지배하는 능력이고 도덕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이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은 자연상태(헝거게임)에서 도덕보다 자신의 생존에 더 큰 관심을 쏟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홉스(캐피톨)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사는 것임을 영화 ‘헝거게임’은 캣니스를 통해 보여준다. 캣니스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캐피톨에 대항하는 혁명의 아이콘(모킹제이)이 된다. 그리고 인간답게 생존하기 위한 혁명을 시작한다. 헝거게임과 같은 죽고 죽이는 게임을 하며 사는 것도 싫지만, 언제까지나 숨 쉬는 것 외에 모든 자유를 빼앗긴 채 독재 권력 밑에서 살아만 있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헝거게임’에서 시각을 조금만 돌려 지금 언니를 비롯한 우리가 처한 세상으로 돌려보자. 우리는 누군가가 바람직하고 옳다고 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정작 나의 귀한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지금 진짜 내 삶의 주인으로 인간다움을 영위하며 살고 있는가.

쉽지 않지만 한 번쯤 깊이 생각해볼 다양한 질문과 그 질문에 도움될 철학자들의 사유가 여기 《헝거 게임으로 철학하기》에 있다.


글. 강만금 기자 sierra_leon@liv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