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과거사를 부정하는 망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아베 총리는 23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침략에 대한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며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 어느 쪽의 관점으로 보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일제 침략사를 부정하는 궤변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정길영 국학연구소 연구원은 “일본 정치인들이 세계 2차대전 전범들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그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 하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정 연구원은 “주변국의 책동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의 사관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라며 “홍익인간 정신으로 대한군정서 총재가 되고 청산리전투로 알려진 대일항쟁의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일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오는 26일 국회 헌정회관에서 '대일항쟁기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안보 - 백포 서일의 역사관 및 대일항쟁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린다.(기사 바로가기 클릭 )

이날 정길영 연구원은 '서일의 대한군정서 설립과 상해임시정부에서 역할'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한다.

정 연구원은 지난 2012년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에서 <백포 서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 서일을 연구한 1호 박사다. 지난 23일 정 연구원과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 국내 서일 박사 1호, 정길영 국학연구소 연구원

- 최근 일본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세계 2차대전의 전범들이 있는 신사를 참배한 것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일본 10대들이 할아버지 옷을 입고 신사 앞에서 제국주의로 되돌아가자고,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을 모두 수복해야 한다고 외치는 일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사대주의사관, 식민사관, 실증사관에 젖어 우리의 소중한 것을 부정해 온 탓이다. 그런 연유로 중국은 고구려사와 발해사 등 우리 민족의 기원과 연관된 대륙의 역사를 왜곡했고 한글, 아리랑 등 한민족의 전통문화마저 그들의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일본은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 그렇다면 어디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가?

먼저 주변국 책동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관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군민족정신이 살아있을 때는 그 나라는 흥하였고 단군민족정신이 쇠퇴하면 그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단군민족주의는 홍익인간 정신이므로 국수주의로 비판받을 이유도 없다. 서일은 바로 이 정신으로 대한군정서 총재로서 청산리전투로 알려진 대일전쟁의 첫 전투를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일항쟁의 정신적 기반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전통사관을 확립하고, 홍익인간 정신으로 세계평화를 이끄는 정신지도국으로 일어서야 할 것이다.

▲ 청산리전투 직후 기념사진(제공=독립기념관)

- 서일에 대해 대한군정서, 청산리전투 등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이때의 활약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서일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그는 1911년 중광단을 조직하여 1920년 청산리전투까지 10여 년 동안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대한군정서라는 강력한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청산리전투는 미리 계획한 전투가 아니었다. 소규모 대일항쟁군들이 국내진공작전을 수시로 펼쳐 일본 관공서를 파괴했다. 결국엔 일본 정규군의 추격전인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가 발생한 것이다. 그 전투에서 또다시 일본이 대패하고 만다. 이때부터 일본은 간도지방 항일무장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전이 벌이게 된 것이다.

서일은 10년 동안에 걸쳐 무력부대를 만들고 대비해왔기 때문에 원치 않았던 일본과의 전쟁이었지만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1920년 간도지역에 있었던 수많은 전투 중에 유독 청산리전투 성과만을 높게 평가받았다. 그 전투현장의 지휘관이었던 김좌진, 홍범도 등만 영웅이 되고 서일과 다른 전투는 빛이 희미해진 것이다.

그러나 1920년 한일전인 ‘간도회전’은 청산리전투지역인 서부전선과 혼춘과 왕청 일대의 동부전선으로 나누어 전투가 진행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주력부대는 김좌진이, 연합부대는 홍범도의 인솔로 서부전선에 참여하였다. 서일은 잔여 부대를 이끌고 군무도독부,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나자구의사부 등 8백여 명과 일본군 1만 명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펼치며 적들을 소탕하였다. 일본군이 서부전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놓고, 또 청산전투 후의 서부전선 부대들이 무사히 밀산지역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퇴로를 열어주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서부전선은 항일무력부대 1~2천 명이 일본군 5천 명과 싸운 전투엿다. 반면에 동부전선은 전체병력 8백여 명이 일본군 1만 명과 싸웠다. 그 전투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부담이 컸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전쟁에 승리한 서일의 리더십이 궁금하다. 당시 독립운동에는 다양한 세력이 있었고 갈등도 많았던 것으로 안다. 어떻게 규합시켰나?

서일은 어떠한 세력이든 조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두 끌어안았다. 서일은 중광단을 조직할 때 대종교도와 의병을 중심으로 했다. 그러다가 1919년 3‧1항쟁 이후 본격적인 무력투쟁을 위해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중창했다. 이때 대종교 일색에서 탈피하여 누구든 대일항쟁의 뜻이 있으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간도회전 후에는 10여 개의 유력한 항일무력부대들이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을 때도 3,500명의 독립군이 서일 장군을 총재로 추대했다.

이것은 서일이 단군민족주의를 내세워 결속을 다지고 항일투쟁의 의지를 극대화 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서일은 무기 구입과 운반 등 위험한 일을 솔선수범하는 등 사심 없이 항상 낮은 자세로 임했다. 그래서 독립군이 그의 인품에 감복하였고 수장의 자리도 조직원들의 추대로 이루어졌다.

▲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파호 삼종사(나철, 김교헌, 서일) 묘역(제공=정길영 국학연구소 연구원)

- 이번 발표에서 대한군정서와 일본군의 싸움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1919년 4월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재정도, 군대도 없었다. 서일은 10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해 다른 어떤 항일단체보다 막강한 ‘대한군정서’ 무력부대를 만들어 냈다. 이후에 대한군정서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군대가 되었다. 따라서 청산리 전투는 의병전이 아니다. 마땅히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 북간도에 활동한 서일과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둘의 관계가 밀접하다고 보는 이유는?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 독립군 지도자․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임정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대종교 3대종사(나철, 김교헌, 윤세복)에 들어갈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니 그의 영향력은 컸다. 또한 임시정부에서 신규식을 대한군정서에 보내 주요사안을 연락했다. 임시정부는 대한군정서를 정식 군대로 삼았다. 서일은 임시정부의 군무총재로서 간도지역의 항일무장부대를 통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서일과 임시정부의 관계는 밀접하다고 봐야 한다.