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올해가 3회째라 하며 경남 언양에서는 추모식과 각종 축하행사를 연다. 매우 축하할 일이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다. 우리나라는 의병의 나라요 의병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나라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의병이 이룩한 업적은 그 어느 다른 운동보다 컸다. 조선시대뿐 아니라 고려시대나 삼국시대에도 알고 보니 의병이 외적을 물리쳐 망국을 면했다. 의병은 민군이었다. 관군이 아니었다. 요즘에는 국군이라 하지만 사실상 민군인 의병이 무너지는 국군을 대신하여 국군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의병장이었으나 아무도 그를 의병장으로 알아주지 않는다. 안 의사는 이등박문을 총살하기 전에 실제로 노령에서 의병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격작전을 감행했다. 그것은 여순감옥에서 쓴 그의 유서 『안응칠 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안 의사는 단지 의병장뿐만 아니라 탁월한 역사가였다.

우리나라 역사 전반에 걸쳐 안중군 의사와 같은 의병장이 여러 번 일어났다. 민족의 시조부터가 의병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 내려오셔서 배달국을 세웠다.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이라 하는데 배달이란 말은 고개가 많은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있는 박달재를 말한다. 박달재는 일명 아리랑 고개라 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수많은 아리랑 고개로 이루어져 있다. 노래에는 '십리도 못 간다'고 하였으나 한국은 수천 수만 리를 넘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태초에 환인이 환웅에게 3,000명 아니 3,000단부의 의병을 주어 지상에 내려보냈는데 이것이 우리 역사의 시작이었다. 그 뒤 그 유지를 받들어 중국을 정복한 분이 치우환웅이었다. 14대 환웅 치우는 우리 민족의 군신이었다. 그 뒤 치우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이순신 김좌진으로 이어지면서 고비마다 나타나서는 외적을 물리쳐 주었다.

제주도에 가면 고려시대의 의병 삼별초가 여몽전쟁을 치룬 최후의 전적지가 남아 있다. 그때 의병은 관군에 밀려 한라산으로 올라가서 그 행방이 묘연하였으나 필자가 우연히 일본 오키나와 나하(那覇)에 가보니 수례문(守禮門)이 있고 고려 삼별초의 후손들이 아직까지도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다. 오키나와 박물관에 가면 오키나와의 중심은 고려라 하였다. 고려 종에 그렇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고려 의병 삼별초가 제주도 서귀포에서 배를 타고 오키나와로 건너갔다. 고려시대에 몽고군이 세계를 정복했는데 고려만은 40년 항전 끝에 바다를 건너가서 절도絶島에 보라는 듯이 망명국을 세운 것이다. 그 저력은 삼별초라는 이름의 의병에게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한말의 일제침략에도 의병이 수십 년간 항일전쟁을 벌였고 그것이 독립전쟁이 되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국 의병의 뿌리와 그 공로 그리고 그 정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우리 역사에서 의병을 빼고 없앤다면 벌써 그 옛날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거나 아니면 중국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다.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한국인처럼 자존심이 강한 민족은 없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조국을 잊지 않는다. 의병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갑자기 부산에 침략해 온 것은 1592년 4월 14일의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21년 전의 일이다. 최근 일본 수상 아베가 "일본은 과거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한 일이 없다"고 망언하였다. 그는 일제침략은 물론 임진왜란까지도 침략이 아니라 믿고 있다. 임진왜란이 침략이 아니라면 왜 우리가 의병을 일으켜 행주산성에서 바가지를 쓰고 적과 싸웠을까. "아베 네가 권율 장군에게 직접 물어보라!" 의병이 누구인가를 알려면 임진왜란 의병부터 만나 보아야 할 것이다.

임진왜란 때 부산 시장이었던 정발鄭撥은 영도에서 술을 마시고 잤는데 작취미상(昨醉未詳) 상태에서 새벽에 일어나 토끼 사냥을 나갔다. 요즘으로 말하면 적이 쳐들어온다는데도 장군들이 골프를 즐긴 사건과 같다. 함께 간 노비가 정발에게 "삿도! 저기 부산항에 왜적이 탄 배가 500척이나 새까맣게 깔렸습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정발은 "저 토끼부터 잡아야 하겠다. 나는 바쁘다."고 하면서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보니 정말 적선이 바다를 꽉 메운 것을 보고 부랴부랴 부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성은 왜군이 먼저 점령하고 있어 제대로 한 번 싸우지도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동래성도 마찬가지어서 성주 송상현宋象賢은 왜군이 보는 앞에서 자결하였다.

이렇게 간단히 부산과 동래를 점령한 왜군은 서울을 향해 북진하였는데 서울에 도착하는데 정확히 20일이 걸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간다 해도 20일이면 모자라는데 달려가듯이 왜군이 서울 남대문 앞에 도착하여 남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지키는 군사가 하나도 없었다. 왜장은 이것이 분명 조선군의 계략이거니 하고 3일간이나 성 밖에서 머뭇거렸다. 그런데 3일 뒤 한 선비가 문밖으로 나오더니 "어서 오십시오 "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서야 왜군이 안심하고 도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대문은 최근 한 노인에 의해 불타서 5년 만에 복원되었으나 숭례문이란 현판은 다행히 타지 않아 그대로 달았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적을 환영한 그 선비의 매국정신(?)이 살아남아 축하했다고나 할까.

다시 임진왜란 당시로 돌아가서 당황한 임금 선조를 만나 보자. 그는 급히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적이 한강을 건너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여기서 떠나서 도망가야 하는지 누가 대답해 보시오." 하니 신하들이 별의별 정신 나간 술책들을 다 늘어놓았다. 결국 선조는 일찌감치 피난하기로 결정하고 압록강 가의 의주(義州)로 파천하였다. 명나라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사신을 보냈으나 한 달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는 믿을 것은 의병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삼남(경상 전라 충청)에 다음과 같은 호소문(교사)을 보냈다.

"생각하건대 내가 임금 구실을 못해서 백성을 안전하게 보존하지 못하였다.  첫째 인화人和에 실패하였고 둘째 국방을 소홀히 하여 나라를 잃고 수도 서울을 떠나 멀리 평안도 의주로 천도하여 물러앉은 지 석 달이나 되었다. 서울의 종묘사직은 폐허가 되었고 백성은 왜적에 도륙을 당했으니 하늘도 무심하구나. 그러나 모든 죄는 내게 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인화에 실패하였다는 것은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며 그래서 임금 노릇을 하지 못해 이렇게 된 것이 한이라 하였다. 이 호소문은 임금의 반성문이자 동시에 전국의 국민에게 의병을 일으켜 달라는 호소문이었다. 이 호소문을 받아 읽어 본 사람들은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일일이 아무개 아무개 이름을 부르면서 의병을 일으키라 하였으니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구중궁궐에서 수라상을 받아야 할 임금이 끼니를 거르면서 국민에게 반성문을 썼으니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임금이 국민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니 제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해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약속하는 방송을 내어놓고 몰래 한강을 건너 피난하였으니 선조의 교서는 왕으로서 엄청난 글을 쓴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도 선조 못지않게 인화를 지키지 못하였고 국방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박성수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독립운동사 연구」,  「역사학개론」,「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 왜곡」, 「단군문화기행」, 「한국독립운동사론」,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한국인의 역사정신」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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