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또는 '공후인(箜篌引)'은 고조선의 시가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 고대 문학 작품이다. 첫 구를 따서 ‘공무도하가’라 부르기도 하고, 하프와 비슷한 악기인 공후를 타며 부른 노래라 하여 ‘공후인’이라고도 한다. 사언사구(四言四句)로 된 짧은 한시의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고조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공무도하가'와 동일한 내용의 악곡 형태로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공후인', 그래서 작자도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대체로 '공무도하가'는 원작자가 백수광부의 처라고 인식되고 있고,'공후인'은 곽리자고의 처, 여옥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무도하가'의 시ㆍ공간적 배경이다. 시간적 배경은 한국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시대이고, 공간적 배경은 대동강, 압록강 등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는 오늘날 한강이라는 설도 있다. 과연 그런가? 고조선 시대의 강역은 그 동안 칼럼을 통해 고대 중국과의 경계를 고대 요수인 난하라고 하였고, 그것이 점차적으로 지배적인 의견이 되어가고 있음을 여러 유물 및 유적들을 통해 입증한 바 있었다. 즉 고조선의 강역은 난하의 동쪽이자 요하의 서쪽인 요서지역, 요동 및 만주지역, 한반도 전역을 다 아우른다고 할 수 있다.

『해동역사』의 관련 기사를 살펴 보면,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7권 예문지(藝文志) 6, "여옥(麗玉) 공후인(箜篌引) 고금주왈(古今注曰) 공후인(箜篌引) 조선진졸(朝鮮津卒) 곽리자고(藿里子高) 첩(妻) 여옥(麗玉) (소작야)所作也 상견악지(詳見樂志)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 타하이사(墮河而死) 당내공하(當奈公何) 기자조선(箕子朝鮮)"
“여옥의 공후인 : 고금주에 이르기를 공후인은 조선진의 졸인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 지은 것이다. 상세한 것은 악지에 보인다. 공무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당내공하 이것은 기자조선의 것이다.”

조선후기 한치윤은 그의 저서 『해동역사』에서 ‘공무도하가’의 시ㆍ공간적 배경을 기자조선과 대동강으로 보았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의 낙랑군 조선현으로 보고 국가 귀속은 당연히 중국으로 귀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리적인 위치는 사실 분명하다. 수록된 배경 설화에 ‘조선진(朝鮮津)’이라고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고 있다. 특히 서기 1~3세기에 해당되는 후한 및 서진 시대에 조선이라는 지명을 갖고 있는 지역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넓은 의미로 조선 전역에 있는 어느 나루터가 아니라 특정 지명으로서의 ‘조선진’ 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중국 입장에서 기원전 3~4세기 이후부터 서기 1~3세기 사이에 특정 지명으로‘조선진’이라고 쓸 수 있는 지역은 어디인가? 기원전 4세기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는 중국과 고조선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 유역이었고, 진개 동정으로 2,000 여리를 빼앗겼다고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으로 곧 회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여전히 난하와 요하 사이로 오늘날의 요서지역에 있었던 강 유역에 있었던 나루터를 ‘조선진’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백수광부의 처가 처음 노래했던 시기로 보면 그 ‘조선진’이 지금의 난하 유역 혹은 요하 유역에 있는 나루터가 유력하고, 특히 ‘요하’는 중국인이 불렀던 이름이며, 고구려인들은 ‘압록수’라고 했고, 말갈인들은 ‘마자수’라고 하였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곽리자고 개인은 조선인으로 되어 있지만, 곽리씨라는 성씨는 고구려의 씨족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는 점이다. 한치윤도『만성통보(萬姓統譜)』를 근거로 하여 곽리씨(霍里氏)를 소개하며, 그 예로 조선인 곽리자고를 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공무도하가』는 역사인가? 문학인가?
역사적인 요소는 무엇이고, 문학적인 요소는 무엇인가?
역사로서 혹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무엇인가?
역사와 문학은 어떤 관계에 있나?
역사와 문학이 추구하는 바가 달라 자칫 다르게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인문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역사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발견하고 문학의 행간에서 역사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는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고, 작가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준다. 문학은 역사적 사실을 모태로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 되어 있을 법한 이야기로 재탄생된다. 하지만 때로는 역사의 진실을 문학이라는 형식을 빌려 일반 대중에게 알리기도 한다. 역사의 진실이 살아 있는 문학, 이야기가 살아 있는 역사, 그리고 일반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인문학이 그 사명을 성실히 이행할 때 그 시대의 정신문화는 발전하며 위대한 인류의 정신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는 홍익인간의 역사적, 정신문화적 배경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알고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공무도하가'는 한국적인 여심을 노래한 첫 번째 작품으로 간결하고도 직접적인 표현 속에 여인의 비극적 상황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고대 역사 속에서 여자의 미학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임과 함께 물을 건너지 않고, 어쩌면 세상사적인 경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강변에서 살고 싶은 여인네의 마음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던 동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공무도하'라는 시구는 임과의 이별을 거부하는 여인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며, 임과의 만남을 지속시키려는 여인의 처절한 몸부림이 '건너지 말라'는 짤막한 표현 속에서 이미 비극적인 결말을 직감하게 한다. 비극적 여심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의 서정적 묘사와 애절하게 행복을 지속시키려는 의지가 결코 현실 속에서는 받아들여 지지 않고 마침내 무너지고 마는 이별의 상황인 것이다. 임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남편을 걱정하던 아내의 마음을 결국 죽음을 선택하고 마는 극한으로 치닫게 하고 있지만 그것이 이별 뒤에 다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우선 각 행에 나오는 '물'의 상징적 의미가 어떻게 다른 가 이다. 1행은 사랑의 충만이고, 2행은 임이 떠난 후 사랑의 부재이며, 3행은 사랑의 결말을 각각 나타낸다.
두 번째는 슬픔과 한이라는 개인적 정서를 노래하고 있어 서정적이라는 점이다. 세 번째는 문학사적 의의로서 『황조가』와 더불어 현존하는 최고의 서정시로 원시적 집단적 서사시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옮아가는 과도기적 문학작품이라는 점이다.
특히 물의 상징적인 의미는 '만남과 이별'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어 지극히 의미심장한 시어라고 할 수 있다. 즉 백수광부가 강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이별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면, 남편의 죽음을 보고 아내도 따라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남편과 새로운 차원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만남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도 한 것이다.

현대의 '공무도하가'는 1995년에 발매된 이상은 6집 '공무도하가'이다. 다음은 그 가사 내용이다.

이상은의 ‘공무도하가’

“님아 님아 내 님아 물을 건너가지 마오
님아 님아 내 님아 그예 물을 건너시네
아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
아 가신님을 어이 할꼬
공무도하
공경도하
타하이사
당내공하”

고전과 전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고전문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의미를 확대하여 오늘의 시각으로 재조명하고 재해석해서 현대 음악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공후 등 전통 악기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고전적 가치를 복원하였고, 민족과 국가를 운운하지 않아도 절로 민족적 정서와 닿아 있다. 고대 가요와 현대 가요의 만남,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이렇듯 현대 가요로 계승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태백의 ‘공무도하(公無渡河)’

“황하는 서쪽에서 와서 곤륜산을 뚫고 만리에 포효하다 용문에 부딪친다.
물결이 하늘에 차자 요 임금 한숨지었지.
우 임금은 모든 강물 다스리며 아리가 울어도 집에 들르지 않았다네.
여울 막고 홍수를 메우니 온 땅에 누에 치고 삼을 심었네.
재앙은 물러가고 끝없이 모래 바람 휘날리는데.
머리 풀어헤친 늙은이 미치고 어리석구나.
새벽에 물을 건너 무얼 하려나.
님이야 관심없지만 아내가 말리는구나.
님이여 건너지 마오. 기어이 건너는구려.
호랑이는 잡을 수 있어도 강은 건너기 어려워.
님 결국 빠져 죽어 바다로 흘러가니 설산 같은 하얀 이빨의 고래가 있구나.
님이여, 님이여, 고래 이빨 사이에 걸렸네.
공후 소리 슬프건만, 님은 다시 오지 않는구나.”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선(詩仙)인 이태백은 ‘공무도하’를 노래하면서 그 공간적 배경을 황하 유역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보니 공간적 배경은 정말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가장 유력한 지역은 어디인가? 그것은 앞서 살펴 본대로 난하 혹은 요하 유역이다. 난하의 동쪽이자 요하의 서쪽이 지금의 요서지역이다.

'공무도하가'를 통해 찾은 살아있는 우리 역사는 곧 사람들의 정서 속에 녹아 있는 정신문화이고, 그 옛날 고조선인들의 세계관과 사랑에 대한 생각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민족적 정서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변함없는 역사적 진실인 것이다.

 

 

단기 4347년 2월 13일

국학박사 민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