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왔다. 지난 3개월 간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며 보았던 유물들이 한 곳에 전시되어 있어 유물 하나하나가 반가웠고 그동안 답사를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총 6개 관과 50개 실로 구성하여 유물 12,044점을 전시한다.  박물관을 다 보는 데는 일주일이 걸린다고 할 만큼 규모가 크다. 시민연대에서는 이번 답사를 시작으로 7, 8월 국립중앙박물관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자세히 답사할 계획이다.

▲ 신석기 도구들.

선사‧고대관은 우리 문화의 기원과 전개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구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 발해시대에 이르기까지 선사와 고대의 시간을 넘나드는 10개의 전시실에서 8,730여 점의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구석기부터 신라시대까지 8개의 전시실을 보았다.

선사‧고대관을 들어서자마자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우리를 맞이했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도 반구대암각화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하여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모습이 새겨진 그림이다. 그런데 1965년 만든 사연댐으로 인해 비가 많이 오면 물속에 잠겨 훼손되고 있다. 국보 285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가 지켜내야 할 문화재인 것이다.

▲ 고조선의 마차.

다음으로는 기원전 2333년 고조선부터 이어온 우리나라 반만년의 긴 역사연표를 볼 수 있었다. 언젠가는 고조선 이전시기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까지도 기록되어 있는 역사연표를 보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구석기실로 들어섰다.

마침 저번주 답사지가 전곡리선사유적지였는데, 구석기실 입구에 전곡에서 보았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구석기 설명에서 우리나라에는 호모에릭투스는 없었고 호모사피엔스부터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전곡선사박물관의 기록에는 한반도에 호모에릭투스가 있었다고 한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이 부분에 시민연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질의를 할 계획이다. 이처럼 역사에 관한 기록이나 해석이 다른 부분이 많이 있다. 그래서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가 존재하는 것이고,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박물관뿐 아니라 교과서 등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고 바른 역사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확인하고 연구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구석기와 신석기실에서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환경을 이용한 노력을 볼 수 있었다. 곡식을 재배하고 담기 위한 그릇과 농기구, 사냥을 위한 도구, 추위를 이기기 위한 옷과 집 등 많은 유물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등장하는 장신구와 예술품 등이다. 신석기 시대에 목걸이가 등장했고, 흙으로 빚은 여인상 등이 출토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청동기에 들어오면서 유물의 수준이 아주 세련되어지기 시작한다. 고조선하면 단군신화라 하여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 원시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그러나 이곳 박물관의 고조선실만 한번 자세히 본다면 고조선이 얼마나 발달한 청동기문명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조선의 거리를 달린 쌍두마차의 유물을 보라. 이제 더 이상 '단군신화'라는 단어는 폐기해야 한다.  찬란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역사, 고조선의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 고조선 청동동검.

독특한 문화가 있었지만 많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안타까운 부여.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말은 유명하였다. 농경민이면서도 기마 풍습이 일반화되어 있었고 훌륭한 말을 생산하여  부여족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부여족의 일파가 남으로 이주해 고구려나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도 이러한 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와 함께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번성했던 삼한의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고조선이후 더욱 발달된 청동기, 철기 무기와 장신구들, 세련된 토기들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는 아주 화려하고 발달된 문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문자가 포함된 유물들이 많이 있고, 불교유물, 다양한 무덤과 장신구, 발달된 무기 등 번성한 국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四神) 그림 모사본이 있다. 사신은 사방, 사계절, 별자리, 음양조화를 뜻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무덤을 통해 신선 사상과 불교적 내세 등 그 당시 사후세계와 종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7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중국의 침략을 이겨낸 고구려의 대표적인 방어체계인 산성의 유물과 발달된 철기문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말까지도 갑옷을 입힌 철갑기병인 개마무사의 유물과 칼, 활 등 철제무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백제관에 들어서면 중앙에 보이는 향로.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는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는 향로로써 부여 능산리 백제시대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이 향로는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막 피어날 듯한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연꽃 봉오리의 중앙이 아래위로 분리되어 향로의 몸체와 뚜껑을 이루고 있다.

▲ 금동미륵반가상.

신라관에서 대표적인 유물은 바로 신라 금관이다. 화려한 장식과 독특한 외관이 돋보이는 금관은 정교한 세공기술로 전세계적으로도 그 화려함이나 기술을 인정받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금관과 함께 또하나 신라의 대표적 유물인 말 탄 사람 토기(기마인물형토기)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 토기는 국보 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실적인 묘사로 신라인의 생활상, 의복, 말갖춤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박물관 1층의 절반을 보고 마지막으로 꼭 보아야 할 유물이 있어 3층 조각‧공예관으로 향했다. 바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다.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 바람에 직접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고자 달려갔다. 이 상은 일본 교토 고류지 목조반가사유상의 제작지를 근거로 신라작이라는 주장이 많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두 상은 삼면관의 보관 형태, 가슴과 허리의 처리, 무릎 밑의 옷자락과 의자 양 옆으로 드리운 허리띠 장신구 등이 매우 흡사하여 주목을 받아왔다. 고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은 당시 일본 목조불상 대부분이 녹나무나 비자나무로 제작된 것에 반해, 한국의 경상도 일대에서 많이 자생하고 있는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제작방법에 있어서도 신체의 각 부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다음 짜 맞추는 일반적인 방법과 달리 통나무 하나에 상을 그대로 깎아서 조각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日本書紀) 623년조에 신라에서 가져온 불상을 고류지에 모셨다는 기록이 있어 이 불상을 목조반가사유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입가에 머금은 생기있는 미소, 살아 숨쉬는 듯한 얼굴 표정, 부드럽고 유려한 옷주름, 상체와 하체의 완벽한 조화, 손과 발의 섬세하고 미묘한 움직임 등 모든 것이 가장 이상적으로 표현된 동양불교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신라 말 탄 사람 토기.

이번 박물관 답사는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예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시민연대에서 공부하고 답사를 다니고나서 방문한 박물관은 그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많은 유물을 통해 본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에서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직도 해외에 있는 10만 여 점에 이르는 우리의 위대한 유산들을 하루 빨리 찾아와야 겠다는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했던가. 우리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더욱 우리 민족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을 실천할 방법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의 발걸음은 오늘도 멈출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