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은 의병의 날이다. 국가보훈처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김원국 김원범 형제 의병장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우리는 의병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대일항쟁기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은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의병은 멸할 수 없다. 의병은 우리 민족국가의 정수(精粹)”라고 말했다.

국가가 외침을 받아 위급할 때, 국민 스스로 일어나 조직하는 자위군(自衛軍)이자 민군(民軍)이 바로 의병이다.

안호상 의병기념사업회장과 이선근 곽망우당기념살업회장은 1975년 10월 7일 임진왜란 당시 첫 의병을 일으킨 4월 22일을 '의병의 날'로 정해 달라고 국회 등에 청원했다.

이에 강기천 의원 등 국회의원 77명의 찬성을 받아 제출된 이 청원서는 "의병의 얼은 바로 자주국방의 향토방위정신으로 직결되는 것이며 구국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의병의 날을 제정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따르면, "이들은 독립기념관 건립 추진과 때맞춰 외세항쟁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의병의 날' 제정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1982년에도 추진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2008년 8월 의령군수 등 1만 5,586명이 '호국의병의 날' 기념일 제정을 국회에 청원했다. 마침내 2010년 2월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됐다. 임진왜란 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로 선정했다. 2011년부터 정부 주관으로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는 행사를 개최한다. 

다음은 형 김원국과 동생 김원범 의병장이다.

형 김원국 의병장

▲ 김원국 의병장
김원국(金元國, 元局, 昌燮) 의병장은 1873년 광주시 당부면 북촌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9월 광산 송정읍에서 일군을 타살하고 피신했다. 1906년 3월, 동생 원범(元範)과 광주 무등촌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907년 9월, 기삼연(奇參衍)과 김태원(일명 金準)이 합진하여 일대성세를 이루게 되자, 그해 12월 김태원 휘하에 들어가 선봉장이 됐다. 이때 부하 삼백여 명으로 광주 수비대와 교전하여 40여 명을 사살했다.

1908년 1월, 기삼연과 김태원이 순국한다. 김원국은 개별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8년 9월 광주 선암시장에서 의병장 조경환을 만나, 동생 원범이 조경환 의진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 인연으로 김원국도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었으며, 동생 원범은 도포장에 임명되어 형제가 함께 한 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1일 창평 무동촌에서, 1월 11일에는 장성 낭월산에서, 3월 7일에는 영광 토산에서, 3월 25일에는 광산 어등산에서 일군과 각각 교전하였다. 1909년 3월 초에는 장성군 남일면에서 부하 150명을 거느리고 일군과 교전했다. 3월 18일에는 부하 80명과 함께 나주 등지에서, 5월 19일에는 영광 불갑산에서 적과 싸웠다.

1908년 6월, 광주 우암면에서 일군과 교전하던 중,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체포당하였다. 목포로 압송되던 도중 호송하던 일 헌병의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서 결박당한 손을 몰래 풀고 돌을 집어서 헌병을 타살한 후 함평 먹굴산에 잠시 피신하였다.

▲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원국 의병장(제공=독립기념관)

1908년 12월,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한 뒤에는 그 휘하의 의진을 스스로 통솔하여 의병장이 됐다. 곽진일(郭鎭一)을 선봉장, 오덕신(吳德信)을 중군장, 김재연(金在淵)을 후군장으로 하여 부하 오백 명을 거느리고 광주· 나주· 능주· 동복· 창평· 담양· 장성· 영광 등지에서 적을 괴롭혔다.

1909년 12월 5일 영광 불갑산으로 이동 중, 일군과 교전하다가 체포됐다.  광주 감옥을 거쳐 대구 감옥으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동생 김원범 의병장

▲ 김원범 의병장
김원범(金元範) 의병장은 1886년 1월 9일 광주군 당부면 북촌리에서 태어났다. 13살 연상의 친형인 김원국과 1906년 광주 무등산에서 거의했다. 의병 삼백여 명을 규합하여 선봉장이 됐다.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1907년, 기삼연과 김태원이 거의하자 그 의진 휘하에 들어가 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는데, 특히 의병 3백여 명을 이끌고 광주수비대와 교전하여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했다. 1908년 봄, 기삼연과 김태원이 순국하고, 김태원 휘하 오성술· 조경환· 전해산 등 부장들이 각기 의병장을 칭하게 되자 처음에 전해산 의진 중군장이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경환 휘하에 소속되어 활약하였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피신 중이던 형 원국도 광주군 선암시장에서 조경환을 상봉한 후 동생이 그 휘하에서 활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조경환 의병부대의 선봉장이 되고, 원범은 도포장이 되었다.
 
이 해에 원범은 창평 무동촌· 장성 낭월산· 영광 토산· 함평 오산 등지에서 다시 적과 교전했다. 특히 이즈음 형 원국은 광주 등지에서 의병토벌전 주역이던, 이른바 삼국대장(三國大將)이라고 일컫는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吉田)를 교전 중 사살했다.

1908년 9월, 영광군 황량면에 살던 일본 헌병의 밀정 변 아무개를 부하 20 명과 함께 함평군 식지면 군평에서 붙잡아 총살했다.

1909년 1월, 의병장 조경환이 전사하자 다시 전해산과 합세하여 '대동창의단(大同倡義團)'을 조직하였다. 이 의진에서 김원범은 전해산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본인은 중군장을 맡았다. 그 후 광주· 나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계속 형 원국과 함께 활약했다.

1909년 2월, 광주 무등산에서 일병과 교전 중 마침내 체포되어 광주수비대에서 취조를 받다가 1909년 9월 2일 스스로 혀를 끊어 23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형 원국과 똑같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유족(김복현)를 만난 박 도 씨에 따르면 “김원국 할아버지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김원범 작은 할아버지는 시신을 찾지 못해 안장하지 못하고 있다. 김원범 작은 할아버지는 총각으로 순국해 후손이 없기에 아우(김복열)가 양자로 가서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고 밝혔다.

한편, 독립기념관(관장 김능진)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김원국 김원범 두 형제 의병장의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6월 한 달 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박 도 著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